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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민구 閔九
1983년 인천 출생. 200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배가 산으로 간다』가 있음. azino@naver.com
우나기
죽은 동생이 말했다
나 엄마 배 속에 있어
너에게 무슨 말을 할까
눈을 뜨면 눈썹에 낚이는 물고기들
나는 심장을 뛰게 할
단 하나의 이름을 고민한다
우리가 태어나 사라지는 것이
당신의 뜻이 아니라면
강물을 휘젓는 음산한 바람이
신의 헛기침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빼앗지 않고 아무런 기대에 응하지 않고
네가 아니면 나여도 좋을 이름을 다오
기도하던 두 손을 펴고 손바닥에 적힌 이름을 떠내려 보낸다
그것은 삽시간에 번지거나
까맣게 익어서 떠오른다
오늘 아침, 빛의 지느러미는
바다에서 강으로 오고
다시 강에서 바다로 흘러간다
작은 파도를 따라가는 커다란 파도
나는 잠에서 깨지 않은 어둠을 발로 툭툭 차며
침수식물이 가득한 늪에서
힘겹게 걸어 나오는 소년을 본다
버섯이 들려주던 우산의 시
버섯을 먹고 잠이 들었다
그날 밤 우산을 쓴 채
빗속을 걸었다
날이 저물어 모든 상점의 불이 꺼지고
약속이나 한 것처럼 어둠이 내려앉아
안개가 지나가는 소리조차 시끄럽게 들렸다
누군가 미행하는 걸 느꼈지만
비끼리 밟는 것 외에 기척이라고는 없었다
나는 포장도로 끝의
불빛이 보이는 곳으로 직진했다
몇걸음 갔을 때 우산살에 고인 빗방울이 콧잔등에 떨어졌다
그리고 가시에 찔린 것처럼 오래전에 이미
자리를 접은 공간이 펼쳐졌다
그곳은 학교였다 거기에는 글을 가르쳐주는 교사도 없고
평범한 사물이 들려주는 인생이나 가르침 따위도 없었다
그저 얼룩덜룩한 무늬의 축구공이 한산한 목장에 노니는 젖소처럼
운동장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나는 공을 뻥 차버렸다 공은 물웅덩이에 빠져 멀리 못 갔고
갈라진 공에서 쏟아져나온 아이들이
내 얼굴로 씨익 웃었다
학교를 지나 불빛이 새어나오는 집 앞에 도착했다
그림자는 두어걸음 물러나서 나무에 기댔다
나는 우산을 펴서 그림자에게 주고
밤의 한기를 느끼며 잠에서 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