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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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선 李太善

1961년 경남 거창 출생. 199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눈사람이 눈사람이 되는 동안』 『손 내밀면 미친 사람』 등이 있음. lts7038@hanmail.net

 

 

 

힘 너머의 힘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 나는 누구를 불렀다

화장실 문을 잠그고 세수하고 얼굴을 닦다가

뭉클 수건에 네가 와 있었던 것이다

따스한 짐승 털같이 수건걸이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현관문을 잠그고 비밀번호를 걸어두어도 와 있다

창밖에 서 있는 택배트럭 지붕에도 있고

거실 햇빛 속에도 들어와 있고

뭉쳤다가 흐르다가 나의 힘 너머의 힘을 너는 가졌나보다

추운 날은 추운 날대로 부드러운 포즈로

겹겹의 잎과 겹겹의 가지를 다 서성대고

잎이 떨어지는 나뭇가지에서 불타다 온다

타다 타다 탈 것 없이 타고

녹아내려 차가운 것이다

오늘은 또 가고 작년의 오늘도 갔고

징징 들이치며 와서 먼지 아래 있고

벽은 누렇게 바래가고

차가움 하나가 두개 세개로 퍼져 뜨거워져

창문 환하게 밝히며 너는 오는 것이다

헌것에 새것이 와 섞이고

천천히 서쪽 하늘에서 오고

라디오 소리에 물들다 오는 것이다

잡아도 만져지지 않는다

물이 새어나간 손바닥 말라버린 듯

내 몸을 휘감고 조용해져 있는 것이다

보도블록 주변에도 있다 그걸 보면 얼른

그래그래, 해야 하는 것이다

밥을 먹고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내 목을 할퀴지 말라고 혼잣말을 한다

로션 바르고 머리칼을 말리다가 언뜻 뜨거운 널 본다

인간극장 할아버지는 마흔 자식이 두명

폐암 걸려 죽고 간암 걸려 죽고

할아버지 두고 먼저 죽었다

그래도 가을이라고 단풍나무가 물든다

쌀쌀하다고 아파트 담장에 늦국이 핀다

어둑해진 거실바닥에 주저앉은 할아버지

낮에 먹다 남은 막걸리 마시고 소금 집어 먹고

어둑어둑한 네가 저 할아버지랑 앉아 있다

 

 

 

방구석 사람

 

 

검은 눈발이라 한다 누군가는 석탄가루라 한다 누군가는 먹잇감을 찾는 발소리라 한다 자칼의 발소리를 닮았다 한다 굴러다닌 것이 바위에게로 흘러드는 소리라 한다 캄캄한 봄이 오는 거라 한다 누군가는 봄이 가는 거라 하고 누군가는 커튼 뒤에서 주체할 수 없는 봄이 증폭하는 것이라 한다 누군가는 벚꽃이 캄캄해진 것이라 하고 자신의 뜰을 캄캄히 메꾸며 피고 있는 꽃이라 한다 아니 날아가는 걸 붙잡아두었다 한다 누군가는 자신이 깡통을 차며 떠도는 것이라 한다 겨울에도 얼지 않는 축축한 것이 방구석에서 짓무르는 소리라 한다 이러다 정말 놓치면 어쩌나 전신으로 붙들어야 한다 한 터럭도 못 가게 얼음 밑에 꽝꽝 깔려 있고 싶다 한다 곰팡내 나는 방구석 사람들은 여기가 편하고 익숙하다 한다 너는 일이 없어 앓고 있고 겨울밤이 네 편을 들어주고 있다 누군가는 한밤중에 날아오는 돌멩이를 난롯가에 쌓는 소리라 한다 난로가 달아오르면 돌멩이가 벌겋게 어딜 다녀온다 한다 아니다 가는 것이라 한다 누군가는 움직일 수 없어 불타고 있는 것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