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대니엘 래저린 『반박하는 여자들』, 미디어창비 2019
강렬하지 않지만, 진리에 가까운
박민정 朴玟貞
소설가 dentata05@hanmail.net
“서로를 이해하고 돕기 위해 이야기라는 수단을 사용하는 우리의 전통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390~91면)라는 작가 대니엘 래저린(Danielle Lazarin)의 말에 먼저 주목해야겠다. 백명이 넘는 여성들이 이야기를 공유해주었다고 밝힌 작가의 말은 내게 각별한 감동을 안겨주었다. 아마도 이 작가에게 가깝고도 먼 수많은 친구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수집하는 버릇이 없었다면, 이렇게나 다채로운 소설을 써낼 수는 없었으리라. 어떤 것은 조금 짧고 어떤 것은 긴 열여섯편의 단편에는 성격과 태도뿐 아니라 연령과 처지도 다양한 여성들이 등장한다. 대체로 실패하고 부적응하긴 하지만, 그건 그냥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다. 따라서 『반박하는 여자들』(Back Talk, 김지현 옮김)이 특별히 소외된 여성들의 이야기라고 쉽게 퉁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보편적인 인간들’의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그 ‘보편’이라는 단어 역시 너무나 많은 사실들을 폭력적으로 생략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우리’들의 이야기라고 요약해야겠다. 대니엘 래저린 역시 ‘우리’라는 말을 그런 의미로 사용했으리라. 서운함을 느끼고 모욕감을 느끼는 우리의 실패, 즉 특수한 보통의 사실들이 빚어내는 드라마가 이 한권에 가득 수록되어 있다.
이 소설들의 남다른 점은 훼손된 여성의 육체나 고통스러운 부고의 체현 없이도 비극을 그려낸다는 것이다. 가령 “우리가 그 전설 속의 주인공이 된다면, 그리고 다른 여자애들이 그런 우리를 지켜본다면, 우리 둘 중 하나가 그렇게 사라지는 광경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그런 일을 정말로 목격했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들은 적이 있었다”(303면)라는 문장으로 끝나는 소설 「사라지다」에는 죽은 소녀들의 이름을 수집하는 두 소녀가 등장한다. 사고로 죽거나 맞아 죽은 다양한 소녀들의 죽음은 완전히 끝나버린 극적인 고통이 아니라, 또래 남자애들에게 컴퍼스로 엉덩이를 찔리는 살아 있는 소녀들의 일상에서 재현된다. 언뜻 노트에 기록된 무참한 죽음들을 등지고 현재의 무료함에만 몰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늘의 평범한 일상에서 노트에 기록된 뉴욕 친구들의 죽음은 ‘쓰이는’ 행위로 인해 생생하게 박제된다. 이로써 소녀들이 수집하는 친구들의 죽음은 더이상 먼 곳의 이야기가 아니다.
부잣집에서 태어났든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든, 학창 시절에 공부를 잘했든 못했든, 남들 시선에 예뻤든 못생겼든 여성들은 회피하고 싶은 순간들을 수없이 지나 자기 자신이라는 역사를 만들어왔다. 어떤 순간에는 “내가 절대로 되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부류의 여자애가 되어”(23면), “내가 원하는 것들은 내 의지로 존재하게 만들 수 없”고, “나는 아예 다른 퍼즐 상자에 속하는 조각”(99면)임을 자각하고 “대답 대신 그저 고개만 흔들었”(226면)던 완강한 결정을 마주하지만 때로는 누군가를 “텅 빈 집에서, 추위 속에서 울도록 내버려”(299면)둘 수밖에 없는 실존에 맞닥뜨리기도 한다. 실종되었다가 길고양이처럼 죽은 여자애들의 이름을 수집하고, 여자들은 ‘여자애’와는 또다른 종류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음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게 되고, 여자의 몸은 재생산을 목적으로 설계되었다는 무시무시한 사실을 깨달았을 땐 어떻게든 섹스와 임신의 공포에서 비껴가고 싶다. 저 여자애는 조금 이상하다고, 나와는 다르다고, 천박한 여자라고, 그렇게 구별짓기해봐야 이미 알고 있다. 공감이라는 말로는 차마 다 설명할 수 없는 공통의 경험과 그것에서 비롯된 진술들. 자기가 여자애라는 걸 알고 난 어느 순간부터, 여성으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엄정한 사실을 내면화하는 삶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같은 운명에 자주 처해지는지를.
내가 나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나를 혐오하거나,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마음 깊이 종종 살해해야 한다고, 그러니까 그 지독한 ‘르쌍띠망’(ressentiment)을 경유해야만 독립적인 내가 될 수 있다고 오랫동안 믿어왔다. 그게 아직 너무나 지난한, 무척이나 어려운 ‘여성서사’가 어떤 독자들에게는 납득될 수도 있다고 확신하기 전 내가 가진 문학에 대한 태도였다. 실제의 나는 굳이 자신과 타인을 혐오하지 않고도, 어떤 사람의 감정이나 그의 습관이 하찮다고 애써 생각하지 않고도 내가 느끼는 감정과 나를 둘러싼 사회적 조건들을 잘 설명해낼 수 있었는데도(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한다). “문학을 한다는 건 실패가 예정된 길을 걷는 것인데 감수할 수 있겠어?”라는 질문과 “왜 너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헤어지지 못했어?”라는 질문이 같은 종류의 것으로 느껴질 때, 나는 ‘반박’하지 못했다. 내게는 폭력적으로 느껴지는 질문들을 철수시키고 또다른 질문(back talk)을 던져볼 요량이 없었던 것이다. 그 질문들의 프레임 안에서 나를 이해하도록 애써서 변명했다. 이해받고 싶었기 때문에. 말을 돌려줘야 할 때도 있고, ‘그들이 답할 차례’를 만들어주어야 할 때도 있다는 걸 미처 몰랐다. 이 소설들을 읽으며 다시금 깨닫는다. 권위로 무장한 누군가들의 질문을 반박으로 철회할 필요도 있다는 걸. 어떤 여자애에게는 “왜 거절하지 않았어? 너도 좋았던 거 아니야?”라는 가차없는 질문이 쏟아지고, 어떤 여자에게는 “왜 아이를 낳으려고 하지 않아?”라는 힐난조의 질문이 비수로 꽂힌다. 그럴 때, 당신의 질문이 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의미로 되돌려줄 말을 생각한다. 놀랍게도 ‘ back talk’에 관해 상상하면, 오늘 밤이 새도록 열거해도 모자랄 정도로 다양하다. 돌려줄 말들을 생각하며, 대니엘 래저린이 경청하고 관찰하여 만든 수많은 캐릭터들을 떠올린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배신을 당하고, 상대가 보여주는 애정과 관심에 적극적으로 화답했을 뿐인데 곧장 거절당하고, 정상가족이라는 인류의 허황된 꿈에서 버려져 ‘나만 없었으면 완벽했을 수도 있는’ 가족을 애써 외면하는 여자들. 대니엘 레저린의 장면들, 표정들에는 강렬한 비극도 엄청난 드라마도 없지만 진리에 가까운 이야기가 있다. 당연히 나도 그랬겠지만 어디 가서 말하기 어려웠던 감정들, 그게 바로 진리 아닌가. 뛰어난 수집가 대니엘 래저린의 겸손한 이야기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