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시
김소연 金素延
1967년 경북 경주 출생. 1993년 『현대시사상』으로 등단.
시집 『극에 달하다』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눈물이라는 뼈』 『수학자의 아침』 『i에게』 등이 있음.
catjuice@empas.com
구완
열이 펄펄 끓는 너의 몸을
너에게 배운 바대로
젖은 수건으로 닦아주느라
밤을 새운다
나는 가끔 시간을 추월한다
너무 느린 것은 빠른 것을 이따금 능멸하는 능력이 있다
마룻바닥처럼
납작하게 누워서
바퀴벌레처럼 어수선히 돌아다니는 추억을 노려보다
저걸 어떻게 죽여버리지 한다
추억을 미래에서 미리 가져와
더 풀어놓기도 한다
능멸하는 마음은 굶주렸을 때에 유독 유능해진다
피부에 발라진 얇은 물기가
체온을 빼앗는다는 걸
너는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열이 날 때에 네가 그렇게 해주었던 걸
상기하는 마음으로
밤을 새운다
앙상한 너의 몸을
녹여 없앨 수 있을 것 같다
너는 마침내 녹을 거야
증발할 거야
갈망하던 바대로
갈망하던 바대로
창문을 열면
미쳐 날뛰는 바람이 커튼을 밀어내고
펼쳐둔 책을 휘뜩휘뜩 넘기고
빗방울이 순식간에 들이치고
뒤뜰 어딘가에 텅 빈 양동이가
우당탕탕 보기 좋게 굴러다니고
다음 날이 태연하게 나타난다
믿을 수 없을 만치 고요해진 채로
정지된 모든 사물의 모서리에 햇빛이 맺힌 채로
우리는 새로 태어난 것 같다
어제와 오늘
사이에 유격이 클 때
꿈에 깃들지 못한 채로 내 주변을 맴돌던 악몽이
눈뜬 아침을 가엾게 내려다볼 때
시간으로부터 호위를 받을 수 있다
시간의 흐름만으로도 가능한 무엇이 있다는 것
참 좋구나
우리의
허약함을 아둔함을 황폐함을
같은 오류를 반복하는 형편없는 시간을
이 드넓은 햇빛이
말없이 한없이
북돋는다
얼굴이라도 보고 와야겠어
얼굴, 두려움이 토끼처럼 뛰어다니는 얼굴
눈길이 너무 멀리 가버려 눈빛을 가질 수 없는
얼굴, 걱정밖에 안 남은 얼굴, 천근만근 무거운 얼굴, 모가지가 두개는 되어야
겨우 버틸 수 있는 얼굴, 타인에게도 슬픔이 있다는 것을 다 잊어버린
얼굴, 기억하던 그 얼굴은 간데없고 기억해주길 바라는 어리광이 서린 얼굴
침대에 나뒹구는 얼굴, 솜으로 채워진 얼굴, 얼굴을 베고 잠든
베개, 자그마한 구명보트가
이마에 정박해 있는 얼굴, 두 손을 가슴에 올리고 심장의 박동을 느낄 때
오늘도 실패했구나 생각하며 경련이 이는
얼굴, 빗물받이처럼 두 귀가
쇠구슬 같은 눈물을 모으는
얼굴, 보고 있는 것들이 모조리 통과되고
있는 얼굴, 골똘히 잠든 얼굴, 약간의 근육운동이 약간의 희로애락이
미미하게 정차하다 떠나는
얼굴, 뒤통수 뒤로 숨는 얼굴
머리카락을 꼭 붙들고 놓지 않는 얼굴
입을 약간 벌려 말을 거는 얼굴에게
얼굴을 갖다대고 귀를 기울이면
더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숨을 뱉는
얼굴, 맹세를 놓아줌으로써
꿈에서 깨어남으로써
더 깊은 잠으로 빠져드는 얼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