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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인범 李麟範
1948년 광주 출생. 2002년 『시와사람』으로 등단.
시집 『달빛자국』 『숲의 어둠은 다 푸른 나뭇잎들이다』 등이 있음.
bum125@hanmail.net
빛깔의 가닥
얼떨결에 나는
저무는 골목길 지친 신발 위에 떨어지고
한참을 더 버팅기다가 너는
미사 끝내고 홀가분 마당에 나온
신부님 검은 어깨 위에 떨어졌지
두려움 때문인지 처음엔 얼굴이 하얘졌다가
갑자기 수그러지더라 너
그날 달리는 자동차에 손짓하며 계속 따라오다
지쳐 멈춰버린 먼 산 봉우리들은 하얬다
망설임 없이 경계를 떠다니던 바람은
빛깔이 없어 가볍게 생성되고 흩어지네
바람은 허공, 우리는 바람을 다 부러워하네
부처의 누런 발바닥에 흙이 묻은 이후로
배우지 않아도 우리는 누구나 창백한 얼굴의
빛깔의 가닥을 헤아릴 수 있지
사그라지듯 하얗게 타고 있는 희나리들 바라보며
희붐히, 너는 기도처럼 앉아 머리만 조아리고
파리한 저문 하늘, 나는 끌고 끌려간다
빛을 토해버리는 손수레, 삶의 보푸라기들
찔레꽃, 하얀 찔레꽃 위에
빛살이 쏟아지면 하얗다 못해 파랗다
하양의 본디 빛깔은 순결한 파랑이다
꽃을 기르다
꽃은 항상 미소 짓고 있는 줄 알았다
뿌리와 줄기 잎 꽃이 다 한맘인 줄 알았다
꽃과 꽃의 향기는 가끔 서로 다른 길을 간다
한걸음만 내디디면, 클릭하면
머나먼 낯선 곳, 지워져버리는데
가끔 놀란 토끼처럼 폴짝폴짝 뛰다가도
잔걸음으로 거친 숲을 새벽녘까지 걸었다
숲엔 모든 것이 하릴없이 얽혀 있어
상처들도 꽃 같고 아름다움도 쓸쓸하다
고라니 한마리 홀연히 나타났다가
찰나에 사라진다 숨죽인 숲은 매 순간 새롭다
멀리 떠나지 말아라, 고라니
눈에 띄지 말아라, 고라니
항상 축축하다 서로 비틀고 짜서
울타리에 길게 널린 바람에 춤추는 옥양목처럼
서로를 하얗게 말려주지만
우리는 원래 물기투성이라서
하늘에서 여린 빛을 머금고 내리는 눈송이들이
떠나가는 것들의 뒷모습을 하얗게 호명해준다
매 순간 깜빡이며 스러지는 떠나가는 것들
꽃을 영상 속에 기르는가 이제
시들지 않는 질리지 않는 날마다 새롭게 예뻐지는
꽃과 꽃의 향기가 항상 서로 같은 길을 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