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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엄원태 嚴源泰
1955년 대구 출생. 1990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시집 『침엽수림에서』 『소읍에 대한 보고』 『물방울 무덤』 『먼 우레처럼 다시 올 것이다』 등이 있음. candooo@hanmail.net
화류의 나날
1
마음의 하눌타리는
오후 되어서야 슬슬 일어나 꽃을 피운다
밤업소 나가는 치렁치렁한 생머리 박양처럼
꽃잎 머리카락 풀어헤치고 밤일 나가는 거다
줄박가시나방이 그 미색(迷色)의 단골손님이지만
순정 같은 건 원래 없었다
세월만 폭삭 늙어가는, 화류(花柳)의 나날이어서
2
마음이란 게 그렇다
꿀풀처럼 아랫입술 비쭉 내밀어 교태를 부려보지만
꿀벌들 좀체 내려앉아주지 않는다
토끼풀은 시든 꽃 버리지 못한 채 그리움 부풀리고
달개비는 가짜 꽃가루 뭉치로 등에를 유혹해봐도
입맞춤조차 허락받지 못하는, 생각 안해봐도 슬픈 게 그것들이다
달콤한 연애는 꿈에서나 가능했던 것
여생(餘生)이란, 더 팍팍해지기 마련이어서
3
곤충 유혹하기를 포기해버린 꽃들도 많다
버러지 같은 놈들과는 상종 안하기로 다부지게 마음먹고
한성깔 하듯 키 높이고, 꽃가루 몸피를 잔뜩 줄여서는
부는 바람에 하염없이 제 몸 날려보내기만 하는 거다
마음에도 누가 향수를 뿌린다면
꽃가루처럼, 다른 마음에 가 달라붙기를 바라는 것이어서
4
나도물통이라는 키 작은 꽃 아시는지
수술의 장력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터지는 꽃가루 폭죽들을 보셨는지
꽃술들을 혀처럼 밀어냈다가 쏙, 쏙, 집어넣는
도꼬마리의 민첩한 동물적 몸짓을 보셨는지
마음이란, 때로 꽃들에도 과격한 몸짓을 허락한다네
격할 수밖에 없는 게 연애, 필사(必死)의 사랑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