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리뷰
‘창비’를 다시 만나다
문병훈 文炳勳
한림대 교양기초교육대학 강사(영문학). 역서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공역) 등이 있음. liarsmoon@hallym.ac.kr
수년 만의 재회다. 계기는 매달 어떤 책의 저자나 책과 관련한 강사를 초청하는 모임 ‘책읽는춘천’에서 『창작과비평』을 읽는 소모임을 꾸리면서다. 꼬박꼬박 큰 모임에 나가는 처지는 아니었지만 이런저런 인연이 있어 소모임의 일원이 되었다. “많은 밤을 보낸 뒤에”(황정은 「웃는 남자」, 2016년 겨울호 수록작) 한때는 가까웠지만 이제는 흐릿해진 친구를 만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창작과비평』 겨울호를 만났다. 책의 묵직함은 그대로인데 얼굴은 말끔해진 느낌이다. 목차를 살피고는 선뜻 특집에 속한 최원식의 글을 먼저 읽었다. 그나마 내 빈약한 독서 목록에 들었던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다루고 있어서였는데, “악몽을 오독한 바람에 채식으로 들어섰다가 급기야 나무가 되겠다는 일념에 단식으로 거의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서사한 이 중편연작집은 변신담을 빌린 점진적 자살담”이라는 요약은 한순간 아찔하리만큼 간명했다. 작품의 “초점은 가부장적 폭력에 대한 거부라기보다는 지독하게 평범한 산문적 일상에 대한 거절”이라는 풀이는 내 독서체험을 환하게 밝혀주었다. 흔쾌한 마음으로 한강의 다른 작품『소년이 온다』를 책상에 올려놓았다.
겨울호에서는 또한, 창비 50주년과 관련된 기획이었을 책 앞머리의 두 인터뷰가 흥미로웠다. “우리의 일상성을 규정하는 사물의 존재양식”에 관심을 두고 “인식, 관념, 표상보다는 인공환경의 물질문화에서” 출발한다는 박해천의 ‘디자인 연구’는 겨울호 소설들을 읽는 내내 하나의 길잡이 역할 또한 해주었는데, 이를테면 딱히 하나의 입체적인 그림으로 완성하지는 못하지만 황정은의 「웃는 남자」의 배경이 되는 다세대주택, 고시원, 세운상가 등의 인공물의 생태계가 등장인물들의 내면의 움직임과 어떤 식으로 상호작용하는가와 같은 문제를 곰곰 생각해보는 경험은 나름 새로웠다. 그런 영향관계를 잘 묘사한 작가로 인터뷰에서 박완서가 거론되기도 하지만 이 작품에 등장하는 세운상가의 역사를 처음부터 함께해온 여소녀라는 인상적인 인물은, 작가의 이전 작품 『百의 그림자』에 나오는, 전구가 든 상자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벽을 등지고 침침한 알전구 불빛 속에 앉아 있는 전구가게 오무사의 할아버지와 함께 이러한 관점에 오롯이 부합하는 바가 있는 것 같다. 그런가 하면 두번째 인터뷰에서 “나이 든 세대는 자신들의 논리를 따르는 청년들 위주로 끌어준다”는 조한혜정 선생의 지적은 내게도 따가운 의심을 던져주었고 더 나아가 그렇기 때문에 나 역시 그런 앞선 세대의 논리에 순응하는 후배는 아닌가 하는 회의에도 이르게 했다.
머리 한구석에 찜찜하게 남아 가시지 않던 이 우울을 잠시 잊게 한 ‘창의적 공유지’가 되어준 글은 가장 나중에 읽게 된 이향규의 북한 이주민 이야기였다. 창피하게도 처음 나는 글 첫머리 필자가 쓴 네 단락을 북한 이주민의 글로 착각하며 읽었다. 천성에 다름 아닐 어리석음을 ‘넘어서지도’ 못하는데다 「‘탈북자’를 넘어서」라는 제목에서 그저 ‘탈북자’라는 이름표만으로 태연히 편견의 렌즈를 걸친 꼴이었다. 해서 한국사회 속에서 “다른 사람의 시선에 맞추며 다수에 속해 있다는 안도감을 느끼는 동안 정작 ‘나’는 위축되어 있었다”라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했고, 이주민이 되어서야 비로소 북한 이주민과 “대등하게” “상호의존적인” 상황에서 만나게 되었다는 고백에는 가슴이 찡하기도 했다. 마지막 문장을 읽고 눈을 들었을 때 책을 읽고 있던 작은 동네 도서관이 자못 환해진 듯 느껴지기도 했다. 이 글이 연속기획 ‘소수자의 눈으로 한국사회를 본다’의 일환이라기에 이전 글들도 찾아 읽어보고 싶어졌다.
관심이 아예 없지는 않지만 막상 천착하기는 힘든 영역을 일별할 기회는 반가웠다. ‘논단’에 실린 두 글, 우리에겐 언제나 긴요할 수밖에 없는 한반도 군사 위기의 배경을 짚어주고 그 해법으로 가는 수단으로 최소한의 상호위협 감소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취지의 「한반도 군사위기의 구조와 출구」(이승환)와, 문화적 행위에 필수적인 기존 자료를 전유하는 행위와 현대 저작권법 간의 마찰을 역사적·기술적 측면에서 진단한 「저작권법 시대의 예술작품」(스벤 뤼티켄)은 다음 공부의 징검다리가 되어줄 것 같다.
시간을 두고 나름 꼼꼼히 읽어갔다고 생각하지만 글의 끝머리를 읽고 나면 종잡을 수 없거나 다시 돌아가 읽어야 되나 망연해지는 순간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첫 술의 크기보다는 꾸준함을 갖고 싶다. 해서 재회의 소감은 여기까지다.
이따금 조깅을 다시 시작하곤 했는데 새해에도 마찬가지가 되었다. 많은 일들이 그렇듯 간만에 다시 시작하면 잊었던 습관을 되찾거나 아님 처음부터 그에 익숙해져가는 과정이 새로이 필요하다. 조깅이라면 손의 움직임, 보폭, 운동량을 두고 어색한 초기 상태에서 얼마간 게으름을 이겨내야 하는 것이다. 필요한 과정을 이겨내고 올해는 꾸준함에 도달하겠다고 다짐해본다. ‘창비’, 다시 보니 반갑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