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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박성우 朴城佑
1971년 전북 정읍 출생. 200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거미』 『가뜬한 잠』 『자두나무 정류장』이 있음. ppp337@hanmail.net
다정다한 다정다감(多情多恨 多情多感)
내 어머니도 ‘김정자’고 내 장모님도 ‘김정자’다
내 어머니는 정읍에서 정읍으로 시집간 김정자고
내 장모님은 봉화에서 봉화로 시집간 김정자다
둘 다 산골짝에서 나서 산골짝으로 시집간 김정자다
어버이날을 앞둔 연휴가 아까운 터에
봉화 김정자와 함께 정읍 김정자한테로 갔다
봉화 김정자는 정읍 김정자를 위해
간고등어가 든 도톰한 보자기를 챙겼다
정읍 김정자는 봉화 김정자를 위해
시금시금 무친 장아찌를 아낌없이 내놓았다
정읍 김정자는 봉화 김정자 내외에게
장판과 벽지를 새로 한 방을 내주었으나
봉화 김정자는 정읍 김정자 방으로 건너갔다
혼자 자는 김정자를 위해
혼자 자지 않아도 되는 김정자가
내 장인님을 독숙하게 하고
혼자 자는 김정자 방으로 건너가 나란히 누웠다
두 김정자는 잠들지도 않고 긴 밤을 이어갔다
두 김정자가 도란도란 나누는 얘기 소리는
아내와 내가 딸과 함께 자는 방으로도 건너왔다
죽이 잘 맞는 ‘근당게요’와 ‘그려이껴’는
다정다한한 얘기를 꺼내며 애먼 내 잠을 가져갔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눈을 뜬 이른 아침,
한 김정자는 쌀 씻어 솥단지에 밥 안치고
한 김정자는 화덕불에 산나물을 삶고 있다
카드 키드
카드가 사준 정장을 입고
카드가 사준 구두를 신은 출근길은 벅차다
어쩌다 카드가 사주는 저녁은 근사하고
카드가 큰맘 먹고 들여준 침대는 푹신하다
카드가 현금서비스 해준 축의금을 들고 다녀오는
직장 동료의 결혼식은 처연하게 찬란하다
입사 삼년차 카드 키드,
야근에 지쳐 귀가하는 밤은
카드가 카드론으로 얻어준 원룸이 있어 아늑하다
카드 키드가 되기 위한 지난날은 아름다웠다
스펙에 내준 대학생활은 교양 없이 품위 있었고
자기소개서 속으로 들어간 스펙은 뻔뻔하게 자랑스러웠다
서류전형에서 번번이 떨어지던 입사시험,
처음으로 면접 통보를 받던 날은
팬파이프 같은 빛이 눈앞으로 쏟아져내리는 것 같았다
카드가 사주는 패스트푸드는 먹을 만하고
카드가 지켜주는 직장생활은 아직 견딜 만하다
정기적금을 해약해 카드에게 이체하고 남은 돈,
지방에 사는 양친께 부쳐드리던 손은 대견하다
월급날 받은 급여는 어김없이 카드에게 옮겨간다
‘언제 취직할 거니’를 지나 ‘언제 결혼할 거니’까지
기적적으로 와 있는 카드 키드, 카드는
희망 복근을 키워보는 건 어떠냐며 헬스클럽을 권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