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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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세환 姜世煥

1956년 강원도 주문진 출생. 1988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시가 되는 순간』 『시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면벽』 『우연히 지나가는 것』 『앞마당에 그가 머물다 갔다』 『벚꽃의 침묵』 『상계동 11월 은행나무』 등이 있음.

kshpoet@hanmail.net

 

 

 

이런 근현대사

 

 

도봉구 방학천변 흑백사진 같은 중고서점 ‘근현대사’

아무도 찾지 않는 낡은 책을 천장까지 쌓아놓고

다 쌓지 못한 책들은 근현대사 뒷장처럼

문밖으로 툭 삐져나온 채 하루하루 살아가는 근현대사

비록 큰 강은 아니어도 이 하천 얼음장 밑으로

겨울은 가고 또 봄은 오고

 

서점 주인은 근현대사 틈에 쭈그리고 앉아

어느 근현대사의 한 굽이를 혼자 뒤돌아보고 있다

어느 근현대사의 한 고비를 혼자 들여다보고 있다

어떤 근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또 혼자 견디고 있다

 

이 근현대사가 저 근현대사를 들여다보는 것 같은

이 근현대사가 저 근현대사를 뒤돌아보는 것 같은

그러나 아무리 들여다보고 또 뒤돌아보아도

숨 쉴 틈도 없고 큰소리도 한번 치지 못한 이 근현대사

 

어느 나라 근현대사이기에 숨 쉴 틈도 없었을까

어느 나라 민족이기에 큰소리 한번 못 치고 살았을까

어느 나라 국민이기에 이리도 착하고 순하였을까

이젠 좀 덜 착하고 덜 순하게 살면 안 될까

 

조용히 뒤돌아보고 또 뒤돌아보던 당신이야말로

저 근현대사의 맨몸 같은 한 페이지 아니었을까

한몫 챙긴 것도 없고 또 한몫 잃은 것도 없이

내 것 네 것 따지지 않고 하루하루 살면서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했던 당신이야말로

저 근현대사에 기록해야 할 한 페이지 아니었을까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없다는 역사는 또 어느 페이지에 기록

해야 할까—허공계(虛空界)

 

가만, 이 천변 따라 조금 더 올라가면

근현대사의 전신(全身) 거울 같은 한 시인의 문학관1이 있다

 

 

다시, 거울 앞에서

 

 

그곳에 가지 못한 내가

거울 속에 있다

 

그땐 피가 뜨거웠고 눈물도 뜨거웠다

늦은 밤 화장실 변기뚜껑 열어놓고

무슨 이념 같은 변기통을 껴안고

그날 너무 많이 마셨던 술도 토하고

거울 앞에선 부끄러움도 토하고 말았다

 

그때 나는 그곳에 갔어야만 했다

그곳의 친구들은 내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그곳에 가지 못한 내가

아직도 이 거울 속에 있다

 

거울 속의 그가 거울 앞의 나를 데리고

거울 속으로 들어가 그의 옆에 앉혀놓았다

그러나 거울 앞에 있던 내가 돌아서면

거울 속에 있던 그도 말없이 돌아섰다

어느 날 눈물을 닦아도 다시 거울을 닦아도

거울 속의 나는 내가 아니었다

 

지금은 피도 눈물도 간 곳 없는

아주 깨끗한 이 벽 같은 거울 앞에서

나를 찾고 또 찾아보아도 내가 없다

내가 없어졌다

나는 아직도 거울 속에 있는데

거울 앞에 나는 없다

 

 

--

  1. 김수영문학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