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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박래군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 클 2020
현지답사로 선명하게 길어 올린 인권의 발자취
조효제 趙孝濟
성공회대 사회융합자율학부 교수 hyojecho7@gmail.com
가히 여행의 전성시대라 할 만큼 수많은 답사기가 책으로, 기사로 발표되었다. 답사기 장르에는 두 종류가 경합한다. 사람들이 잘 안 가본 국내외 이색적인 장소를 소개하는 류가 있고, 박물관 탐방과 같이 일정한 테마를 중심으로 자신의 여정을 기록하는 예도 있다. 어느 쪽이든 독자에게 새로운 눈을 열어준다.
그러나 이런 글들이 무겁고 심각한 주제를 다루는 경우는 드물다. 과거의 고통을 힘들게 직시하면서 독자의 의식과 양심을 때론 불편하게, 때론 울컥하게 만드는 경우는 더더욱 드물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 인권운동가 박래군의 한국현대사 인권기행』은 답사기의 새로운 유형을 제시한다. 현대 한국의 인권이 만들어진 현장에서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해석이 박래군이라는 인권운동가의 시각으로 생생하게 재현된 비판적 성찰의 기록이다.
이 책이 다루는 공간은 제주 4·3 현장, 용산 전쟁기념관, 소록도, 광주 5·18 현장, 남산 안기부 터, 남영동 대공분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마석 모란공원, 세월호참사 현장 등 전국을 아우른다. 다루는 연대도 한 세기를 뛰어넘는다. 말 그대로 한국 인권의 현대사를 시공간적으로 종횡하면서 기록한 답사 보고서다.
맨 먼저 눈에 띄는 점은 저자의 성실한 집필 자세다. 그저 현장을 방문해서 사람들 만난 이야기를 적당히 풀어놓은 책이 아니다. 참고문헌에서 볼 수 있듯 자료의 꼼꼼한 고증과 철저한 사전연구의 바탕 위에 부지런한 발품이 더해져 완성되었다. 그래서인지 한 꼭지 한 꼭지의 밀도와 점도가 높고 진하다. 입문자에게 한국 인권 현대사 서설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저술이다.
과거의 인권 역사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상기시키는 관점도 높이 살 만하다. 저자는 예컨대 남영동의 고문 취조실을 돌아본 후 이런 일을 단순히 과거지사로만 생각할 순 없다고 경고한다. “지금은 고문이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정치상황이 바뀌고 다시 독재 권력이 들어서게 되면, 고문이 가장 유용한 반정부 활동가들의 신문 방법으로 채택될지 모른다. 유대인의 학살이나 한국전쟁 시기의 끔찍한 학살이 다시 일어나지 말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188면)
이런 통찰이 소중한 것은, 요즘 시간이 갈수록 민주니 인권이니 자유니 하는 것들을 공기 비슷하게 당연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일차적 적은 독재가 아니다. 독재 이전에 방심이 먼저 찾아온다. 우리가 이런 소중한 가치들을 매순간 확인하고 지키려는 의지와 헌신이 없다면 이런 것들은 종이로 만든 호랑이처럼 일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다. 정치철학자 J. S. 밀이 한 말도 있지 않은가. “들판에서 적이 사라지면 파수꾼은 잠이 든다.”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가 인권의 안내서로 특히 유의미한 점은 역사와 사회구조와 국제정세까지 논하면서도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시선을 결코 놓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명망가뿐 아니라 무명 인사들의 발자취까지 세밀하게 묘사하는 대목들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인권에서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를 잘 보여준다. 평생을 인권운동에 투신했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뚜렷이 드러난다.
사람에게만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게 아니다. 역사의 장소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마찬가지다. 주변으로 밀려나고 사람들의 관심에서 잊힌 곳도 저자의 답사 일정에서는 소외되지 않는다. 저자의 시선에서는 학살사건의 현장이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주먹밥을 만들어 날랐던 시장통이나 모두 똑같이 소중한 역사의 좌표요 우리 삶의 현장이다.
인간의 고통과 투쟁과 보통 사람들의 비범한 행동을 아우르는 저자의 시선은, 역으로 떳떳하지 않은 역사에 대한 윤리적인 질타로도 이어진다. 과거 투쟁의 성과를 독점하려 한다든가 정치권 진출의 발판으로만 삼으려 하는 행태들에 대해 불편한 심정을 감추지 않는다. 역사는 소수의 지도자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함께 공유하는’ 공동의 자산이라는 확고한 신념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한국사회의 대표적인 인권운동가 중 한 사람이라는 점을 부정할 이는 없을 것이다. 지난 한 세대 동안 주요한 인권 사건들의 고비에서마다 그가 관여하지 않은 적이 드물다는 사실도 많은 이들이 인정할 것이다. 그런데도 이 책에는 저자 본인의 이야기가 별로 없다. 자기 목소리의 옥타브를 최대한 낮추고 친절한 여행 가이드와 같은 자세를 취함으로써 독자들이 인권 역사의 현장에 곧바로 접근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이런 점도 연륜이 쌓인 인권운동가로서 인간을 대하는 자세가 어떠한지를 짐작하게 한다.
책의 후반부에 가서야 독자들은 저자가 아주 오래전, ‘광주학살 원흉처단’을 외치며 분신으로 생을 마감한 두살 아래 동생을 마석 모란공원에 묻어주면서 가슴으로 한 약속 때문에 오늘날까지 인권운동의 길을 걷게 되었음을 알게 된다. 시인이기도 했던 그의 동생 박래전은 「동화(冬花)」라는 유고시를 남겼는데 그 시의 일부가 묘비에 적혀 있다. “겨울꽃이 되어버린 지금/피기도 전에 시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진정한 향기를 위해 /내 이름은 冬花라고 합니다 /세찬 눈보라만이 몰아치는 /당신들의 나라에서 /그래도 봄을 비틀며 피어나는 꽃입니다”(245면)
그런데 마지막 행의 ‘봄’은 묘비를 만들 때 ‘몸’을 잘못 표기한 것이었다. 저자는 그때부터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도 고치지 않고 30여 년을 지냈다. 사람들은 이 시를 어떻게 읽을지 궁금하다. 몸을 비틀면서 만들려는 봄. 몸과 봄은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 동생의 유작과 형의 해석이 만나 인권의 절창을 뿜어내는 것처럼 들린다.
이 책에서 아쉬운 부분도 있다.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많고, 다수의 사람들이 등장하는데도 색인이 빠져 있다. 중쇄가 나올 때 꼭 들어가면 좋겠다. 저자가 희망하듯이 이 책은 한권으로 끝나선 안 되는 증언록이다. 기억할 것이 많은 우리 인권 역사를 저자만큼 심득하게 해설해줄 사람도 잘 없을 것이기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