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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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 吳銀

1982년 전북 정읍 출생.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유에서 유』 등이 있음. wimwenders@naver.com

 

 

 

세번 말하는 사람

 

 

o는 꼭 세번씩 말했다 그의 입에서 같은 말이 속사포처럼 작게 세번 흘러나올 때 사람들은 크게 한번 놀랐다 같은 말을 연속해서 듣는 것은 고역이었다 두번도 아니고 세번이라니!

혀가 짧아서, 속사포의 성능이 좋지 않아서, 단어의 시작과 끝이 토마토나 아시아처럼 같은 음절이어서 어떤 말은 세번 말해야 상대가 겨우 알아들었다 불발이 된 단어는 늘 부끄러웠다

 

김치볶음밥에 어떤 재료를 추가하고 싶으신가요?

피망, 피망, 피망

말할 때 너무 열을 올려서 그런지 세번째 피망은 피멍처럼 들리기도 했다 놀란 종업원이 조건반사처럼 고개를 세번 끄덕였다 덕분에 피망볶음밥에 가까운 김치볶음밥이 나왔다

 

한번만 말하면 의심스러웠다 뜻이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상대가 말을 제대로 듣긴 했는지 간파할 수 없었다 파열음이나 마찰음이 섞여 있기라도 하면, 한번 만에 의사를 전달하는 건 불가능했다

두번을 말하면 상대가 의심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꼭 두번을 말한다고 했다 사기꾼들은 보통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두번 말하지 투자하세요, 투자하세요 수익이 납니다, 수익이 납니다

 

과감하게 투자하실 건가요?

수염, 수염, 수염

수익이 나는 걸 기다리느니 수염이 나는 게 빠르겠다고 답하려다 실패했다 웃음이 났는데 참다보니 눈물이 났다 속사포의 방아쇠는 총알의 일부만 견인할 때가 많았다

 

세번씩 말하면 사람들이 집중했다 세번 말하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여겼다 간절한가봐, 강조하고 싶은가봐, 각인시키기 위해서인가봐 봐봐, 두번도 아니고 세번이잖아!

세번째 말할 때 입천장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식욕이 돋았다 무조건반사처럼 천장에서 단비 같은 침이 쏟아졌다 o는 그것을 다시 식도 뒤로 꿀꺽 삼켰다

 

저녁에는 무엇을 드시고 싶습니까?

차장면, 자장면, 짜장면

 

속사포에서 파찰음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얼어붙는 사람

 

 

김은 저돌적인 사람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뭐든 이루어냈다 그의 예언은 적중했고 예상은 번번이 맞아떨어졌다 그가 산 주식은 폭등했고 물려받은 토지는 금싸라기 땅이 되었다 앞뒤를 생각하지 않고 덤볐지만 운 좋게도 앞과 뒤가 그를 떠받쳐주었다 사람들이 환호를 지르면 앞으로 나갔고 위기가 찾아오면 뒤의 몸을 빌렸다 무리해서 진행한 일도 뜻밖의 수확이 되어 돌아왔다 승부사나 개척자 같은 말이 그를 따라다녔다 앞에 붙기도 하고 요령껏 뒤에 붙기도 했다 그는 떠오른 아이디어를 전속력으로 밀어붙였다 다음날이면 아이디어가 궁궐이 되고 모델하우스가 되고 홈페이지가 되었다 눈뜨면 집이 나 있었다 집집이 돌아다니면서 다음 집을 구상하는 게 김의 일이었다

김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집을 짓겠다고 마음먹었다 김을 숭앙하는 사람들의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승부사는 기질이 꺾일 겨를이 없었다 개척자는 처음을 포기할 새가 없었다 김은 예정대로 공사를 지시했다 땅을 파고 기초를 다지고 철근콘크리트로 뼈대를 세웠다 언론에서도 연일 김의 행보를 주시했다 신문기자 앞에서 이런 말을 한 적도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집이 만들어질 겁니다 자기 머릿속으로 저런 말을 생각해낸 사실에 조금 우쭐하기도 했다 어느날, 김의 앞에 벽이 등장했다 김은 벽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누구라도 김을 만나면 고개를 숙였으니 말이다 벽은 김 앞에서 몸을 굽히지 않았다 쑥쑥 자라났다 머릿속으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쉽게 넘겠다고 생각했는데 벽은 점점 높아졌다 조금만 노력하면 넘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벽은 거침없이 위로 뻗었다 안간힘을 발휘하면 결국에는 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벽의 위용은 꺾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승부사의 승부수도 개척자의 개척정신도 벽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김은 악을 쓰며 밀어붙이다가 어느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 벽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벽을 만나지 못하면 집은 완성될 수 없었다 앞뒤는 김의 편이었지만 위아래는 그의 편이 아니었다 언론은 금세 싸늘해졌다 김을 취재하러 온 마지막 기자가 물었다 무리해서 진행하다가 이렇게 된 겁니까? 뜻밖의 질문에 김은 당황하고 말았다 뒤통수처럼 무방비였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집을 지으려다 그는 가지고 있던 모든 집을 잃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던 기자들의 자리에 빚쟁이들이 눌어붙었다 돈을 빌려준 사람도, 빚을 진 사람도 빚쟁이였다 빚쟁이들이 멱살을 잡고 팔을 덥석 잡고 날렵하게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앞으로 떠밀렸다가 뒤로 나동그라지기 일쑤였다 집 밖에서는 앞뒤가 들어맞지 않거나 위아래 구분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김은 가지고 있던 집들을 다 잃었으므로 집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어느날은 자기가 지었던 집 앞에 있다가 저리 냉큼 가라고 쏘아붙이는 할머니를 만났다 정신이 바짝 들었다 앞뒤를 돌아보아도 위아래를 훑어보아도 자신을 환영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김은 사람들의 환호를 생각하며 겨우 잠이 들었고 세상에서 가장 높은 집을 짓겠다고 호언장담하며 잠에서 깼다 승부수를 던질 기회도, 개척을 꿈꿀 여유도 없었다 김은 이제 하루에도 몇번씩 얼어붙었다 편의점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삼각김밥을 구걸할 때도 지하철 역사 내에서 쪽잠을 자려고 자리를 찾아볼 때도 김은 얼어붙은 상태였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퇴근길에 그를 치고 지나갈 때 김은 자신을 감싸고 있는 얼음이 와장창 부서지는 것 같았다 길을 묻기 위해 할아버지가 옆구리를 쿡 찔렀을 때에는 그대로 녹아내리는 줄 알았다 “이봐요”라는 말에도, 찡긋하는 표정에도, 집이라는 글자에도 그는 얼어붙었다

김은 얼어붙은 채로 골목에 퍼더버리고 앉았다 심장이 뛰고 있었다 김의 뒤를 받쳐주는 것은 벽이었다 딱딱한데 아늑했다 드디어 벽을 만났는데 김은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김의 그림자가 벽 아래로 천천히 흘러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