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이제니

1972년 부산 출생. 200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등이 있음. mydogandme@naver.com

 

 

 

가장 나중의 목소리

 

 

부른다. 목소리. 점자를 읽어 내려가는 소녀의 손가락. 소녀는 늙어가고 점자는 흐려진다. 손가락. 닳아가는 손가락. 손가락은 듣는다. 얼룩과 눈물. 숨결과 속삭임. 선과 선을 그리는. 원과 원을 따라가는. 간격과 간격 사이에서. 흔적과 흔적 너머에서. 연기. 피어오르는. 희미한 몸짓. 들려온다. 목소리. 닳아가는 것. 너는 양의 가죽으로 만든 구두를 신고 이국의 거리를 걷고 있는 너를 본다. 공기. 푸르고 투명한. 아니다. 잿빛. 어둡고 투박한. 목소리. 흐른다. 시간이 세월이 되기 위해 흘렀던 눈물이 있었고. 음률. 느리고 낮은. 읊조리는. 목소리. 흐르면서 사라지는. 가슴을 치는. 목소리. 부른다. 이름을. 부른다. 목소리. 점자를 읽어 내려가는. 손가락. 모퉁이를 돌면 나타나는 그림자. 이국의 거리에는 이국의 얼룩이 맺혀 있고. 너는 영원을 보는 얼굴로 거리를 걷고 있는 너를 본다. 양의 가죽으로 만든. 구두는 닳아간다. 밤과 낮이 이어진다. 소녀와 노파가 스쳐 지나간다. 말과 말이 겹쳐 흐른다. 목소리. 들려온다. 푸른색이다. 다시 밝아지기 직전이다. 세계는 침묵 속에 잠겨 있다. 너는 성모마리아 상을 올려다본다. 얼굴은 희고 맑았다. 아니다.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소리 없는 소리로 얼굴은 바닥을 내려다본다. 다다른 곳은 모퉁이의 어두움. 양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막다른 언덕이다. 부른다. 목소리. 점자를 읽어 내려가는 노파의 손가락. 읊조림. 느리고 낮은. 노파는 소녀의 목소리를 덧입고. 양의 가죽으로 만든 구두를 덧신고. 이국의 거리를 걷고 있는 잔상이 있다. 미래를 두드리면서 과거를 만지는 슬픔이 있다. 모퉁이를 돌면 사라지는 그림자. 벽과 벽 사이. 눈꺼풀과 눈꺼풀 사이. 막다른 음률. 흐르는 걸음. 닳아가는 것. 너는 영원을 보고 있고 나는 영원을 보고 있는 너의 얼굴을 보고 있다. 시간과 시간이 겹으로 흐르고. 페이지를 넘기면 오래전 그어놓은 밑줄이 있다. 부른다. 목소리. 양의 가죽으로 만든. 이국의 구두 위에 내려앉은 이국의 구름. 탁자 위에는 먼지를 뒤집어쓴 오래된 응답이 놓여 있다. 아니다. 흐려지는 움직임. 목소리. 안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눈물은 막다른 곳으로 흐른다. 점자를 읽어 내려가는 손가락. 오래전 걸었던 이름 모를 광장이 나타나고. 푸른색. 다시 밝아지기 직전이다. 너는 새벽의 푸른빛에 얼굴을 씻고 있는 너를 본다. 죽음 이후의 눈꺼풀 속에는 흰빛이 있다. 투명하고 빈 공간이 있는 서늘함. 떠나왔던 장소 위로 떠나왔던 얼굴이 겹쳐 흐르고. 사람이 아닌 얼굴이었다. 세상이 아닌 그늘이었다. 아름다웠다. 환하고 어두웠다. 잊었던 빛이 되돌아오고. 네 속으로부터 솟아나는. 목소리. 몸으로부터 떠나온. 소녀와 노파는 양의 가죽으로 만든 구두를 신고. 영원을 보는 얼굴로 거리를 걷는다. 부른다. 목소리. 되돌아오는 목소리. 잊히지 않는 음운으로 도착하는. 목소리. 감은 눈 속에서 번지며 들려오는. 목소리. 가장 나중의 목소리.

 

 

 

나무는 잠든다

 

 

나는 네가 더이상 그곳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나는 네가 나무 속에서 잠자고 있다는 것을 안다. 두 손 들고 하늘 향해 잠자는 나무. 나는 나무 속에 잠긴 채 감겨 있는 너의 눈을 본다. 두 발은 흙 속에 잠겨 있다. 잠겨 있는 것은 목소리가 아니다. 담겨 있는 곳은 나무가 아니다. 너는 나무 속에 묻힌 채 점점이 자라나는 나무의 눈을 바라본다. 나무의 눈을 바라보면서 점점이 나무의 눈이 된다. 나무의 눈은 바라본다. 나무의 눈은 안아준다. 나무의 바깥에서는 비가 내린다. 비는 몹시도 비처럼 내린다. 정지된 것 위로 무언가 흐를 수 있다는 듯이. 흐르는 것 위로 무언가 정지될 수 있다는 듯이. 나무의 눈은 바깥을 바라본다. 바깥을 바라본다는 것은 이미 안을 들여다본 적이 있다는 것. 이미 안을 들여다본 적이 있다는 것은 다시 한번 더 안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 비는 바깥에서 두 손을 늘어뜨린다. 늘어뜨린 손 아래로 그림자의 바닥이 생긴다. 그림자의 바닥이 안과 밖을 데려온다. 안을 들여다보면 너는 더이상 그곳에 잠들어 있지 않다. 더이상 그곳에 있지 않다는 것. 더이상 그곳에 놓여 있지 않다는 것. 더이상 그곳에서 말하지 않는다는 것. 더이상 그곳에서 노래하지 않는다는 것. 더이상 그곳에서 웃지 않는다는 것. 더이상 그곳에서 울지 않는다는 것. 그곳에 있지 않다고 말하면 그것을 잊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을 잊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하면 그것은 다시 다가올 것인가. 나무의 바깥은 나무의 여백으로 가득하다. 나무는 나무로 흐르면서 잠들어 있는 너를 옮긴다. 멀어진다 말하지 않으면서 멀어지는 나무들처럼. 나무는 잠든다. 너는 흐른다. 나는 안아준다. 부르지 않아도 문득 다가오는 나무들처럼. 나는 네가 더이상 그곳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나는 네가 나무 속에 잠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