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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민하 李旻河
2000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환상수족』 『음악처럼 스캔들처럼』 『모조 숲』 『세상의 모든 비밀』 『미기후』 등이 있음.
poemian25@hanmail.net
내가 살았던 의자
지우고 싶은 이름이 있는데
칠판엔 외국어만 가득했다
휴먼이라든지 피스라든지 프렌즈 같은 것
지우개로 마음을 문지르다가
어두운 교실에서 아침을 기다렸다
가지런히 책상 줄을 맞추고
조용히, 그러니까 죽은 듯이 조용히 엎드려
열심히 필기를 하는데
아이들은 모두 입을 벌리고 있었다
웃지도 않고 하품을 하지도 않고 내 옆구리를 쿡, 찌르지도 않고
나누고 싶은 비밀이 있는데
복창 소리가 너무 커서 조그만 글자들을 삼켜버렸다
첫 키스랄지 불치병이랄지 빨간 피로 꾹꾹 눌러쓴 이름들
피만 보면 날름거리는 체육의 혀를 끊을 수 없어서
생리혈을 먼저 끊었다
밝히지 못한 쓰레기가 있는데
짝꿍 도시락에 압정을 넣은 아이도 나는 알고 있는데
선생님은 출근도 안 했다
양호실에 짝꿍을 데려다주고 학교를 나왔다
얼마나 오래 걸어 나왔는지
교문 밖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하얀 달빛 아래서
토하고 싶은 용서가 있는데
양치기 소년들은 오래전 막차를 타고 귀가했다
행인에게 물어보니 옛날이야기라고 했다
텅 빈 운동장을 다시 가로질렀다
두고 온 일기장이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손에는 열쇠를 쥐고 있었다
모두들 열쇠를 쥐고 떠났을까
아이들의 수만큼 각자의 교실이 있는 것일까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교탁 아래서
짝꿍이 혼자 남아 속삭였다
아이들이 흘리고 간 이름표를 줍고 있는데
내일 당번은 누구지?
아무 말 없이 나는 또 검은 칠판을 지웠다
내가 죽었던 의자
부르고 싶은 이름이 있는데
친구들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교복에 달린 단추처럼
눈 코 입의 개수를 맞춰
단단하게 꿰매진 고요한 표정이었다
이웃이라든지 부모라든지 형제자매 같은 것
가까이, 그러니까 꿈을 꾸듯이 가까이 다가가
열심히 입을 벌렸는데
아이들은 모두 필기를 하고 있었다
놀라지도 않고 귀를 막지도 않고 집게손가락으로 쉿, 입술을 누르지도 않고
종이 울렸는데 아무도 가방을 싸지 않았다
떡볶이를 먹으러 갔는데 분식점이 비어 있었다
낡은 벽엔 낙서가 어제 새긴 듯 선명했다
영원이랄지 하트랄지 흔한 여자애 이름들
그런데 왜 아무도 없는 걸까
주인아주머니에게 물어보니 모두들 수학여행을 떠났다고 했다
폐교라고도 했다
텅 빈 운동장을 다시 가로질렀다
풀어놓은 손목시계라도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복도 창문에 붙어 아이들이 까마득히 내려다보았다 나비 같은 손을 흔들 때마다
흰 꽃잎들이 내 머리 위로 떨어졌다
녹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고
얼마나 멀리서 떨어져 내리는지
흰 꽃잎들은 비가 되었다가 눈이 되었다가
고드름을 머리에 뒤집어쓴 채
나는 계단을 산꼭대기처럼 올라갔다
어두워진 복도를 지나
뒷문을 몰래 열었더니 아이들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소리가 났는지 아이들이 모두 뒤돌아보았다
나는 맨 뒷자리에 앉았다
아이들이 나직이 웅성거렸다
나도 뒤를 돌아보고 싶지만
다음 술래는 누구지?
나도 모르게 나는 또 두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