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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박철 朴哲
1987년 『창비 1987』에 「김포」 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 『김포행 막차』 『밤거리의 갑과 을』 『새의 전부』 『너무 멀리 걸어왔다』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험준한 사랑』 『불을 지펴야겠다』 『작은 산』 『없는 영원에도 끝은 있으니』 『새를 따라서』 등이 있음.
bch2475@nate.com
가을의 전설
이제 맑은 하늘을 보면
뭐라도 내주고 싶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노 젓듯 흔드는 버드나무 아래
오랜 친구와 모처럼 강둑에 앉았다
웬 북한 영상을 보았다는 친구가
함경남도 신흥 천불산에 있는
이천년 된 은행나무 얘기를 한다
은행나무는 암수가 있어야 열매를 맺는 법인데
혼자 사는 천불산 암은행나무를 가리키며
안내원 주민이 이러더라는 것이다
보시다시피 여기 주변엔 은행나무가 없습네다
함흥에 오래된 수은행나무가 하나 있습네다
그래서 우리는 아 이분이 백리 밖
그 함흥 은행나무와 연애질을 해서 열매를 맺는구나
그렇게 생각합네다
예쁜 안내원 입에서 그러더라는 것이다
그 얘기를 웃으며 주고받자니
정말 그럴까 싶기도 하고
거기도 사람이 있는가보다 그러다가
이백년도 못 사는 우리는 뭔가 싶기도 하고
이 맑은 하늘 아래
강가에나 나앉은 처지가 또한 우습기도 하고
아직은 조금 더 사랑해야 할 텐데
하늘이 저리 푸르고 강물이 다정해도
내줄 것을 마땅히 찾지 못했다
이제는 강 건너만 보아도 아득한 나이
가보지 못할 천불산 얘기에 울화가 치밀지만
그래도 맑은 강물이 멀리 흘러갈 때는
분명 오늘은 운수 좋은 날
빈손이라도 꼭 쥐고 일어선다
오늘은 기분 좋은 날
사랑 얘기도 듣고 많은 것을 보고
무언가를 받아들고
처음 가는 길인 양 마을 안으로 돌아선다
있는 힘
대형쇼핑센터에 어둠이 밀려오고
한 사람이 무언가를 밀고 있었다
있는 힘을 다하여
한줄에 서른개 열다섯줄을
어둠을 등에 지고 밀고 있었다
가득한 물건 가득한 사람
가득한 지구를 위하여
빈 수레를 밀고 있었다
아침을 향하여
경건하고 진지하게 밀고 있었다
발끝을 세우고 두 손을 움켜쥐고
몸통으로 비스듬히 일직선으로
밑을 바라보며 밀고 있었다
대지란 이런 것이다
침묵이란 이런 것이다
민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어떤 주장도 외침도 없이
그냥 그래야 하는 것으로
어둠 속에서
모두가 돌아간 곳에서
있는 힘을 다하여
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