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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진수미 陳秀美
1970년 경남 진해 출생. 1997년 문학동네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달의 코르크마개가 열릴 때까지』 『밤의 분명한 사실들』 등이 있음. shistory@hanmail.net
당신 행성의 위치
하얗게 바람이 숲에서 흘러나왔다. 얼굴을 아래에서 위로 쓸어 올린 후 허공을 동그랗게 말며 사라져갔다. 숲의 입구 18㎞라 적힌 지점을 통과하면서 댄이 외쳤다. 이봐 스즈키, 이곳은 움직이는 가구들로 가득하군. 바람을 따라 잎사귀들이 한 방향으로 스스스 쏠리고 있었다. 앞서 가던 스즈키가 고글을 고쳐 쓰며 말했다. 댄, 이것들을 가구라 부르지 않아, 그건 옳지 않아. 누가? 댄이 마른 나뭇가지를 밟았다. 단호한 부서짐. 목소리. 댄의 그것도 바스러지는 듯했다. 누구라니? 스즈키가 소리를 좇아 돌아보았다. 댄이 지워지고 있었다. 흐릿해진 형상을 숲이 빨아들이고 있었다. 스즈키는 고글을 정수리 위로 올렸다. 양미간을 좁히며 사라지는 친구의 조각조각을 응시했다. 이것을 가구라 부르지 않는 존재. 그들은 살아 있나? 댄이 부재하는 자리를 회갈색 가지와 몸체가 얼룩덜룩 채우다가 떡갈나무 한그루가 선명하게 보일 때까지 스즈키는 꼼짝하지 않았다. 옹이에서 목질로 된 노란색 뻐꾸기가 튀어나와 뻐꾹, 하고 울었다. 12시군. 스즈키가 고글을 내려쓰고 돌아섰다.
12시에 당신, 살아는 있나?
댄의 목소리였다.
스즈키가 숨죽여 웃었다. 나무들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방향으로 흔들렸다,
되돌아오고 있었다.
공포분자*
소설 속 의사는 검은 양복을 입었다. 아내는 멍하니 앉아 있다. 소설을 쓰느라 인생을 허비해서야 되겠어? 문이 닫힌다. 의사의 젊은 아내는 소설가다. 남편이 떠난 서재에서 글을 쓴다. 검은 잉크는 사진을 현상하는 데도 쓰인다. 시곗바늘 소리는 어쩐지 카메라 셔터음을 닮았다. 총격지에서 가출소녀는 홀로 탈출했다. 다리를 다쳤다. 성난 엄마가 집으로 끌고 온다. 갇혔다. 시간을 죽여야 한다. 장난전화를 건다. 검은 잉크는 구식 다이얼 전화기를 재현하는 데도 쓰인다. 전화벨 소리는 어쩐지 시곗바늘 소리를 닮아간다. 소설 속 소설가는 붕대를 감은 소녀가 꾸며낸 소설의 충실한 독자다. 소녀는 시계가 있어도 시간이 궁금하다. 죽여야 한다. 다이얼을 돌린다. 현재 시각은 11시 31분 19초입니다. 20초입니다. 23초입니다. 세계는 소리 소문 없이 이동한다. 의사는 자신의 세계를 확신하는 자의 표정을 지녔다. 비굴함과 음울함과 피로가 뒤섞인 얼굴이다. 남편이 없는 서재에서 아내는 글을 쓴다. 다이얼 돌리는 소녀에 대해 생각하다 담배를 입에 문다. 남편의 기척이 들리면 재빨리 연기와 재를 서랍에 밀어 넣는다. 서랍 닫는 소리는 어쩐지 카메라 음을 닮아간다. 사진사는 흐르지 않는 방을 원한다. 밤이 가득한 방을 원한다. 서랍 속에서 소설가가 중얼거린다. 이곳은 어쩐지 암실 같아. 허비할 뭣도 없네. 거리의 총격전은 그녀와 무관하다. 하지만 서랍 닫히는 소리는 총소리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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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恐怖份子」(1986, 에드워드 양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