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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장욱 李章旭
199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내 잠 속의 모래산』 『정오의 희망곡』 『생년월일』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동물입니다 무엇일까요』 등이 있음.
oblako@hanmail.net
적
진정한 적은 내 안에 있다……라고는 말하지 말아요.
왜냐하면 그건 신비로운 말일 뿐만 아니라
바보 같은 말이기 때문에
한때는 바보처럼 좋아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지금은
사람이 아니다. 그 새끼는
인간도 아니야.
적과 동지를 나누는 것만이 정치적인 것이다……
라고 말한 파시스트가 있었지.
그이는 진정한 철학자였어.
오늘도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림자를 생산하고
어제를 생산하고 또 사악한
적을
나는 당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림자처럼 나를 미행하는 분이시여, 등 뒤의 악령이시여, 나의 아름다운
피조물이시여,
당신이 나에게 삶의 의미를 준다.
나에게 의욕을 준다.
나를 재구성한다.
당신이 그러하다는 것에 대해 당신은 아무런 책임이 없으며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창밖의 하늘을 보아요. 불안정한 대기와 함께 다가오는
구름에 가까운
저 전체주의적 크리처들을
눈앞에 보이는 것을 향해 미친 듯이 칼을 휘두를 때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라고 야훼는 말씀하셨지.
우리가 심연을 바라보면 심연도
우리를 바라보듯이
친구여, 우리는 피를 흘리며
헤어집시다. 먼 곳에서
서로의 안부를 묻기로 해요. 언젠가는 간결한
부고를 전해주어요.
너와 나를 구분할 수 없는 심연에서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농담
후회가 전화를 걸어와서 같이 밥을 먹자고 했다. 나는 놀라서
후회를 만나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고 함께 산책을 했는데 후회가
자꾸 이상한 농담을 해서 나는 말했다. 이를 덜덜 떨며 말했다. 당신이…… 당신이 그런 농담을 하다니……
나는 압력솥 안의 쌀알처럼 들끓었는데 창밖의 태풍인 듯 휘몰아쳤는데
세월이 흐르자 흰 그릇에 담긴 밥처럼
맑은 밤하늘처럼
평안해졌지.
밤하늘에는 별이 많다네. 나는 후회가 한 농담이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그건 아마도 눈 내리는 밤의 고독한 사람에 대한 농담이었을 것이다. 매우 우아하고 아름다운 농담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그토록……
십년 이십년 삼십년이 지난 뒤에 나는
십년 전 이십년 전 삼십년 전으로 돌아가서 나는
후회를 계획적으로 외면한 뒤에 혼자
그리워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는 후회가
누구인지도 몰랐네.
나는 노인이 되어 생각한다. 눈 내리는 밤의 고독한 사람에게는 후회가 없을 거라고
밤하늘처럼
기도처럼
후회가 없을 거라고
백반집에 앉아 텔레비전을 바라보며 나는 혼자 밥을 먹었다.
눈 내리는 밤에 혼자 밥을 먹었다.
밥을 먹다가
후회가 받지 않기를 바라며 전화를 걸었다.
물어보기 위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슬쩍 물어보기 위해서
그때 그 농담이 무엇이었느냐고
대체 어떤 농담이었는데 지금 내가
이토록 쓸쓸한 것이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