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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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운 安泰云

1986년 전북 전주 출생. 2014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 『감은 눈이 내 얼굴을』 등이 있음. antaewoon@naver.com

 

 

 

하루

 

 

나는 소곤거리듯 말했고 하지만 모르는 목소리처럼 말한 것도 아닌데 저편에서는 모르는 목소리가 되어 있었고 전화를 끊고는 정말 그러한가, 내 목소리가 맞긴 한지 소리 내 흉내 내보았다. 사무실 안에서 그러면 내 목소리는 울려오나 울려퍼지나 목소리는 목소리대로 떠돌 수 있나, 그런 건 신화나 동화에서나 나오는 일일 테지, 그러므로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았고 나 역시 떠돌 수는 없었지. 그사이 여러번 전화를 받는다. 전화를 하고 업무를 처리하고 차를 마시고 비가 오려나 눈이 오려나 그럴 것 같으면 옥상으로 올라갔다 내려오고 순식간에 하루 일과가 지나가는데 하루가 빨리 가는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잘 모르겠어, 건물을 나설 때, 다 어두워져서 묘한 기분이 들고 문득 우연, 하고 내뱉는 내 목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그게 이상도 해서 우연이라고 속으로 중얼거리고 그러니까 우연한 슬픔과 우연한 기쁨과 우연한 결속이, 세상에나 우연의 일치군요, 이렇게 말하고 얼마간 머물러 있다가 떠나가는 사람을, 우연한 마찰과 우연한 해소와 우연히 만나서 우연처럼 엇갈리고 지속되며 또 우연히 헤어지게 되는 미래의 연인을, 그러므로 누구라도 누군가의 연인이 될 수는 있겠어,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올 때, 결국 집에 우연히 도착했군, 속으로 헛헛한 웃음을 지을 때 나는 다른 목소리들은 다 잊었다. 할 말이 없었으므로 집에서는 침묵한 채 보일러를 켜고 대파를 썰고 밥을 차려 먹고 이미지를 보고 글자를 읽는다. 내다버릴 것들을 다 내다버리려 방들을 둘러봐도 어느 방에든 목소리는 없었고 그후 할 일을 다 마쳤을 때 여기서의 내 일과도 다 끝이군, 하고 나는 집을 나섰다. 어디로 갈까, 밖으로 나가면 어디로든 갈 수 있겠지, 꽃집을 들를까 춤추러 갈까 광장을 돌며 거닐어볼까 술 마시러 갈까 미용실로 갈까, 그런 하나 마나 한 리듬을 속으로 읊조리면서 어제와 마찬가지로 골목을 따라 들어갔다. 집으로 되돌아가야 하니까 너무 멀지 않은 곳에서 발길을 돌렸지. 동물을 발견하면 유심히 바라보기도 하면서, 소리가 들리면 들리는 소리를 따라가고 침묵이 흐르면 흐르는 침묵을 좇아가면서, 에두르고 스미면서, 휘파람을 불면서, 어느새 나는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참 희한하지. 창문을 바라보니 불이 켜져 있었지. 커튼 자락은 흔들리는 것 같았고 그래서 누군가 지금 살고 있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내일 아침 출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집으로 들어가야겠다고.

 

 

 

 

 

말을 탈 수 있는 곳은 어디인지. 밤에 걷다가 나는 무언가 타볼 필요가 있다고 느꼈고, 그것이 말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디서 타볼 수 있나, 여기서 얼마나 멀리 가야 가능한지 문득 헤아려보게 되자 나는 아득해졌고 그럼에도 갈 수 있어서 막상 도착하게 된다면 혹시나 말 타고 싶은 기분이 사라져버릴까봐 주저하면서 걸었지. 마치 가능할 것처럼. 이미 밤이 되었고 저 멀리 가기란 불가능하고 말은 아마 자고 있을 텐데, 나는 왠지 그 불가능한 일이 가능도 할 것처럼 느껴져서 말 타러 가야 할지 말지 내내 망설였다. 하지만 자고 있을 말의 모습이 떠올랐으므로, 나는 갈 곳을 변경했고, 발이 닿는 곳으로 발이 미끄러지는 곳으로 발이 서성이는 곳으로 발이 멈추는 곳으로 향해 나아가자, 시장으로 들어서게 되었지. 거기서 두리번거리면서 살 것을 산다. 사지 않아야 할 것도 마구 사게 되고 망했다는 듯 신이 났다는 듯 마구 저질러버리겠다는 듯 청휘조를 사고 알루카시아를 사고 맥문동과 피를 사고 율마와 거울과 해먹을 사고 로봇을 사고 이구아나를 사고…… 그 모든 것들을 사서 들쳐메고 집으로 돌아갔어. 방에서 나는 그것들을 바닥에 풀어헤쳐놓은 채 오랫동안 바라봤지. 움직이는 것들은 움직이고 움직이지 않는 것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움직이다가 움직이지 않는데, 문득 광기 어린 사람으로 분(扮)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다면 바닥에 있는 것들을 즉흥적으로 패대기치자 어지러뜨리자 뒤섞어버리자, 하지만 그건 몹쓸 짓 같았으므로 말을 동원했지. 말은 거칠군. 말은 요란하군. 방 안에서 분탕을 치고 벽에 부딪치는군. 나와 내 주위를 박살 내고 짓이긴다. 물론 망상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었고 나는 방을 가득 메운 그것들을 다만 바라봤지. 그러다 창문을 열었으므로 무언가 내놓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고 나는 이제 베개와 이불뿐인 침대 위로 올라가 누웠다. 누우니 잠이 들었다. 잠든 후 꿈을 꾸고 도로 잠이 들었다.

 

나는 말을 끌고 우리 밖으로 나가고 있었네. 들판으로 걸어가니 눈앞으로 언덕이 펼쳐졌고 나는 내가 끌고 가는 이 순한 말이 곧 죽으리라 직감했다. 하지만 이대로 죽어선 안 돼. 여기서 죽으면 안 된다고 토닥이며 더 나아가길 재촉했고 말의 두 눈 앞에서는 사람들만이 어른거렸다. 사람들뿐이었으므로 나는 말이 좀 다른 것들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그때까지 살아야 한다고, 말과 함께 더 멀리 걷다가 이윽고 어린 말을 마주친다. 나는 어린 말을 바라봤지. 하지만 내 옆에 있는 말도 그 어린 말을 봤나. 나는 그 모습을 못 봤어. 못 봤지. 다만 내가 어린 말을 바라볼 수는 있었고 두 눈이 있었고 나는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어느 곳에서든 그런 기분이 들었지. 깨어난 후 침대 주위를 둘러봤다. 내가 산 것들을 몸에 다 걸쳐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