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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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경 吳恩京

1992년 광주 출생. 2017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eptb2@naver.com

 

 

 

래핑(wrapping)

 

 

이불이 하얗다 이불이 하얗다 팔을 베고 누워 이불처럼 하얀

벽을 바라본다 길게 자란 머리카락이 눈을 찔러

가렵다 하지만

손댈 수가 없다 천장에

매달린 여자가 돌아서며

발을 젓는다 맨발인데도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하다 여자의 발은 허공에 떠 있다 지워진 얼굴이거나 얼어붙은 시선 같다 원하고 원하던 만남이었으나 시간 계산을 잘못해서

늦어버린 약속처럼 시간을

되돌릴 수가 없다

 

아리에게서 연락이 안 온 지 6개월째다

 

나는 고개를 들어 발치 아래 있는 베란다를 내려다본다 나란한 가로등들…… 거기 있는지 없는지조차 몰랐던

가로등 위로 불이 들어오고 빛의 타래가 이어진다

베란다에서 보이는 밤거리

맞은편 건물과 베란다 창에 비쳐진 내 모습…… 나는 자세를 바꿔 앉는다

텅 빈 이차선 도로 위로

차가 달리는 것 같다 지금 환청을 듣고 있는 것 같다

 

양팔 양다리를 넓게 벌린 여자가

천장에 붙박여 있다 천장에 매달려

침대를 내려다보지만 내 쪽에서는 침대 위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잘 보이지 않는다 여자는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지 못한다

 

회색 현관문

닫힌 철문

사각의 문이 침대를 닫는다 우리 집 분위기가 이상하다 정말

……

정말 모르긴 몰라도 현관문을 열면

현관문이 닫힌다 목적지 없는 외출 나아간다는 거짓 믿음 속에서 복도가 걷는다 복도를 걷는다

 

 

 

산책 소설

 

 

1

 

벤치를 지나 걷는다. 또다른 벤치가 나온다. 내 또래 여자애가 앉아 있다. 여자애는 양쪽 다리를 교차하며 발을 젓는다. 벤치 위에 두 손을 나란히 걸치고 발을 굴린다. 흙이 튄다. 모래가 쌓여갈수록 내 무릎 부근까지 차오른 그림자가 짙어진다.

 

색 바랜 보도블록에는 물기가 맺혀 있다. 외벽이 유리로 되어 빛에 반사되는 건물은 지대가 낮은 곳에 있다. 먹구름 낀 광장인데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도 보인다. 비둘기들이 모이를 쪼아대는 광경은 동상 주위에서 접할 수 있는 흔한 풍경이다.

 

여자애는 내 어깨에 머리가 닿을 만큼 작다. 길게 기른 머리카락이 여자애의 얼굴을 다 덮고 있다. 여자애가 나를 앞장서 간다. 여름용 리넨 셔츠가 펄럭인다. 여자애는 한쪽 어깨에 멘 숄더백을 굳게 쥔다. 손이 미끄러질 만큼 숄더백이 세게 흔들린다.

 

여자애는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회양목 곁으로 녹음이 우거져 있다. 활엽수림이다. 수풀 사이사이를 헤치면 빈터가 나온다. 풀숲이다. 나를 스쳐 지나간 형상이 있다. 흰 천이 창공에 걸려 빛들에 찔린다.

 

 

2

 

여기까지가 상담내용을 바탕으로 내가 쓴 소설이다.

나는 비록 여자애의 과거를 모르고, 생각을 추적할 수도 없지만

다른 이야기는 시간을 보내가며 차츰 써나가면 되는 일이다. 날을 새웠더니 피곤하다.

사무실의 가죽 소파는 지나치게 딱딱하고 한숨 자기에도 불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