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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유계영 庾桂瑛
1985년 인천 출생. 201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온갖 것들의 낮』이 있음. ygy815@hanmail.net
진술서
둘러앉았다 빛의 말뚝에 묶인 흑염소처럼
그 시각 공터는 피둥피둥 굴러가고 있었겠지만
과도를 든 태양이 자신의 허리를 돌려 깎는 중이었겠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몰랐다
주머니 속의 푸른 자두가 붉은 과즙을 흘릴 때까지
어둡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몰라서
누군가 웃었던 것 같은데
큰곰자리와 작은곰자리를 이어
죽음을 푹푹 퍼 올린 것 같은데
둘 셋 넷 혹은
다섯부터 열까지도 사랑하는 게
우리의 내력이니까
단 하나의 비스킷에 모여든 불개미들처럼
단 하나의 공포밖에 몰랐으니까
둘러앉았다
존중할 수 없는 것들을 존중하면서
충분히 곤란해하면서
표범의 송곳니처럼 성큼 다가오는 웃음도 섞였던 것 같다
흐흐흐
우는소리로 웃지 말라고
좀
우리 중 하나가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어디든 나가볼까
우리 중 하나 죽어나갈지 모르겠지만
태양은 자신의 허리를 길게 길게 돌려 깎는 중이겠지만
공터의 빛은 끊어질 리 없겠지만
화병에 꽂힌 해바라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우리 중 하나 코를 박고 킁킁 냄새 맡았던 것 같다
빛의 기둥에 묶인 순한 염소들
이거 아직 살아 있을까
다 듣고 있을까
냄새가 피어올랐다
자유로
토지는 둥급니까 각졌습니까 흙입니까 아스팔트입니까 무엇이면 어떻습니까 땅바닥에 꽃다발이 놓여 있으면 슬픈 것입니까 짐작합니까 상상합니까 두리번거립니까 어린애 손등에 판박이 스티커가 갈라져 있는 것을 본다면 어떻습니까 하트가 십육등분되어 있을 때 다행입니까 꽃돼지가 삼십등분되어 있을 때 맛있습니까 어차피 슬픈 것입니까 모르는 사람이 보낸 퀵서비스처럼 온종일 그것만을 생각합니까 꿈의 절취선을 오리러 온 오토바이에는 누가 타고 있었습니까
여고생의 책상 위로 얼떨결에 불려나온 유령의 맨발은
사인(死因)을 기억합니까 낮밤으로 황천에 발 씻고
흰 이불을 이마까지 끌어다 덮듯이
다시 죽습니까 잠꼬대하듯이 이승을
중얼거릴 때 있습니까
그곳에도 일요일 오전부터 결혼하는 망자들이 있습니까 검은 예복을 갖춘 자들이 스무명 이상 모이는 자리마다 빽빽거리는 어린애 두세명쯤 오고 그럽니까 흔들리는 이빨에 명주실을 매달고 뛰어다닙니까 흰 선분들은 아름답게 엉킵니까
이렇게 긴 오늘은 처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