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시
조혜은 曺慧珢
1982년 서울 출생. 2008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구두코』 『신부 수첩』 등이 있음. hem0302@hanmail.net
봄비
심정이라는 것이 삭아 내리는 것 같았다.
당신의 집을 떠나
빌리지도 못한 방 한칸에 숨을 때,
아이는 내게 인어공주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지.
창문이 찍어낸 네모난 달빛이 천장에 숨은 걸 알려주면,
안 자면 문어 마녀가 잡으러 와?
아이는 장난처럼 겁을 냈지.
장롱 옆으로 난 작은 틈새로 동생이 기어 들어가면,
아이는 조바심을 냈지.
양손을 내어준 엄마가
오늘 밤엔 이불을 밟고 천장에 새겨진 창문으로 나가자고 하면,
인어공주는 왜 말을 못했어?
기다란 속눈썹으로,
눈을 찔러 언젠가 시력을 앗아갈 거라던,
운명인지 예언인지 모를 현실의 말들을 넘어
깜빡깜빡 묻곤 했지.
그런 밤, 베란다에서도 거실에서도 어느 방에서도
은밀한 학대는 이루어졌다.
집에 가기 싫어.
빼앗긴 목소리가 아름답게 울리던 밤.
아이는 늦게 눈 감고 아기는 늦게 눈뜨던.
공간은 두렵고 사람들은 늘 우리 때문에 화가 나 있었지.
눈뜨면 내 앞에서 진심을 말하는 당신.
이곳도 저것도 모두 진심이었지.
나는 표정 잃은 얼굴로 당신의 진심에 무관심했고.
그렇고 그런 말들을 심장에 푹푹 퍼 넣으며 맞는 아침.
심정이라는 것이 삭아 내리는 것 같았지.
그네
어미는 동굴을 닮은 미끄럼틀 속에서 눈동자를 뚫고 나오는 눈물처럼, 아이를 안고 미끄러져 나왔다. 놀이터는 위험천만해서 잘 걷지 못하는 아이들은 너처럼, 혹은 나처럼 보호받았다. 나비 같은 리본을 짧은 머리 위에 얹은 사내아이가 어미의 시선을 얹은 양팔을 한껏 벌리고 모래놀이터 옆을 빙 돌 때, 네가 탄 그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더 높이 더 잘 보기 위해 마르고 커다란 아이인 너는 청바지를 벗고 하늘 높이 발을 찼다. 어휴 부끄러워. 너를 향해 비눗방울을 닮은 투명한 목소리가 날아가도, 마르고 커다란 아이인 너는 그저 그네를 탔다. 미끄럼틀 좀 타. 목에 건 명찰을 바로잡고 투명한 목소리가 부탁해도, 너는 그저 그네를 탔다. 집에서는 볼 수 있는 하늘이 한조각도 없는 것처럼, 징그럽게 커다란 아이인 너는 더 높이 그네를 탔다. 아아 아 소리를 질렀다. 나는 너처럼 위험하게 그네를 타는 커다란 아이를 본 적이 없다. 너는 어떤 위험도 장애 앞에서는 아무런 위협이 아닌 것처럼, 장애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혼자서 그네를 탔다. 아아 아아. 너는 위험천만한 놀이터에서 어미도 없이 그네를 타는 유일한 아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