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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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연희 韓姸熙

1979년 경기 광명 출생. 2016년 창비신인시인상으로 등단. hanyama@hanmail.net

 

 

 

 

언니는 핑퐁

 

 

언니는 날아다닌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핑퐁 떨어진다. 언니를 세게 후려치자 웃으며 되돌아온다. 핑, 퐁, 언니야. 핑, 퐁, 하루가 간다. 콧물처럼 끈질긴 언니가 좋아서. 나는 뺨을 때린다. 불행이란 탁구공만한 거야. 고작 고만한 것으로 머리 위를 통통 튀지 마.

 

씨발, 똥구녕이나 핥아. 언니가 나를 갈긴다. 나는 골목에서 지붕으로, 전봇대에서 하수구로, 핑퐁 핑퐁 내던져졌다 굴러온다. 부어오르는 불행을 잊고 싶어서. 김빠진 맥주 같은 아빠가 티브이를 부수고, 애인은 시도 때도 없이 자위를 하고, 이런 불행들이 건들거리며 자꾸 손을 잡아서. 나는 언니를 힘껏 내리친다.

 

비둘기들이 흘끔거리며 모여든다. 현관을 불태우고 야산을 불태운 언니가. 보름달을 불태운 언니가. 내가 더 불행하다고 악을 쓰는 언니가. 나를 벽에 튕긴다. 손가락질 받으면 손가락을 먹고 발길질을 당하면 발가락을 먹는다. 불행은 팔다리가 없다. 우리는 한데 뭉쳐져 퐁퐁 튀어오른다. 비둘기들이 신나게 불행을 주워 먹는다.

 

핑 하고 솟구쳤다 퐁 하고 우울해하는 놀이. 언니야, 내일이 내일 모르게 지나갈 거야. 떠돌이 행성을 블랙홀이 끌어당기고 있다. 챙챙 서로 부딪치면서 유쾌해진다. 불행이 애드벌룬처럼 부풀어 저만치 앞서간다. 맨홀의 아가리로 들어서면서. 아침이 느릿느릿 기어가는 걸 보면서. 우리는 잘못 친 탁구공보다 멀리 튕겨 나간다. 지구 밖으로 핑퐁.

 

 

 

끼릴이라 불린 것들

 

 

새벽빛이 멈춰 선다. 제일 먼저 만난 그 빛을 끼릴이라 불러줘야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게 마음에 든다. 아무것도 없는 것을 꽉 쥐자 달아오른다. 어제까지 나는 죽은 여름. 오늘부터 나는 새로운 끼릴. 깡통이 내리막을 돌돌돌 굴러간다.

 

깡통 속에서 끼릴이 노래를 불러. 나의 친구. 나의 짐승. 지옥 같은 여름을 만들자. 아무 데서나 수박과 토마토. 밟으면 으깨지는 것을 끼릴이라 여기자. 밭을 파헤치며 강으로 간다. 깡통과 목숨과 애정 이런 걸 한데 모아 던져볼 거야.

 

그래 이건 끼릴이고, 저건 울음이 아니고. 끼릴은 친구이고, 어쩌다 친구가 아니고. 이건 돌멩이, 이건 발톱, 이건 죽음, 저건 물뱀일까. 위로해줄 이 없다는 건 슬프고 웃기는 일. 그러니 마구 흙을 파헤치자. 오래된 구덩이를 발견한다.

 

끼릴을 좋아해, 아니 싫어해. 잔잔한 강물이 술렁인다. 삐뚤빼뚤 둑 위를 걷는다. 어느 것도 끼릴이 아닌데 끼릴이라 우기면서. 끼릴이 내게 준 거라 여기면서. 강물에 풀쩍 뛰어내린다. 끼릴은 사실 들꽃인지 쓰레기인지 모를, 내 손에 든 뭉치가 악마일지 친구일지 모를, 혼란 속에 우리는 빠져든다.

 

오직 나만이 알아챌 수 있는 거다. 깡통 속에서 끼릴이 읊조리는 소리를 듣는다. 이리 와봐, 이리 와서 너도 한번 죽어봐. 강바닥에서 손짓하는 물풀이 끼릴이어서 좋고. 하나, 둘, 셋, 울음을 세는 저어새가 끼릴이라서 좋고. 아무리 둘러봐도 나 혼자뿐이라서 좋다. 끼릴아 끼릴아 부르자 물거품이 마구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