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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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연 河在姸

1975년 서울 출생. 2002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 『라디오 데이즈』 『세계의 모든 해변처럼』이 있음. hahayoun@hanmail.net

 

 

 

스노우맨

 

 

이곳에는 비닐봉지들이 과도하다

많은 것을 할 수 있어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

봉투의 입들

 

나의 팔과 다리는 다족류와 같음에도

 

네 손은 아주 가느다랗게 바스락거렸다

희미하고

 

장악할 수 없으므로

 

나는 황산에 가까워진다

검음에 가까워진다

알리바이로만 가능한 시간들 속에

 

뚫려 있는 것들은

시간의 바닥을 보아버린 동공이고

거기에는 우연하게 많은 것들을 집어넣을 수 있다

 

로스타임 이후의 삶을 나는 살게 되었다

우연이 아닌 것처럼

 

귀가 떨어지고

너의 목소리를 분별할 수 없는 시간만이 남아 있었다

 

재와 타고 남은 것들로 뭉쳐져

햇볕에 녹지 않는 죄가 있다

 

녹지 않는 동그라미 하나가

내 머리 위로 더 큰 동그라미 하나를 그렸다

세계의 안쪽을 구멍 내고 있었다

 

 

 

씨티 오브 쏠트

 

 

#1

산은 염기와 반응하여 소금을 만든다

밤이었으며, 빛으로 얼룩진 거리에서

한개의 주먹이 뺨을 치는 소리가 울려퍼졌습니다.

한개의 소용돌이와 같이

 

힘을 가하는 쪽과 힘을 받는 쪽이 동시에

만들어내는 소리에는 내부가 있습니까?

 

자루에도 내면이

밑바닥에도 끝이

분별이 있습니까?

물음표에 목을 꿰이고

뾰족한 십자가에 찔릴 것만 같은데

 

믿음처럼 텅 비어가는 너와 나의 눈동자를 생각하며

 

#2

소금이나 설탕은 물에 녹는다

 

지구의 쌍둥이별의 거리를 빛으로 환산하는 방식이 마음에 듭니다.

이 모든 빛이 사라지고 나면,

나와 다른 지구 사이의 거리도 소멸할 것입니다.

 

쌍둥이 아기 1.0과 쌍둥이 아기 2.0의 거리가 소멸하고

누가 형이고 누가 언니인지 알 수 없게 되는 순간,

 

조금 늦게 울었다면 어떻겠습니까

몸에 스민 빛이 조금 부족하다면 또 어떻겠습니까

 

#3

우리는 바닷소금이 필요해, 아주 약간의 바닷소금 말이야

 

수영장의 물은 수영을 하기 위해 떠놓은 물입니다.

바다의 물은 파도를 만들어내고,

바다의 물은 원래부터 있던 물입니다.

 

원래,는 언제부터,와 이어지는가

삶 이전에 죽음이 죽음 이후에도 죽음이 있었다는 말은

이상한가 다른 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 모든 것이 녹아드는 시간 속에서

 

나는 안전해지기 위해 수영을 배웠으며

삶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갖기 위해 수영을 합니다.

 

지구가 나를 밀어내고, 파도가 나를 밀어내고, 모든 지평선이 나를 밀어내고,

나를 헤엄치게 하는 물로부터 나는 이토록 멀어지고

나의 힘이 나를 밀어냅니다.

 

#4

난 메스꺼움을 경험하기 위해서 아침마다 소금물을 마신다

 

반짝이는 얼룩들이 이곳을 덮습니다.

현재는 전염병과 같습니다.

붉고 뜨겁고 떼어지지 않는

 

이상한 가속력의 힘으로

떠오르는 시간입니다.

 

두개의 망막을 물들이며

씨티의, 빛이 밝아옵니다.

검고 하얗게 멀어버릴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