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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조천호 『파란하늘 빨간지구』, 동아시아 2019

이제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다

 

 

전치형 全致亨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cjeon@kaist.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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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년 전쯤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기후변화 문제를 다루는 과학교양서가 왜 잘 나오지 않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다. 기후변화의 과학이 물리학, 천문학, 수학보다 더 어렵고 복잡해서인가? 기후변화를 연구하는 과학자가 적어서인가? 기후변화는 4차산업혁명과 별로 관계가 없어서인가? 기후변화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인가?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지만, 그후로도 대기와 기후를 오래 연구한 과학자가 기후변화를 주제로 삼아 쓴 과학교양서는 많이 볼 수 없었다. 국내 필자가 한국어로 쓴 책은 더 드물었다.

국립기상과학원장을 지낸 조천호가 쓴 『파란하늘 빨간지구: 기후변화와 인류세, 지구 시스템에 관한 통합적 논의』를 읽으면서 한가지 해답을 찾았다. 기후변화의 과학은 그다지 멋있지 않다. 대기과학이 묘사하는 자연은 간단한 법칙을 따라 질서있게 움직이지 않는다. 조천호의 책처럼 친절하게 풀어 쓴 설명을 읽어도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경이 같은 것은 잘 느낄 수 없다. 이론을 바탕으로 예측한 것이 현실에서 딱 맞아떨어지는 통쾌한 순간도 없고, 지난한 계산을 끝냈을 때 단순명료한 답이 기다리지도 않고, 십년 후에는 어떤 훌륭한 기술이나 특허가 나올지 약속하지도 않는다. 저자는 틈날 때마다 불확실성을 말한다. 지구라는 시스템은 너무 복잡해서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도 없고 모든 가설을 명확하게 검증할 수도 없다. 초기 조건이 조금만 달라져도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예측할 수 없다. 성실한 대기과학자는 왠지 자신감이 적어 보인다.

그러나 저자는 또한 단호하게 말한다.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건 아니다.”(262면) 과학은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꽤 신뢰할 만한 지식, 중요한 결정을 하고 행동을 설계할 근거가 될 만한 지식을 준다. 과학은 완전하지 않고 확실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과학이 현실에서 아무 힘이 없는 것은 아니다.”(193면) 과학이 만병통치약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하지 않는 대신, 우리가 큰 곤경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과학을 통해 알아낼 수 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학에 대해 이런 태도를 견지하면서 저자는 인류와 지구의 위기, 심지어 파국의 가능성에 대해 계속해서 경고한다. 이대로 나아가다가는 모두 망할 것이라는 말을 하고 또 한다. 지금까지 과학이 쌓아 올린 불편한 사실을 독자에게 전달하기 위해 그는 온갖 비유를 동원한다. “지금 인류가 온실가스라는 지구의 급소에 충격을 가하고 있다. 이 충격을 누그러뜨리고 중단하지 않는다면, 결국 인류는 헤어 나올 수 없는 위험에 빠질 것이다.”(71면) “인류는 가파른 절벽 가장자리에 위태롭게 놓인 도로를 달리고 있는 것과 같다.”(110면) “길에 쌓여 있는 눈을 당장 치워야 하는 것처럼 불확실성이 있다 해도 미래 경고에 대비해 당장 행동해야 한다.”(102면) 물론 더 직설적인 표현도 서슴지 않는다. “이제는 시간이 우리 편이 아니다.”(131면)

여기까지는 대기과학 또는 기후과학에 대한 책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저자는 과학자로서 성실하게 최근 논문과 보고서를 읽고, 현재 과학계가 어느 부분까지 합의에 도달해 있는지 간결하게 설명한다. 과학자들이 파악한 기후변화 시나리오를 제시하고 각각이 어떤 결과에 이르게 될는지 검토한다. 저자가 다른 과학자들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는 것은 기후변화를 “자연에서 사회의 울타리 안으로”(203면) 끌고 들어올 때다. 그는 오십년 백년 후 지구의 상태를 예측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오년 십년 안에, 아니 할 수만 있다면 바로 지금, 정치적 행동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기후변화에 대한 대비와 실천은 결국 민주주의의 문제이며 정의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민주주의가 지구 위기를 예방한다”(139면)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주로 지구의 문제를 다루면서도 그것을 한국의 문제로 연결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다. 기후변화가 초래할 총체적인 결과를 감당하는 역량은 결국 그 사회의 민주주의 수준에 달려 있으므로, 기후변화를 걱정하는 과학자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걱정하게 된다. 그는 “기후 변화 시대에 최저 자원 빈국에 초과다 인구밀도를 가진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가 더욱 절박하게 필요”(145면)하다고 말한다. 추상적인 원칙으로 채택하는 민주주의만이 아니라 정부의 합리적이고 구체적인 의사결정에 대한 요구도 잊지 않는다. 가령 미세먼지는 결국 “정부 정책의 우선순위와 집행 의지의 문제”(180면)라는 것이다. 미세먼지의 생성과 확산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일은 물론 필요하지만, 세계 11위의 경제력을 가진 나라가 이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이를 위해 자원을 현명하게 투입하기로 결정하는 것이 해결의 열쇠다. 과학도 할 일을 하겠지만, 무엇보다 정부가 제 할 일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이 책 곳곳에는 베테랑 과학자의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그는 우리가 수십년 전부터 알고 있던 과학적 사실에 따라 행동했더라면, 지금 지구와 우리 자신을 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과학을 무시했고 우리 앞에 놓인 합리적 선택을 외면했다.”(131면) 조천호의 냉정한 평가는 『다가올 역사, 서양 문명의 몰락』(갈라파고스 2015)이라는 가상 역사책을 써서 기후과학의 경고를 외면한 인류가 겪게 될 미래를 미리 보여준 과학사학자 나오미 오레스케스(Naomi Oreskes)와 에릭 콘웨이(Erik Conway)의 진단과 닮았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경고를 듣고 움직이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점도 닮았다. 암담한 미래를 경고하는 과학은 환영받지 못한다.

과학책을 읽고 마음이 불편해지는 경험은 유익하다. 기후과학은 우리가 선 자리를 불편하게 만들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도록 이끈다. 믿음을 강요하는 대신 지식을 정돈하여 제시함으로써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는 것은 과학이 잘하는 일이다. 다만 어떤 지식은 다른 지식보다 더 크게 말하고 더 오래 말해야 겨우 반응을 확인할 수 있다. 조천호의 말대로 이제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닐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