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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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 金海慈

1961년 전남 신안 출생. 1998년 『내일을여는작가』로 등단.

시집 『무화과는 없다』 『축제』 『집에 가자』 『해자네 점집』 등이 있음.

haija21@naver.com

 

 

 

몸의 소거

 

 

진짜 진짜 죽을 만큼 우울할 땐 친구랑 통화를 해요. 음 소거해놓고요, 그냥 서로 하고 싶은 말 하다 언제 끝난 지 모르게 끊겨요… 걔도 내 말 못 듣고 나도 걔가 무슨 말 하는지 모르죠. 무슨 말인지 몰라도 내 말을 들어주고 있잖아요. 혼자보단 나으니까… SNS도 도움 될 때가 있다니까요. 나랑 연결돼 있잖아요 누군가 나를 봐주고 있잖아요…

 

이제 겨우 스물두살 청년이, 강연 끝나고도 한참 기다렸다 털어놓은 말이 남대문시장 골목까지 따라왔다. 냉장고에서 막 나온 소주병이 눈물 흘린다. 유리병이나 맥주캔 같은 차가운 금속 표면엔 왜 물방울이 생길까. 묻지 못했다. 진짜로 걔가 무슨 말 했는지 알고 싶지 않냐고. 진짜로 네 말을 들려주고 싶지 않았냐고. 말하지 못했다. 뭐라도 좀 먹으라고. 배를 채워야 다음 슬픔을 맞이할 수 있으니까.

 

새벽녘 깨어났다

울음 묻은 기침 소리

옆에 아무도 없다 몸이 기억하는

스물두살에게 말을 걸었다 네가 듣지 못해도

 

사랑을 노래하는 동안 철없이 사랑은 끝나가고 있었고 성장과 진보를 외치는 동안 맥없이 우리 집구석들은 금이 가고 있었지. 뭐 아파트먼트서 살고 싶다고? 아 사고 싶다고오… 죽음을 피해 다니는 동안 온 사방에 싱크홀이 입 벌리고 있었고 정치, 크고 막강하기까지 한 것들, 상어처럼 떼 지어 다니는 동안 여린 목숨들은 콘크리트 사이에서나 겨우 꽃피고, 혁명도 주식이랑 똑같아 하한가 찍었다니까 경제, 생산성 없는 육체와 포스트모던하지 못한 하부구조는 최근 떠들썩한 블랙홀에 이주시키기로 했다지. 그 비용이 얼마야 대체, 전지구인에게 기본소득 줄 돈이군그래. 궤도가 넓어진다는 것은 점점 멀어진다는 것, 우린 너무 커져서 들리지 않는 새로운 언어를 학습하는 인류가 되어가는 중이야… 근데 나 인간 맞어? 아 참 내 말 못 들었지…

 

몸이 소거된 자리

알 수 없는 전파만 무성하다

 

 

 

방탄소년단의 「봄날」을 듣다

 

 

눈이 내린다 몇년째

저기 기차가 온다 눈에 엎드린다

손바닥에 닿은 뜨거운 눈

녹아 흔적도 없다 방금 전 있던

너는 어디로 갔나 기억 속 설국열차가 달린다

 

굳게 잠긴 지하실 문

수조에 너는 갇혀 있다 으어어 어으으

잘할게요 공부도 열씨미 할게요 절 내보내주세요

한때 인간의 말도 할 줄 알았던 너

얼마를 더 가야 누군가의 고통 때문에 행복이 간신히 팔리는

세상이 끝날 수 있을까 목과 몸체가 분리된

오 오멜라스 청동의 관이여

 

빨 수 있는 건

들어갈 발목이 없는 운동화

끼울 팔목이 없는 셔츠들

 

네게 끝내 닿을 수 없었던 슬픔과

그보다 부끄러움

치사량에 못 미치는

갇힌 나여

 

몸 빠져나간 옷이 부풀어오른다

옷이 다시 젖는다 서로 팔짱 끼고 눈 감은 바다

몇번이나 더 살아야 네가 나였다는 걸 알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