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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손택수 孫宅洙
1970년 전남 담양 출생.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호랑이 발자국』 『목련전차』 『나무의 수사학』 『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 등이 있음. ststo700@hanmail.net
지축을 지나다
지축은 십년 넘게 폐허였다
나는 폐허를 지나야만 서울로 들어갈 수 있었다
북한산 아랫마을
삼호선 지하철 창문으로
사라진 골목과 목욕탕과 전봇대가
아침저녁으로 나를 마주 보았다
세면을 할 때마다 섬찟, 더듬어보는 뼈 같았다
세면을 할 때마다 잊는 해골 같았다
폐병쟁이 퀭한 얼굴 같은 살풍경이나마
재건축이 시작되면서 마을의 기억은 이제 온데간데없다
폐허가 너와 나를 잇는 경계였던 시절도 가고
빗돌처럼 아파트가 올라온다
그만 외면하고 싶은 얼굴 외면하지 못하도록
출퇴근 때마다 마주 보던 지축
폐허를 잃어버린 폐허의 얼굴이 창유리 속에 박혀 있다
누릉
신춘 등과 스무해 되던 해에 처음으로 관직을 제수받고 사은숙배한 뒤 화성도 동탄 돌모루 왕릉으로 왔다 왕릉은 왕릉인데 눈물의 왕*을 모신 누릉(淚陵)인지라 낯선 타지에서 눈물깨나 쏟을 것이라 다들 고개를 흔들었으나 죽음을 마주하는 청직을 어찌 사양할 수 있을까 미관말직이긴 해도 함께 온 능졸이 불쌍놈 같은 허우대와는 달리 그 심성이 딴은 심산유곡처럼 깊은 데가 있는지라 적잖이 의지가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기실 우리는 싯줄이나 읊으며 떠돌면서 경화사족들을 은근히 부러워하고 질시하며 미천한 신세타령을 함께한 도반으로서 눈물만큼은 그 누구보다 곡진하게 흘려본 내력을 갖고 있기도 하였다 능역에 들어선 문학관 맞은편엔 사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러브호텔과 룸살롱과 주점이 즐비하고, 환락가 반대편 문학관 뒤쪽엔 나지막하지만 새소리 깊게 울리는 오솔길을 품은 산이 어깨를 내어주고 있다 문학관을 제실로 밤이면 도로를 건너다 골절상을 당하는 풀벌레 소리를 받아 적고, 주점을 헤치고 검은 도로를 건너오는 사람들의 참배를 기다린다 더러는 폐차 직전의 나귀를 타고 덜덜덜 남양도호부 매향까지 가서 신도들을 찾아보기도 한다 능졸이나 나나 허술한 데가 많아 근방의 호족들 서리배들로부터 수차 고초를 겪기도 하였으나 눈물을 봉분으로 섬기는 일에 어찌 소홀함이 있을까 오호라 종구품 음직인들 어떠랴 눈물을 고배율 렌즈처럼 닦아 하늘을 보자꾸나 경술년 중추절 앞 벌초를 하고 내려오는 잠시 몸에 밴 풀내를 따라오는 나비 날개를 능참봉 견장처럼 슬쩍 달아도 보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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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사용 「나는 왕이로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