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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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현지 南弦志

1977년 출생. 2021년 창비신인시인상으로 등단.

namnamsss@naver.com

 

 

 

하나의 문만 열린다면

 

 

네가 운이 참 나빴다고

누가 통화를 하면서 지나갔다

 

우리는 장례식장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유리문 앞에서

이 형식을 안다고 생각한다

검은 옷을 입고 향을 피우고 절을 하고

그다음은

 

걔가 얼마나 착했는지

모른다 어떤 삶을 살았는지

사실 다들 잘 모른다

하지만 저 문을 열고 들어가서

우리가 같은 영혼을 가졌다고

지금부터 믿어버릴 것이다

그 영혼의 고통을 모를 리가 없다고

며칠 내내 눈앞에서

숲이 불타고 있는 것처럼

말해버릴 것이다

 

밖으로 나온 아이들이 끝말잇기를 한다

사람 이름은 안 된다

나라도 안 된다

 

들어가자

더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

 

 

마트에서 시작할 수 있다

이렇게 많은 약속이 남아 있다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요가매트를 찾으며

더 건강하게 튀긴 이 감자칩과

저 감자칩 사이

최저가와 할인가 사이에서

엄청나게 수다스러운 멀티버스의 시간이 지나갔다

 

그 모든 시간이

나의 선택이었다고

쓸쓸한 얼굴로 일기를 쓰고 있을 때도

휠체어에 앉아 피켓을 들고 있는 우주에서도

매일 아침 기도문을 외우는 내게도

마트와 감자칩이 있었고

 

어떤 세계에서는

문자가 비위생적인 것이 되어서

물건에 표기가 금지되었다

문자 없는 거리를 만들었다는

신도시를 바라보며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감자칩을 뜯었고

 

수백번에 한번은 투자에 성공했다

자신의 힘으로 노후를 준비하고

균형 잡힌 생활을 좋아했다

내가 바란다고

감자칩도 몇개만 먹을 수 있다면

괜찮은 간식이라고

 

그 무수한 우주에 계속해서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며

 

마트에서 시작할 수 있다

그렇게 쓰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