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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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 金炫

1980년 강원 철원 출생. 2009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글로리홀』이 있음. juda777@nate.com

 

 

 

부모님 전 상서

 

 

눈이 하염없이 오는

전형 속에서

두 노인은 손을 잡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뒤에 남겨진 자식들이

먹어야 할 양식을 축내지 않기 위해

 

이것은 과거겠습니까 미래겠습니까

 

남겨진 딸과 그 딸의 아내가

집 안의 모든 빛을 밝힌 가운데

부모들이 걸어갔을 방향을

지도에 표시해보는 겁니다

 

이곳에서

두 아버지는 손을 놓지 않고

 

이곳에서

두 아버지는 숨을 돌린 후에

 

이곳에서

두 아버지는 세대를 생각하며

우리에 관해 이야기하겠지

 

두 노인은 과연 그곳에서 말하기 시작합니다

동굴 속에서 불 밝힌 후에

한 이불 속에서

 

우리가 이룩한 것이 있다면 우리가 무너뜨린 것이 있지

 

너희의 가정 속에 너희의 목적이 있으며

너희의 목적 속에 너희의 미래가 있음을

 

과연 그 미래에 남겨진 딸과 그 딸의 아내가 말을 하는 겁니다

 

옷을 단단히 입고

빛과 지도를 챙긴 후에

헤치고 나가보는 거지

저 전형을

두 노인은 누워서

동굴 위로 어른거리는 그림자로 부모를 떠올려봅니다

 

메밀꽃 필 무렵

야시장에 다녀오는 길에 소고기 한근을 가슴에 안고

아버지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저만치 가는 어머니를 할멈, 할멈 하고 부르더군

아버지, 어머니가 보여요

내가 물으니

아버지가 묻더군

너는, 어머니가 보이니

 

네, 저는 어머니가 보여요

그럼, 나도 보이는 거겠지

 

처음이었고

메밀밭을 지나며 속으로 어머니, 어머니 불러보았지

 

한번은 한밤중에

어머니가

잠든 나와 형을 깨워서는

달이 떴으니 메밀밭으로 가자 말씀하시는 거야

 

말씀이 있으니 말씀을 따르되

어머니

우리는 무얼 해야 하나요 묻자

어머니가

거기에 불을 붙이면 된다

나와 형은 거기에 불을 불이고

메밀꽃이 지천인 곳에 가만히 서 있었지

어머니가 우리의 불을

그곳에 넣고 하늘로 날려 보내는데

거기에 넣은 우리의 불이

저렇게 가볍고 높을 수 있다니

나와 형이 감탄하는 가운데

어머니가 아버지의 지복을 빌자

형이 먼저 조용히 집으로 향하고

그다음은 내가

영영 어머니를 남겨두고 다리를 건너며

형이 말했지

 

아버지에게는 말하지 마

형, 저길 봐 우리의 것이 아직도 올라가고 있어

 

두 노인은 자신들의 부모 이야기를 마치고

평화롭게 서로의 몸을 부여잡고

눈물보다 먼저 다가온 것을 흘린 후에

오늘따라 팔다리가 앙상해

대재앙은

춥고 어두우니까

 

여기 발자국이 있어요

저기, 저 산

호랑이가 나올까요

호랑이는 밤에 움직이지 않아

귀신이 나올까요

귀신은 사람 앞에 나타나지 않아

그곳은 어딜까요

우리에게 방향이 있으니까

그곳은 암흑천지겠죠

우리에게 불빛이 있으니까

여보, 우리에게도 자식이 있었다면……

 

두 노인이 잠들기 전에

두 여인이 산을 오르고

산 아래 가축들이

하나둘 불에 타고

검은 연기가 흰 것들을 뚫고 오릅니다

 

끝도 없이 죄를 짓고

아직

 

잠에서 깨어나는 이는 아무도 없으나

작은 재앙의 해가 떠오르고

 

그 동굴에는

산 사람도

죽은 사람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