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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조온윤 曺溫潤
1993년 광주 출생. 2019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햇볕 쬐기』 등이 있음.
onewnx@naver.com
생각하는 문진
찬 바람이 책장을 넘기네
열린 창으로 네가 바깥을 보고 있었어
나보다 몇배는 키가 커서 난간에 팔을 걸친 채로
무의미하게 영혼을 한모금씩 소모하듯
날숨을 허공으로 흘려보내고 있었어
네가 무얼 보는지 궁금해서 너의 다리 사이로
창살 사이로 머리를 집어넣었어
맞은편 아파트 동의 불 꺼진 복도들만 보였지
읽을 수 없게끔 검정으로 죽죽 그어버린 줄처럼
실은 네 눈이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았어
그때 너는 네 몸에 비해 지나치게 가벼워 보였어
너덜거리는 너의 영혼이 허공으로 날아갈까봐
나는 목 놓아 울었어
이봐, 나를 보라고
치렁치렁한 외투와 모자를 벗어 조그만 못에 걸어놓듯
필요하다면 이 작은 내게로 시선을 걸쳐두라고
슬픔의 냄새가 밴 네 품이 썩 편안하지만은 않지만
아무렴 어때?
네가 몸을 돌려 이윽고 나를 내려다보았을 때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눈높이까지 나를 들어 올렸을 때
내가 너의 누름돌이라는 걸 알았어
너는 홀연 날아가지 않기 위해 나를 데려왔구나
매일 밥을 먹으며 튼튼하고 무거운 몸을 가지자
그리고 언젠가 눈높이만큼 자란 내가 창가에 다가가
네 어깨를 지그시 누른다면
나눠줄 수 있겠니?
네가 읽는 책에 어떤 절망이 쓰여 있는지
네가 있는 세상에 어떤 절망이 휘날리고 있는지
우리는 우리가 끝나지 않는 장면을 펼쳐두자
귀퉁이에 가만히 손가락을 얹고
같은 쪽을 오래도록 바라보자
육면체의 시간
상자 모양 세상에 살고 있어
내면이 좁아서 자꾸 정수리를 부딪치게 돼
철창 밖으로 한가닥 삐져나온
불면하는 기린의 목처럼
새벽어둠을 멀뚱히 두리번거리다가
굼뜬 초침 소리를 확인하곤 다시 몸을 웅크려
잠의 뚜껑을 닫고
내일이 나를 좋은 곳에 적재해주길 소원하지
상자가 덜컥이며 옮겨지고 있어
지하를 향해 꺼지는 엘리베이터인 걸까?
도착 지점을 알 수 없다는 불안이
어두운 비상구 계단을 키득키득 뛰어다니며
층마다 버튼을 눌러놓고 있어
문이 닫혔다가 열릴 때마다
내 몸의 고도는 달라져 있어
사랑에 안긴 어깨가 상온 속 과일처럼 물러지다가도
인양할 수조차 없는 심연으로 두 발이
컴컴하게 얼어버리기도 해
이 밀폐 안에 나 말고도 사람이 있을까 싶어
상자를 흔들면 내용물을 알지도 모르겠다고
내 몸이 울리도록 제자리뛰기를 할 때
누군가 상자를 쥐고 삶을 마구 흔들 때
그 누구도 숨 가쁘지 않을 리가 없어
상자 모양의 세상은 여전히 비좁고, 외로워
꿈의 하강을 위해 스르르 닫히는 눈꺼풀 사이로
자동으로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같이 갑시다, 하는 말을
우산대처럼 불쑥 끼워 넣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다가올 것 같은 기분을 바라보고 있어
열림 버튼을 오래 누르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