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시
주하림 朱夏林
2009년 창비신인시인상으로 등단. 시집 『비버리힐스의 포르노 배우와 유령들』이 있음. wngkfla@daum.net
덴마크 입국소에서
언니는 미술학교에서 정신병자로 불렸습니다
아침 광장에 나가 청소부들을 그렸고 어깨에 앉은 새들의 말을 들어주었죠 새들의 머리에 키스할 수 없게 되더라도…… 너무 슬퍼하지 말자
그녀는 명령을 기다렸어요 죽은 자의 얼굴을 열심히 색칠하고 덧칠하고 또 덧칠하다
그 얼굴을 영원히 갖기 위해 덧칠을 긁어낼 것이다
가끔 헤어진 그에게 망령을 보내요 잠든 얼굴을 열심히 색칠해서 그의 영혼이 그를 못 찾게 하려고
망상이란 이해할 수 없고 사실이 아니며 주위의 어떤 말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라는 것을 알지만
모래가 흐른다
유리 벽면을 타고 모래가 흐르는데
그녀는 가방에 깨진 모래시계를 들고 다녔어요 회상치료라고 했어요 지금 가까이 오면 네 그림자는 불타게 될 거야 회상에 관한…… 나에게 좋은 일들이라고…… 원하는 일이 되지 않더라도 너무 슬퍼하지 마
그곳에는 눈 내리지 않는 계절이 없어요
모두 언니에게 들었습니다 언니는 수업 중에 파란색 물감을 빨다 선생님에게 크게 혼나고 화가의 꿈을 포기했다고 들었지만 언니가 그 황홀을 포기할 리 없죠 예술은 심장의 천공 같은 것이니까요
언니는 소개받는 자리에 억지로 끌려온 표정으로
그 미술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정신병자라고 불렸대요
우리는 추운 공항에서 태어났습니다
나는 다리 아래서 인형극을 하며 돈을 벌었죠
인형 옷을 갈아입히고 바닥에 쏟아지는 은화를 주우며
오래전부터 이민을 꿈꿔왔습니다
언니와 내게는 아주 슬픈 기억이 있어요
그것을 열면 썩어가는 문, 그것을 열면 손도끼가 박혀 있는 문
집은 늘 가라앉은 먼지처럼 고요했고
기억은 언제든 이야기로 만들 수 있죠 어떤 시점으로부터……
기술이 필요하다고 들었습니다 인형을 조금 움직이게 할 수 있고
받아놓은 욕조물이 넘치는 동안 핏빛 악몽은 언니의 젖은 알몸을 에워싸죠
뿌연 수증기로 가득 찬 욕실과 형광등 불빛 그녀가 놔주어야 할 것들이 백야로 펼쳐지고 욕실 타일 검은 틈을 바라보며 꿈틀거리는 눈꺼풀
언니는 상트페테르부르크나 오슬로 출생이라 믿고 있어요
한편을 갈기갈기 찢어놓은 영화의 주인공처럼
학교에 다니고 위생적인 분위기에서 대화를 이어갈 수 있다고 말예요
여행가방 위로 쌓인 옷가지
호텔 로비에서 밤새 빨간 물감 튜브를 물고 서성이는 그림자
벽면을 타고 흐르는 깨진 모래시계의 시간
문에 꽂힌 손도끼를 지나 오슬로의 밤 오슬로의 안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