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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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재 李永在

1986년 충북 음성 출생. 201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jayajing@naver.com

 

 

 

이 사과는 없다

 

 

사과가 있다 붉고 둥근 사과다 평범한 사과다 나는 홀로 이 사과가 없다는 걸 증명해내야 한다 지나가는 자동차를 봤다 자동차가 사라졌다 없다는 걸 증명해야 할 사과는 내 주머니 속에 있다 주머니가 불룩하다

 

새는 새가 아니다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언덕은 언덕이 아니다 이 명제들은 종종 참이 된다 하지만 완벽한 증명에 종종이 개입될 여지는 없다 여지없는 명제가 필요하다 나는 완벽해야 한다

 

세계엔 이미 증명이 끝난 명제들이 많다 이 사과가 없다는 건 끝난 증명이 아니다 이 사과는 없기 때문이다 이 사과는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의심하되 포기하지 않는다

 

증명 중인 사과를 두고 나왔다 주머니는 불룩하다 엄마의 전화를 받고 조금 슬펐다 둘러봐도 앉을 만한 자리가 없다 집으로 돌아와 사과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대로인 주머니 속이 든든해졌다

 

증명 중이다 배고프면 밥 비슷한 것도 먹고 졸리면 오래 잔다 자다 깨서 사과를 찾으면, 제자리다 안심이 된다 내겐 할 일이 있다 나태 없이, 사과를 본다 이 사과는 없다 내겐 이것뿐이다

 

애인에게 이 사과가 없다고 말했다 애인은 내 말을 듣지 못했는지 가던 길을 갔다 내가 가치 없는 증명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들었는데, 애초에 내가 가치 있는 삶을 살고자 한 적이 없으니

 

이사를 했다 방이 작아졌지만 사과의 크기는 그대로다 사과는 영향을 받지 않는다 없기 때문이다 내가 영향에 예민한 편인 건, 내가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이 사과가 없다는 증명을 끝내면 얼마나 기쁠까 잠시 행복해졌다 잠시의 후엔 행복이 사라진다

 

참은 참이고 거짓은 거짓이다 이 명제는 여지가 없다 몇번 부숴보고 싶었지만 실패했다 객기였다 사실 진심도 아니었다 나는 진심으로 이 사과를 대하고 있다 이 사과는 없다 내겐 이것뿐이다

 

그만두고 싶지 않다 그만두고 싶지 않다 그만두고 싶지 않다

 

면접관에게 이 사과가 없다는 걸 증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면접관은 그 증명이 어떤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지 물었다 가치보다 창출이란 말에 숨이 막혔다 더는 포장하지 못했다 더는 과장하지 못했다

 

사과의 탓을 하고 싶지만, 이 사과는 없다 없는 사과를 탓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나는 어리석지만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는다 내가 사람이지만 사람처럼 살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볼 수 있다

 

대상에 함부로 동일시하지 말아야 한다는 소신이 있다 사과는 증명이 끝나면 사라질 대상이다 사라질 것들에 마음을 둬선 안 된다 경험으로 터득한 꽤 신빙성 있는 명제들이 있다 가령 결코 포기해선 안 된다는 것

 

포기하고 싶지 않다 포기하고 싶지 않다 포기하고 싶지 않다

 

그 사과가 없다는 증명이 끝났냐고 오래된 친구가 물어왔다 이 사과가 없다는 증명이라고 세번을 강조했다 오래된 친구는 노력하라고 말했다 나는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전화가 끊겼다 나는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시간이 지나고 있다 시간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많은 문제는 돈인데, 그렇다고 돈이 사과가 없다는 걸 증명해주지는 못한다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문제는 다시 닥친다 해결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이 사과가 없다는 증명이 해결되지 않는 것처럼

 

다시 이사를 했다 방 안의 물건들이 줄고 있다 버릴 건 버린다 나는 잘 도망치듯 잘 버리는 편이다 이 사과는, 이 사과가 없다는 걸 증명해야 하므로 버릴 수 없다 버리고 도망치고 버리고 도망쳐도, 이 사과만은 버릴 수도 도망칠 수도 없다 내겐 이것뿐이다 내겐 이 사과뿐이다

 

다시 시작해보자 이 사과는 없다 왜냐하면,

 

 

 

청사진

 

 

건물을 올리며 네명이 죽었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건물은 보편적인 각도와 높이의 계단을 밟고

차근차근

벽돌을 소모하고 삽과 젓가락을 소모하고 함바집 할머니를 소모하고 간이 화장실과 병실 침대를 소모하고 짱돌을 무더기로 소모하고

 

본래 이곳에 있던, 집으로 구축된 집들이 소모되며

누군가 기쁘고

누군가 슬펐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건물을 올리며 세명이 더 죽었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관리자의 관리자의 관리자는

일곱이면 선방이라고 생각했다 일곱이란 숫자는 모나미 볼펜을 한번 안 떼고

그릴 수 있다

 

청사진처럼

 

벽돌을 짊어진 저 젊은이는

아직 젊다

젊어서

 

위험수당을 받으면서도, 일곱 안에 포함된 사람과 같은 솥의 밥을 퍼먹었으면서도, 괜찮을 거라 생각한다 절뚝대는 무릎마저 시간이 지나면 괜찮을 거라 생각한다

 

회복의 반대편으로, 계단을 올라가는 저 젊은이는

차근차근

젊어서

아직까지 젊음이 소모되지 않아서, 그렇게 차근차근 교육으로 오래 축조돼온 희망이, 기대가

견고한 척, 휘어지기 직전의 크레인처럼

 

바람이 불어도

휘청하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