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하종오 河鍾五

1954년 경북 의성 출생. 197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남북주민보고서』 『신강화학파』 『국경 없는 농장』 『웃음과 울음의 순서』 『겨울 촛불집회 준비물에 관한 상상』 등이 있음. hajongoh@hanmail.net

 

 

 

말년 1

 

 

할아버지가 웅크리고 움직이면

남포등은 그림자를 일렁거렸고

어린 내가 엎드려 책을 펴면

남포등은 불빛을 퍼뜨렸다

 

방 천장에서 내려온 줄에 걸린 남포등에

등피를 닦고 등유를 채우고 심지를 돋우어

성냥을 켜 불붙이는 일을

할아버지는 어스름이 내린 뒤에야 했다

기름을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서라는 건 나중에 알았고,

그 시절 저녁마다

어둠 속에서 내가 상상한 것은

장발장과 올리버트위스트였는데

말년에 와서야 허구가 나를 고뇌하도록 했다는 걸 알았고

불빛 아래서 공부한 것은

율도국과 천국이었는데

말년에 와서야 허상이 나를 연명하도록 했다는 걸 알았다

 

하마 할아버지가 된 나는

어린 손자가 엎드린 채

어둠 속에서 상상하도록

불빛 아래서 공부하도록

어스름이 내린 후에 전등을 켠다

 

손자가 먼먼 훗날 말년을 맞으면

내가 켜주었던 전등을 기억하고는

지난날을 더듬을지도 모른다

어둠 속에서 상상한 것이 누구였는지

불빛 아래서 공부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아무려나 초년엔 그 모두 사실이었거나 진실이었다고 믿기를

 

 

 

말년 2

 

 

날마다 해가 지기 전

들길로 산책하면서

산발치에 세워져 있는

태양광발전소를 쳐다보았다

어느날 마주친 사장이 먼저 말을 걸었다

논에다 시설만 해놓으면

집에서 쓰고 남은 전기를 팔 수 있다거니

농사를 짓기보다 돈을 더 잘 벌 수 있다거니

위험한 원자력발전소를 짓지 않아도 된다거니,

환심을 사려는 언변 같아서

나는 들은 척하지 않았지만, 실은

늙어 일할 수 없는 농부들이 모여서

놀리는 논밭을 내놓아 조합을 만든 뒤

좀 덜 늙은 사람에게 위임하여

사업을 해볼 수 있다는 걸

말년의 한국 농부들이 전업할 수 있는 업종이라는 걸

태양광발전소를 보며 발상해본 적 이미 있었다

들판이 시작되는 산발치,

태양광발전소가 세워져 있는 산발치,

온갖 들풀들이 햇빛을 받으며

자잘한 꽃을 눈부시게 피우고 있어

나는 들길에서 산책할 때 쳐다보다가

집에 돌아오면 어스름이 밀려와도

외등도 실내등도 켜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