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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규리 李珪里
1955년 문경 출생. 1994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앤디 워홀의 생각』 『뒷모습』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당신은 첫눈입니까』 등이 있음.
vora2234@hanmail.net
제라늄
안에서는 밖을 생각하고 밖에서는 먼 곳을 더듬고 있으니
나는 당신을 모르는 게 맞습니다
비 맞으면서 아이는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어요
약속이라고,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고
물은 비를 동일하게 생각하지 않나봐요
그런 은유라면
나는 당신을 몰랐다는 게 맞습니다
모르는 쪽으로 맘껏 가던 것들
밖이라는 원망
밖이라는 새소리
밖이라는 아집
밖이라는 강물
조금 먼저 당신을 놓아주었다면 덜 창피했을까요
비참의 자리에 대신 꽃을 둡니다
제라늄이 창가를 만들었다는 거
창가는 이유가 놓이는 곳이라는 거
말 안 해도 지키는 걸 약속이라 하지요
늦었지만 저녁의 냄새를 맡을 수 있게 되었으니
저녁에게 이르도록 하겠어요
여름, 비, 안개, 살냄새
화분을 들이며 덧문을 닫는 시간에 잠시 당신을 생각합니다
흔들림도 이젠 꿈인데
닫아두어도 남는 마음이란 게 뭐라고
꽃은 붉고
비 맞는 화분에 물도 주면서 말입니다
너의 노래
지금까지 열었던 건 무슨 꽃입니까
지금까지 흘렀던 건 무슨 물결입니까
흘러간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흘러간
물무늬
물거품
물망초
다시 못 볼 것처럼
입이 바싹 말랐어요
멀다고 다 먼 게 아니야, 이런 따위로 무심히 둔
A와
E와
G와……
제 목소리로 피어 있었다면 밤이라도 불렀을 텐데
듣지 못했을 리 없는데
성수동 오르는 길이거나 송추계곡 또는 씨네큐브 뒷길에서 멈추었던 밤에도
진심을 미루어오다가
어느 날 죽은 이름으로 도착했을 때
아니지? 너 아니지?
꽉 잡고 있던 모래는 빈손의 습성을 알아요 도리 없이
흘러가는 것
빠져 달아나는 것
바닥을 치며 울지 마 울지 마 울지도 마
남은 일은 입안에 모래를 가득 무는 일
흘러간 사람이 노래가 되었다는 전설과
모든 노래는 흘러간 노래라는 풍문은 맞는 말인가
털어도 털리지 않는 손금에 죽은 너를 넣을게요
낮과 밤을 맴돌며
너의 노래는 회복할 수 있을까요
말할 수 없게
돌아간 이름들이 그립다는 겁니다
미안하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