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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안미린 安美鱗
1980년 서울 출생. 2012년 『세계의문학』으로 등단.
시집 『빛이 아닌 결론을 찢는』 『눈부신 디테일의 유령론』 등이 있음.
moonbow909@gmail.com
영원 해변
무수한 모래의 모음 속에 서 있다
두 손은 물결 소리를 들려주면서 길러온 식물을 들고 있다
올여름 바다와 호수, 차가운 물이 고여 있는 욕조에 식물을 데리고 다녔다
너는 식물이 갈 수 없는 길을 생각하면서 그 일을 했다
……
이따금 물을 마시다 만 컵에 절화를 꽂고 외국 동전을 두어개 담가두었다
“가보지 않았던 외국의 동전이 절화의 수명을 늘려준대요”
어디서 들었을까
투명한 목소리의 톤을 잊을 수가 없어
너는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결 같은 톤을 따라서 움직였다
……
지난날 흐르는 분수대에 동전을 던진 후 물속에 잠긴 다른 동전을 들고 온 적이 있고
그 대신 아무 소원도 빌지 않았을 때
이상할 만큼 이루어지는 여정이 있었고
돌고 돌아 돌아온 집에서 떨어져 구르는 동전은 모르는 국가의 것이었다
동전의 성분은 꽃을 하루이틀 더 보게 했고
꽃잎은 한번도 본 적 없는 색감이었으며
너는 그 순간의 수행적인 기분에 휩싸였다
……
그후 해변에 박힌 뿌리식물을 보았고
식물은 영원의 일부분인 것처럼 부드럽고 건조하게 파묻혀 있었고, 너는 아주 긴 주소를 짓듯이
긴 주소 위에 집을 짓듯이
끝없는 모래에 발목을 잠그고
가건축을 했다
……
이윽고 여기가 어디인지 길고 긴 주소를 읽어주는 물결이었다
“어떤 식물의 하얀 뿌리는 버려진 백구처럼 집을 찾아오기도 한대요”
식물이 갈 수 없는 길을 걸어가면서 너는 지울 수 없는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빈집에 두고 온 식물은 영원 직전까지 버티기도 하면서
물결 소리를 듣고 자란 고요함으로 푸르거나 흐르거나 파고드는 중이었다
안개 파헤치기
어느 밤 얼음에 배어드는 안개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안개를 파헤치는 일과 얼음을 깨뜨리는 일이 무관하지 않게 흘러갔다
안개 속에서 하얀 꽃을 꺾는 일과, 오랜 거북의 등껍질에서
하트 형태를 찾아
흰색 칠을 하는 일
흰 꽃과 흰 칠이 밤공기에 마르는
동시적인 시간이 지났다
거북은 오래오래 흰 하트를 얹고 가고
마른 꽃은 시간을 끌지 않고 영원 형태에서 부스러졌다
그 끝에 남겨진 것은
어두운 고요함에 머무는 감정의 경력
마른 꽃에 베이는 감정은 이미 새로운 것이었다
깨뜨린 얼음이 기쁨의 모서리를 놓치듯 흘러내렸다
차가운 이야기의 기억들이
희고 섬세한 사랑을 시작하려고 했다
안개와 생각이 걷히기 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