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안희연 安姬燕

1986년 경기 성남 출생. 2012년 창비신인시인상으로 등단.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등이 있음. elliott1979@hanmail.net

 

 

 

내가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

 

 

목을 가누지 못하는 아이가 있다

 

밤이 되어도 불이 켜지지 않는 집

아이는 자지러지게 울지만

누구도 아이 울음소리를 들어본 적 없다

 

집은 비탈 아래 있다

마차에서 떨어져 나온 바퀴가 구르고 구르다

거기 쓰러져 멈추었을 때

집은 더이상 발을 내디딜 곳 없어

주저앉은 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

 

산지기는 자주 비탈 위에 서서 지나간 시간을 생각한다

그는 마차를 타고 숲을 달리는 꿈을 자주 꾸는데

낙석으로 길이 끊기는 장면에서 늘 깨어난다

그는 그 꿈의 의미를 알고 싶어하지만

비탈 아래 무엇이 있는지는 보지 않는다

 

거기 누구 없어요?

산지기는 오래전 이 산에서 길을 잃었다

위에서 긴 나뭇가지가 내려왔는데

끝없이 오르고 오른 기억밖에는 없는데

굴렁쇠처럼 시간을 굴리며 노는 천사들이 있고

패를 뒤섞는 장난이 있고

 

이 모든 풍경을 메마름이라고 발음하는 입술이 있다

울다 잠든 밤이 많은 사람

그는 매일 횃불 묶은 마차를 산속으로 출발시킨다

산의 영혼이 그들을 집까지 인도해주기를 기도하면서

그러나 시간은 도착을 모른다

굴렁쇠를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버린 천사들

 

모두가 쓰지 않고도 쓰고 있다

온통 검은 페이지 위에서

 

 

 

열과(裂果)

 

 

이제는 여름에 대해 말할 수 있다

흘러간 것과 보낸 것은 다르지만

 

지킬 것이 많은 자만이 문지기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지기는 잘 잃어버릴 줄 아는 사람이다

 

그래, 다 훔쳐가도 좋아

문을 조금 열어두고 살피는 습관

왜 어떤 시간은 돌이 되어 가라앉고 어떤 시간은

폭풍우가 되어 휘몰아치는지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솔직해져야 했다

한쪽 주머니엔 작열하는 태양을, 한쪽 주머니엔 장마를 담고 걸었다

 

뜨거워서 머뭇거리는 걸음과

차가워서 멈춰 서는 걸음을 구분하는 일

 

자고 일어나면 어김없이

열매들은 터지고 갈라져 있다

여름이 내 머리 위에 깨뜨린 계란 같았다

 

더럽혀진 바닥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여름은 다시 쓰일 수 있다

그래, 더 망가져도 좋다고

 

나의 과수원

슬픔을 세는 단위를 그루라 부르기로 한다

눈앞에 너무 많은 나무가 있으니 영원에 가까운 헤아림이 가능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