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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24인 신작시선
김혜순 金惠順
1955년 경북 울진 출생. 1979년 『문학과지성』으로 등단. 시집 『또 다른 별에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불쌍한 사랑기계』 『한 잔의 붉은 거울』 『당신의 첫』 『슬픔치약 거울크림』 『피어라 돼지』 등이 있음. michaux@hanmail.net
낙랑의 공주
번개가 뇌리를 친다. 턱까지 친다. 왼쪽 발까지 친다. 잠시 쉬었다가 또 친다. 모멸감과 함께 놀라움, 공포. 조금 이따가 또 친다. 계단을 올라가자 오줌 냄새. 이제 끝이다. 여길 나가면 죽자. 그녀는 웃옷을 벗고 눕는다. 간호사가 불붙은 쌍안경 같은 대나무 통을 들고 온다. 그것을 검은 띠로 배 위에 묶는다. 그다음 천장에 매달린 양철통을 끌어내린다. 뚱뚱한 아나콘다가 거대한 양철 입술을 그녀의 벌거벗은 배 위에 벌린다. 나는 옷걸이쯤에서 그녀를 내려다본다. 그녀는 배가 굽히는 고기가 된 형국이다.
더러운 개가 쇠창살 우리에 갇혀 자전거에 실려 가는 것을 본다. 자주 본다.
정신 나간 번개가 아닌가. 그녀가 그녀에게 가하는 심한 모욕인가. 세다. 잠시 조용해지면 불안에 떤다. 다시 모욕당한다. 눈물이 핑 돈다. 의사가 그녀의 고개를 젖힌 다음 콧속에 바늘을 꽂는다. 그다음 고개를 숙이고 피를 받으라 한다. 양철 도시락에 피가 흥건하다. 왼쪽 눈가에 약침을 퍽 꽂는다. 그쪽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전에 다시 침을 퍽 꽂는다. 침을 뽑아드는 순간 그녀가 그쪽이 아니고 이쪽! 하자 아, 이쪽! 하면서 다시 침을 오른쪽 눈가에 꽂는다. 머리에 꽂는다. 그녀는 이제 눈 주위로 빙 둘러 침을 꽂은, 마치 침으로 만든 안경을 쓰고, 침으로 만든 모자를 쓴 다음 눈물 핏물을 질질 흘리며 복부에서 연기를 피워 올리는 고슴도치 바비큐가 되었다. 고문 경관의 손길 아래 놓인 한마리 여자 동물이 되었다. 매일 이곳에 와서 좁은 불판 위에 눕는다.
그 개가 꿈 안팎에 동시에 출몰한다. 어린 시절부터 애완했던 개들이 온다. 번갈아 온다.
몸에 소나기 온다. 머릿속 종유석 동굴에 물 떨어진다. 눈먼 번개다. 길 잃은 번개다. 자살하는 번개다. 벼락과 형제다. 강타하고 죽는 고통의 졸개다. 신의 졸갠가, 이놈의 번개. 방사능 번갠가. 번개가 칠 때마다 기형이다. 손이 세개였다가 머리가 두개로 쪼개진다. 발이 백개인 내가 냅다 달려간다. 몸은 달리지 않는데 나는 전속력으로 달려간다. 몸속의 그들은 달리지 않는데 나는 달려간다. 나는 그들이지만 그들은 내가 아니다. 그들이 나에게서 창문을 닫는다. 그다음 내가 안에서 지독히 맞는다. 그들에게서 나를 뜯어내야겠다. 불판 위의 고기를 향해 내려오는 젓가락들처럼 쇠침들이 고깃덩이 위에 꽂힌다. 난쟁이의 장난감 상자에 개가 웅크린다. 짖는다.
그녀가 교실에 줄 맞춰 앉아 있다.
슬픔을 받기 위해 깨끗이 씻은 얼굴.
불안을 받기 위해 부푼 심장.
공포를 받기 위해 부지런히 오그라든 팔다리.
절망을 받기 위해 잘 빗질된 머리.
유기견 보호소에서 목욕 봉사를 받은 개들이 줄맞춰 앉아 있다.
적막한 병원 대합실에 한 사람이 들어선다. 여자다. 오늘 오후 현재 검사실에 예약을 이행하러 온 환자는 그녀 혼자다. 우리나라 사람 그 어느 누구도 이 병원을 믿지 않는다는데 그녀는 믿기로 한다. 나는 그녀를 멈출 수 없다. 대신, 만약 그녀가 여기서 전염병에 걸린다면 우리나라는 망한 나라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마스크를 쓴 검사실 직원 전부가 그녀를 위해 근무한다. 그녀는 깨끗하게 소독된 침대를 옮겨가며 눕는다. 친절하다. 전기 감응장치들이 머리 주변에 연결된다. 커다란 검사실에는 그녀와 검사원들뿐. 그들은 마스크를 썼고 그녀는 벗었다. 검사원은 다리미판 같은 것으로 얼굴에 전기 충격을 가한다. 여기서도 오늘 환자는 그녀 혼자다. 그녀는 그들의 친절에 감읍한다. 나의 렌즈 속에서 그녀는 오늘 공주다. 공주는 그녀의 시종들에게 에워싸여 복도를 걸어다닌다. 넓고 청결한 세면실에서 공주 혼자 그 많은 수건과 비누와 청결제를 상대한다. 공주는 이 병원 2층을 세내었다. 4개의 수납대도 그녀만을 위해 존재한다. 마스크를 쓴 그들이 공주만을 위해 계산하고 다음 예약일자를 알려준다. 아주 평화롭다. 감염된 응급실은 폐쇄되었지만 그 위층에서 그녀 혼자 방을 옮겨다닌다. 그녀가 얼굴에 전기 바늘을 꽂고 누워 있다. 그녀가 내 손을 괜찮아 괜찮아 어루만진다. 전염병 바이러스들이 방사능처럼 떠다니는 청결한 골목들이 그녀를 위해 텅 비었다. 내가 떠나자 병원 전체가 폐쇄되었다. 공주가 갇혔다.
냄새나는 개가 짖는다.
메아리가 서울의 북산의 뺨을 치고 다시 돌아온다.
돌아올 때마다 다른 개가 온다.
점점 더러워지고 살이 쪄서 부끄러운 개가 온다.
돌아올 때마다 더 큰 소리가 온다.
번개처럼 들개처럼 개 같은 개.
물고 늘어지는 개.
먹지도 자지도 않고 점점 꼬질꼬질 개.
너무 너무 커져서 북산만 해진 개.
북산에 똥개가 똥 싸고 가는 개.
공주여 가죽을 찢으라.
북을 찢으라.
외치는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