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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고증식 高蒸植
1959년 강원 횡성 출생. 1994년 『한민족문학』으로 등단.
시집 『환한 저녁』 『단절』 『하루만 더』 『얼떨결에』 등이 있음.
auraji@naver.com
그만 분필을 놓을 때
시험이 끝났다 어떤 녀석들은 세 문제나 틀렸다 엉엉 부둥켜안고 어떤 녀석들은 세 문제나 맞혔다 방방 떠다닌다 그 사이에 엉거주춤 내가 서 있다 이쪽도 저쪽도 분명치 않게 오랜 세월 그 틈을 벌리는 일에 동참해온 건 아닌가 반뼘 분필의 무게가 하교할 때가 다 돼서야 시리게 와닿는 아침
이름값
1924년생 서운(西雲) 여사
서녘 서에 구름 운 자
간난이 분이 언년이 같은 이름들 앞에
언뜻 도력 높은 선사의 법명 같은
서역으로 향하는 구름의 달관, 어쨌거나
그녀의 팔십 평생을 한 단어로 줄여보라면
‘낙천’
젊어 홀로 다섯 자식 거두면서도
살아생전 울음 한번 보인 적 없다
머리 싸매고 누운 걸 본 적도 없다
죽을 만치 속상하면
—내 칵 양잿물이라도 마셔야지, 한마디면 끝
그 말에 잠 설치다 깨어나 보면
새벽같이 벌써 밭에 나가 엎드렸던 그녀
먼 친정 조카의 빚보증으로
논 닷마지기 하루아침에 날리고서도
—에휴 불쌍한 눔 어디 가 밥이나 먹고 댕기는지
코 한번 팽 풀면 끝
언젠가 엄마 이름은 왜 그럴듯해, 물었더니
—그럴듯하긴 제길,
니 외할부지 또 딸이라고 서운해서 그랬다더라
아 다른 건 다 두고라도 그 천성 하나는
꼭 물려받고 싶었던
서녘 서에 구름 운 자, 우리 허서운 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