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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브뤼노 라투르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 이음 2021
글로벌과 로컬을 넘어, 대지에 소속되기
최은경 崔銀暻
경북대 의과대학 교수 qchoiek@gmail.com
이 책의 한국어판(박범순 옮김) 서문에서 라뚜르(B. Latour)는 팬데믹 시기에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고 적고 있다. 2017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원제(Où atterrir?)가 ‘어디에 착륙할 것인가’에 집중한다면 팬데믹 시기에는 지구와 충돌하지 않는 것이 더욱 절실한 문제가 된다.
이 책은 1990년대 공산주의의 몰락 이후 시작된 새로운 역사—글로벌화, 불평등의 폭증, 기후위기—의 연관성을 다룬다. 이러한 증상 간의 연결고리를 명료하게 포착할 수 있었던 계기는 2016년 영국의 브렉시트(Brexit) 국민투표 가결과 미국 트럼프의 당선이다.
보통 현대 사회의 위기로 글로벌화와 불평등의 폭증이 거론된다. 라뚜르는 이것을 기후위기 문제와 함께 사유하며, 신기후체제(New Climatic Regime)의 세가지 현상이자 동일한 역사적 상황의 증상이라고 본다. 라뚜르에게 글로벌화와 불평등의 폭증이라는 ‘인간사’의 문제는 기후위기와 떨어져 있지 않다. 이때 기후는 단지 대기상태라는 자연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기후는 ‘넓은 의미의 인간과 인간 삶의 물질적 조건 사이의 관계’이다.
이같은 ‘기후체제’ 속에서 기후를 사유하기 위해서 저자는 ‘임계영역’이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임계영역’은 고체 지구와 유체 사이의 역동적인 경계 영역으로서 자연 서식처를 조절하는 근지표 환경을 의미한다. 임계영역 개념은 인간의 객체, 대상, 배경으로서의 지구가 아니라 생명이 유지되기 위해 형성된 생물막(biofilm)으로서의 지구를 드러낸다. 이 영역에서 과학 지식은 중립적이거나 권위에 찬 것이 될 수 없으며 모든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들이 하나하나 해석의 갈등을 겪는 ‘과정으로서의 자연’이 된다. 임계영역 개념은 신기후체제 속의 ‘기후’, 그리고 글로벌화, 불평등의 폭증, 기후위기라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 ‘대지’(Terrestrial)와 연결된다. 즉 대지를 이들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된 행위자로 호명하는 것이다.
트럼프 당선과 글로벌화, 불평등의 폭증, 그리고 대지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행성의 글로벌화는 영토의 박탈을 낳는다. 그리고 이주의 증가와 이주의 위기는 새로운 보편성, ‘지반이 무너지는 느낌’의 보편성을 낳는다. 영토를 수호하라는 절박한 감정은 포퓰리즘의 발흥으로 이어진다. 근대화의 두가지 운동—어떤 땅(근대 국가)에 기반을 두는 것과 글로벌 세계에 접근할 기회를 얻는 것— 사이의 모순이 임계점에 달하고 있다. 특히 지구와의 관계에서 더이상 지구는 개척자(인간)와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그러나 엘리트들은 이 한계를 다른 방식으로 풀어낸다. 기후위기를 부정하며 가능한 한 빠르게 연대의 부담을 없애버린다. 트럼프의 당선과 빠리기후협약 탈퇴는 더이상 하나의 지구를 인류 전체와 공유하지 않겠다는 천명이며 위기는 오로지 타인의 것이라는 선언이다.
라뚜르는 트럼프 당선과 브렉시트로 드러난 포퓰리즘이 현재의 세계를 거부하며 외계로의 전진을 추동하는 하나의 유인자라면, 다른 한편의 유인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지구, 즉 대지라고 주장한다. 글로벌화나 로컬은 지구의 안정성을 기반으로 하나의 공간을 점유하기 위한 싸움이었으나, 인류세 시대에 지구는 더이상 인간의 경계 외부에 틀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지구는 스스로의 행위성을 가지고 참여한다. 글로벌 세계에서 외부 영토로의 이주는 위기를 증폭시켰으며, 더이상의 미개척지는 남아 있지 않다. 기후위기 시대에 이제 인류는 착륙할 만한 대지의 세계를 찾아야 한다. 대지는 글로벌의 무한성이 아닌, 로컬의 협소함과 폐쇄성이 아닌, 국경의 정체성을 초월하면서도 소속감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머나먼 외부의 관점에서 지구를 파악하는 무관심의 과학이 아닌, 지면에 발 디뎌 내부 생성의 운동을 살피는 과학이 있어야 한다.
신기후체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라뚜르가 주장하는 것은 다각적인 지구와 영토에 대한 대안적 서술이다. 근대화 시대의 빛나고 자유로운 글로벌과 투박하며 안정감을 주는 로컬 사이의 상충을 넘어 땅에도 근거를 두고 세계에도 근거를 두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거주하는 공간에서 대지를 포함한 행위자들의 리스트를 만들고 이들에게 기대어 사는 법을 익혀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작업은 ‘홈랜드’(homeland)를 실질적인 대지의 것으로 재사유하는 작업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 대안의 모델과 역할자로 유럽을 지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유럽이 자민족중심주의의 주권 모델을 넘어서 성찰적 근대화의 책임을 져야 하며, 글로벌화와 제국주의에 대한 성찰, 환경파괴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역사에 다시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지나친 유럽중심주의로 독해될 수 있다. 만약 유럽이 과거에 근대화의 축을 끝까지 가보았기 때문에 회귀, 반성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이는 또다른 패권이 될 것이다. 다행히 현재로서 라뚜르의 제안은 제국주의 역사와 같은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반성으로 새로운 역사를 서술하자는 제안에 가까운 것처럼 여겨진다.
코로나 팬데믹은 바이러스와 같은 비인간 개체들이 얼마나 대지의 것이자 인간 사회에 개입하는 행위자인지를 잘 보여준다. 자연은 더이상 인간 사회의 배경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스스로 글로벌화함과 동시에 인간의 공간을 락다운(lockdown)시킨다. 바이러스로부터 자유로운 공간, 바이러스가 없는 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기후위기와 팬데믹 시기, 지구와 충돌하지 않기 위해서는 인간과 비인간의 공통의 세계에 대한 인식의 지평 확대와 재사유가 반드시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