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대담
원(願)은 크게, 길은 현실에서
한기욱 韓基煜
문학평론가, 『창작과비평』 편집고문. 저서 『문학의 새로움은 어디서 오는가』 『문학의 열린 길』, 공저서 『21세기의 한반도 구상』 『영미문학의 길잡이』, 역서 『필경사 바틀비』 등이 있음.
이남주 李南周
정치학자, 『창작과비평』 편집주간. 성공회대 중어중국학과 교수, 정치학. 저서 『중국 시민사회의 형성과 특징』, 공저서 『변혁적 중도론』 『백년의 변혁』, 편서 『이중과제론』 등이 있음.
김영선 金永善
창비 계간지출판부 편집자.
김영선(사회) 계간 『창작과비평』이 통권 200호를 맞이했습니다. 1966년 창간 이래 판매 금지, 출판사 등록 취소 등으로 발간 자체가 어려웠던 시기를 제외하면 매 계절 거르지 않고 독자들을 만나온 끝에 어느덧 200번째 계절을 맞았는데요. 200호를 기념하여 이번호는 특별한 대담으로 책머리를 열고자 합니다. 『창작과비평』의 편집주간인 이남주 선생님과 편집주간을 역임하고 고문으로 계신 한기욱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저는 창비 계간지출판부의 편집자 김영선입니다. 대담이라 하면 보통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나누는 대화인데 오늘은 제가 말석에서 두분께 질문을 드리는 역할을 맡았어요. 우선 인사를 부탁드립니다.
한기욱 안녕하세요, 문학평론 하는 한기욱입니다. 1998년 겨울에 『창작과비평』 편집위원진에 합류해서 2021년 말 주간직에서 퇴임하고 현재는 편집고문으로 있습니다. 올봄에는 오래 봉직한 인제대학교에서도 퇴임해 조금은 여유있게 지내고 있습니다.
이남주 안녕하세요, 이남주입니다. 2022년부터 『창작과비평』 편집주간을 맡고 있고, 정치학을 전공하고 성공회대 중어중국학과 교수로 있고요. 오늘 권두대담을 통해 한기욱 선생님 모시고 이야기 나누게 되어 반갑습니다.
한국사회 진단, 이것은 어떤 위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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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선 200호를 맞으며 지난 기념호들이 어떠했는지 돌아보았는데요. 계간 ‘창비’(이하 창비)의 역사는 한국 현대사의 굴곡과 떼려야 뗄 수 없고, 비교적 최근의 기념호들에서도 시대현실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 역력하더라고요. 가령 100호(1998년 여름호) 때는 IMF사태, 150호(2010년 겨울호) 당시에는 이명박정권하에서 벌어진 민주주의의 심각한 후퇴가 있었습니다. 기념호를 자축하면서 마냥 즐거워할 수만은 없다는 점은 200호를 맞은 이때도 마찬가지 같은데, 두분은 오늘날의 현실을 어떻게 진단하시는지요?
이남주 현재 상황이 여러 면에서 우려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200호 발간이 역사적 의미가 크고 축하할 만한 일이라는 점을 먼저 말하고 싶습니다. 계간지는 25년마다 백호를 기념하게 되지만 창비가 통권 100호까지 오는 데는 32년이 걸렸고, 이후로는 다행히 정치적 개입 때문에 발간이 중단되는 일은 없었어요. 그사이 정치적 민주화가 어느정도 실현됐고 그 과정에서 창비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한국사회의 상황은 더 급변했다고 볼 수 있는데 IMF사태, 6·15남북정상회담, 지구화의 흐름과 한국의 국제적 지위 상승, 그와 맞물려 심화된 사회적 양극화, 촛불대항쟁에 기반한 사회적 변화, 코로나19 팬데믹 등 굵직한 일만 추려보아도 간단치 않아요. 이 과정에서 한국사회가 쉽지 않은 도전에 직면하기도 했지만 역사적 질곡을 타파하며 한걸음 앞으로 전진해왔다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지금의 상황 역시 단순히 퇴행으로만 규정할 일은 아니고, 한국사회가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겪는 문제로 보아야겠습니다. 특히 현 정부가 퇴행적인 행태를 반복하는 근본원인에는 촛불혁명으로 높아진 시민의 주체성과 변화 요구에 대한 기득권 세력의 말기적 반발이 있어요. 이러한 반발을 제압하고 역사를 새로운 국면으로 이끌어갈 수 있도록 우리의 주체적 역량을 성숙시켜나가는 게 중요하리라 봅니다.
한기욱 저도 대체로 동의하는 바이지만, 자본주의 세계질서가 재편되는 상황에서 남북관계와 주변국과의 외교를 지혜롭게 풀어야 할 시기에 윤석열정부가 들어선 건 뼈아픕니다. 좀더 우려스러운 점은 그사이에 언론과 학계가 상당 부분 기득권화되면서 현 사태의 진실이 시민들한테 제대로 가닿기 어렵다는 거예요. 노태우정부의 북방외교, 김대중정부의 햇볕정책과 6자회담, 노무현정부의—실현되지는 못했지만—‘동북아 균형자론’ 등은 모두 강국들 사이에서 외교적 균형을 유지하려는 노력이었는데 윤석열정부는 지나치게 한미일 동맹 결성으로만 기울어져 있습니다. 오늘(2023.5.7) 한일정상회담이 있는데 어떤 이야기가 오갈지 벌써 마음이 무거워요.
이남주 미중 전략경쟁의 심화와 국제사회의 균열 속에서 윤석열정부가 갈등과 대립에 편승하고 그것을 격화시킨다는 점은 분명해 보여요. 다만 여기서도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문제 역시 한국사회의 변화 속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윤석열정부의 등장이 촛불혁명의 ‘변칙적 사건’이고, 촛불혁명은 계속 진행 중이며 진행되어야 한다는 관점으로 접근할 때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변화를 만드는 동력을 인식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거죠. 박근혜정부 시기를 예로 들면, 촛불대항쟁이 출현하기까지 중요한 변곡점 중 하나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였습니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역사를 바로 배워야 한다며 ‘혼(魂)의 정상화’ 같은 발언을 했죠. 그게 당장의 정치적 국면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진 않았지만 사람들에게 이게 뭐지, 이건 아닌데 하는 느낌을 준 건 분명하거든요. 저는 지금도 시민들이 현 정부의 문제점을 상당히 폭넓게 인지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것을 어떻게 직접적인 움직임으로 만들지가 과제이지만, 많은 이가 심각성에 공감하고 있다는 점에서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고 생각해요.
한기욱 얼마 전에 이남주 주간이 중국의 변화에 대한 글(「제20차 당대회 이후 중국의 변화」, 황해문화 2023년 봄호)을 쓰기도 했는데, 지금은 중국과 미국이 양극체제로 가느냐 아니면 브릭스(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프리카 공화국)와 유럽연합을 포함하는 다극체제로 갈 것인가 하는 판단도 중요해 보입니다. 이에 대해선 어떻게 보고 계신가요?
이남주 『창작과비평』 2021년 봄호 특집 글(「미중 전략경쟁, 어디로 가는가」)과 같은 판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미소 냉전 시기처럼 주로 이념적·군사적으로 대결하는 게 아니라, 경제·기술을 포함한 다양한 영역에서의 장기적인 저강도 복합경쟁이 될 거라고 봐요. 물론 군사적 충돌 가능성도 있지만, 그보다는 사회의 회복력(resilience)이나 기술과 같은 다른 요소가 경쟁을 좌우할 확률이 높습니다. 한국에서는 여러 사회적 한계를 들어 중국이 경쟁에서 쉽게 탈락하리라 보는 시각이 많은데, 사실 중국은 장기 경쟁을 견딜 만한 상당한 힘을 갖추고 있어요. 얼마 전 그레이엄 앨리슨(Graham Allison) 하바드대 교수도 중국의 성장이 당분간 계속될 거라고 강조했는데(“The Inconvenient Truth About U.S. Growth,” Barron’s 2023.4.28) 이러한 상황을 균형적으로 판단해야지 미국에만 매달리면 잘못된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기욱 아시아는 물론 중동·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도 중국의 힘이 세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중국의 중재로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이 외교관계를 정상화하기도 했죠. 우끄라이나전쟁을 거치는 동안 중국은 경제협력 범위와 위안화 결제를 대폭 늘리는 등 국제관계에서 미국을 위협하는 강자로 등장하고 있어요. 이런 상황에서 윤석열정부가 한미일 삼각동맹을 기정사실화하면서 미국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 굉장히 위험해 보입니다. 그런데도 제대로 비판하는 언론이 너무 적고, 정치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남주 미중 경쟁이 장기간 지속되는 과정에서 국면은 계속 교차할 거예요. 때로는 미국, 때로는 중국의 영향력이 더 커 보일 텐데 어느 한쪽이 세계질서를 주도할 것이라는 전제로 상황을 보아선 안 되죠. 독자적·자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하고, 우리의 지향을 뒷받침할 능력을 갖춰가는 일도 중요합니다.
대전환의 길
이렇게 걸어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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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선 그동안 창비는 ‘대전환’을 주요 화두로 삼아왔습니다. 2016년 말부터 시작된 촛불혁명으로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한 것은 그야말로 거대한 돌파였고, 대전환을 향한 여러 시민적 열망과 의지가 분출되었지요. 그러나 윤석열정부 집권 이후 대전환의 과제는 더욱 복잡하고 어려워진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보고 계신지, 한국사회 대전환의 길을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듣고 싶습니다.
한기욱 촛불대항쟁으로 87년체제가 돌파되었지만 분단체제는 무너지지 않았어요. 이 점에서는 2019년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의 결렬이 두고두고 아쉬운 일입니다. 이후 윤석열정부가 들어서면서는 오히려 87년체제 이전으로 퇴행하는 것 같아요. 단기적으로는 이 정부를 어떻게 퇴진시킬 것인가에 많은 것이 걸려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윤석열정부의 집권 자체가 촛불혁명이 야기한 ‘변칙적 사건’이라면 이 ‘변칙’을 바로잡는 것도 촛불혁명일 수밖에 없다 싶어요. 대전환의 중장기적인 과제는 무엇보다 막바지로 갈수록 포악해지는 자본주의체제에 적응하면서 극복하는 일입니다. 인간과 자연생태에 대한 자본의 약탈적·탈취적(dispossessive) 성격이 점점 두드러지면서 자산·소득 불평등과 함께 생태적 파괴도 심화하고 있어요. 특히 2008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재생산 없는 축적’, 즉 노동력의 재생산을 보장하여 잉여가치를 지속적으로 ‘착취’하는 방식보다 노동자를 일회용품처럼 써먹고 폐기처분하는 정착식민주의적인 경향이 두드러집니다. 기업의 자연자원 사용에서도 환경파괴적인 ‘추출적’(extractive) 방식이 확대되어 생태계도 회복 불가능의 영역이 늘어나고요. 결국 민중의 삶과 자연생태 모두 피폐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인데, 적실한 대응방안을 모색해야 해요. 가령 이전의 복지 개념과는 다른 발상의 기본소득·기본주택·기본의료 등의 민생 정책, 그리고 성장주의에서 탈피하는 사회생태 정책에 대해서 더 많이 논의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남주 정치적 문제는 물론이고 남북관계, 기술 및 산업구조 변화, 기후위기 등 어느 하나 쉬운 과제가 없기 때문에 이를 어떻게 극복하고 대전환으로 갈 것인가가 간단치는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좀 다른 측면에서 얘기해보고 싶어요.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큰 포부, 어떠한 원(願)이 있어야 합니다. 개별적인 문제에만 집착하거나 비판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는 거죠. 현 상황을 초래한 원인을 살필 때도 과연 우리가 촛불혁명의 뜨거운 열망을 실현할 만한 마음공부가 얼마나 되어 있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한때 많은 사람들이 촛불혁명을 이야기하고 들떴지만, 뒤따르는 현실의 변화가 기대수준에 못 미친다는 이유로 이내 관망적·냉소적 태도가 확산되고 말았어요. 그런데 역사적으로 봐도 혁명이 일어났다고 바로 그다음 날 눈에 띄는 변화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거든요. 혁명에 대한 충실성이 작동하면서 수십년에 걸쳐 변화가 일어나는데, 불과 몇년 만에 촛불의 요구 자체를 부정하거나 이미 어떤 변화가 진전되고 있다는 사실마저 망각하게 된 거예요. 특히 진보진영의 언론, 시민사회, 지식인 내에서 그같은 경향이 더 뚜렷했습니다. 이것이 윤석열정부의 출현이라는 변칙을 만들어낸 주요 원인이었다고 봐요. 지금 맞닥뜨린 여러 문제를 해결하려면 결국 촛불의 주체적 역량을 어떻게 강화해갈지가 중요한데, 실망하고 비관하며 관망하는 태도에 머무르지 않았나 성찰해봐야 합니다.
한기욱 촛불대항쟁 시기를 돌아보면, 자발적으로 시위에 참여하여 실로 유연한 시위 방식을 선보인 그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헬조선’이라 불리는 곳에서 지옥 같은 삶을 사는 일면을 지니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거기서 놓여났을 때의 해방감도 동시에 느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그런 양면을 문학비평에서 ‘정동’이라는 개념으로 포착하려 했어요. 자본주의 말기로 갈수록 정동적인 성향이 강화되는데, 장기간에 걸쳐 진행된 촛불시위에서 과격한 관념적 구호도 일체의 폭력사태도 없었다는 것은 정말 믿기 힘든 기적 같은 일입니다. 동시에 같은 이들의 삶에 지옥 같은 면이 있었다는 게 새삼 아프게 다가옵니다.
이남주 동감합니다. 한가지 덧붙이면 사실 2016년 봄에 창비 50주년 기념호를 낼 때만 해도 저희가 제시하는 ‘대전환’ 키워드가 큰 호응을 얻지 못했어요. 진보 지식인 내에서도 박근혜정부의 높은 지지율에 실망하는 경향과 더불어 시대에 대한 냉소가 훨씬 많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해 겨울에 완전히 새로운 국면이 형성된 거잖아요. 그럼 왜 당시에 진보진영조차 전환의 감각을 가지지 못했나, 예상하지 못했나를 생각해봐야 해요. 표면적 상황에 즉자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대전환의 원을 가진 사람들의 태도가 아니라는 것이죠. 사회 저변의 건강한 흐름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이러한 흐름을 어떻게 강화할지를 항상 주요한 화두로 삼아야 합니다.
문학과 정론의 독특한 결합과
창비 담론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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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선 그러한 화두를 공론화하고 새로운 흐름이 생성되도록 하는 것이 창비의 역할일 텐데요. 실제로 『창작과비평』은 우리 사회가 진전되어온 굽이굽이에서 여러 비판적 지성인들의 의미있고 논쟁적인 글을 싣고 토론하며 사회변화에 동력을 보태어왔습니다. 100호 이후의 창비를 돌아볼 때 두분이 특히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글이나 순간은 무엇인지요?
한기욱 편집자로서의 기억을 말하자면 제가 주간직 맡으면서 발간한 50주년 기념호가 물론 뜻깊습니다만, 매호 특집과 좌담, 촌평에 이르기까지 정성을 쏟았기에 애틋하지 않은 호가 없죠. 다른 잡지와 달리 창비는 모든 원고에 대해 초고가 입고되면 우선 편집진에서 같이 읽고 필자에게 논평을 전합니다. 그렇게 필자와 의견을 주고받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논평 후에 원고가 많이 개선되었을 때 정말 흐뭇했어요. 투고작 중에 좋은 작품을 발견해 실을 때도 특히 기뻤습니다. 중국동포 작가 금희의 단편 「옥화」(2014년 봄호)라든지 이명윤 시편(2021년 봄호) 등의 투고작을 알찬 결실로 기억해요. 필자로서의 경험은 제가 첫번째 한국문학 평론(「대중문화 속의 소설과 영화」, 2001년 봄호)을 기고했을 때나 문외한으로 탈북인 좌담(「탈북인의 자리를 돌아보다」, 2015년 여름호)의 사회를 맡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섣불리 6·15문학론(「한국문학의 새로운 현실 읽기」, 2006년 여름호)을 피력했다가 호된 내부비판을 받았던 기억, 그리고 장편소설 해체론·무용론에 맞서 열심히 논쟁했던 기억도 나고요.
문학담론과 관련해서 뜻깊은 경험 중 하나는 2000년대 중후반 이장욱 진은영 두분이 편집진에 합류하면서 펼친 논의입니다. 기존의 재현주의와 서정성 미학에 대해 ‘다른 서정’을 제시한 글(이장욱 「꽃들은 세상을 버리고」, 2005년 여름호)과 ‘시와 정치’ 논의(진은영 「감각적인 것의 분배」, 2008년 겨울호)를 실었죠. 언제나 그랬지만 특히 그때는 창비가 새로운 시대, 새로운 어법의 문학과 씨름하는 현장에 선 기분이었습니다. ‘시와 정치’ 논의는 창비 안팎으로 반향을 일으키며 한동안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창비의 리얼리즘 시학과 근대의 이중과제론이 한층 연마되었다고 봅니다.
인문사회 부문에서는 촛불혁명의 거대한 뿌리를 3·1운동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새롭게 조명한 3·1운동 100주년 특집호(2019년 봄호)가 뜻깊게 남아 있습니다. 이 특집의 문제의식을 단련하여 그다음호에 백낙청 선생님이 「3·1과 한반도식 나라만들기」를 기고하셨는데, ‘한반도식 나라만들기’라는 의미심장한 과제를 제시한 글이었습니다. 3·1운동의 뿌리를 개벽파와 동학의 이중과제론적 문제의식으로 보는 흐름은 2021년 가을호의 김용옥·박맹수·백낙청 특별좌담 「다시 동학을 찾아 오늘의 길을 묻다」에서 또 한번 드러났고요. 이 좌담은 동서양의 문사철에 대한 해박하고 지적인 대화도 경청할 만하지만, 창비의 여러 담론과 개벽사상의 친연성을 드러낸 점이 각별했습니다.
이남주 잘 정리해주셨는데 조금 덧붙이면, 문학에서 제가 인상 깊었던 것은 장편소설론입니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장편을 통해 얻는 감동이 큰데, 문학장 안에서는 아무래도 단편이 소설문학의 중심으로 여겨져왔죠. 2007년 여름호 특집 ‘한국 장편소설의 미래를 열자’, 2012년 여름호 특집 ‘다시 장편소설을 말한다’ 등으로 장편소설의 폭넓은 가능성이 이야기된 것이 독자로서도 반가운 일이었습니다.
사회담론에서는 아무래도 87년체제론이 한국사회의 성격을 규정하고 토론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87년체제라는 말이 정확히 언제부터 쓰였는지 확실치 않지만 2005년 창비에서 주요하게 제기하며 크게 확산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주류적 풍조가 되면서 사회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거의 무화되었던 때거든요. 총체적 인식의 필요를 환기시켜준 담론이었어요. 개인적인 소회로는 2004년부터 창비 편집진에 합류해 창비가 변혁적 중도주의와 연합정치, 근대 이중과제론, 분단체제론 등 한국사회의 주요 전환점에서 담론을 발신하는 과정에 졸고로나마 기여했다는 점이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물론 저의 내적인 동력만이 아니라 창비 동료들의 따가운 채찍질 덕분인데, 서로를 격려하고 새로운 걸 도전하게 만드는 일종의 동인(同人) 문화가 도움이 됐고 앞으로도 이 문화를 잘 지켜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영선 두분 말씀에서 창비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것 같은데요. 『창작과비평』은 문학과 정론을 겸하는 비판적 종합지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이러한 창비의 구성에 대해 독자들이 더러 궁금증을 품기도 해요. 가령 『창작과비평』은 문예지인가 아닌가 하는 질문도 받습니다.
이남주 전문영역 간에 분화가 상당히 가속화되면서 문학과 인문사회를 결합하는 창비의 고유한 구성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가령 맑스의 이론도 사회와 문학을 분리하지 않고 함께 사유하면서 지평을 넓힌 측면이 있거든요. 제 세대에서는 사회와 문학을 분리하는 것이 오히려 어색한 일인데, 새로운 독자들 또 앞으로 창비에 글을 싣거나 창비를 만들어갈 분들의 입장에서는 어렵게 느껴질 것 같아 고민도 됩니다. 그 분화를 인정하고 그대로 따라갈 일은 아니고, 어떻게 하면 총체적인 사유를 효과적으로 해나갈 수 있을지를 모색하고 있어요. 그래서 최근 잡지 구성에서 인문사회 특집에도 문학비평 글을 함께 싣고, 문학 특집에도 인문사회 글을 실으면서 연관성을 드러내려는 시도를 하고 있고요. 가독성을 높이기 위한 글쓰기 방식은 무엇일지도 계속 고민해가려 합니다.
한기욱 문학과 정론을 겸하는 구성은 창간호부터 견지해온 방침이고 창간정신과도 맥이 닿아 있죠. 사실 매호 요긴한 정론과 함께 수준 높은 문학작품을 소개하고 비평을 펼치면서 지령 200호까지 이어온 잡지는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희귀해요. 창비의 표어가 ‘한결같되 날로 새롭게, 나날이 새로워지되 한결같이’인데, ‘나날이 새롭게’라는 부분에서 특히 문학이 변화의 흐름을 먼저 감지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시대 전반을 사유하려면 문학적인 감각만으로 되진 않고 통합인문학적인 사유가 필요하죠. 창비의 담론도 문학 분야는 시민문학론, 민족문학론, 세계문학론, 리얼리즘론을 꼽을 수 있고 인문사회 분야는 분단체제론, 변혁적 중도론, 근대 이중과제론 등을 꼽을 수 있지만 둘이 긴밀하게 연결돼 있습니다. 가령 리얼리즘론을 기본으로 하더라도 근대의 이중과제론을 모르면 장편소설을 제대로 읽거나 논할 수 없다는 게 제 소감이거든요.
이남주 말씀처럼 창비 담론은 매 시기 주요 문제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제기된 것이에요. 그러나 담론이 등장하는 초기에는 이런저런 오해도 받곤 했습니다. 예를 들면 이명박정부 출범 이후의 변혁적 중도론과 연합정치 담론은 진보진영에서도 달갑게 보지 않았어요. 한국사회가 서구 같은 보수-진보 구도로 재편되고 있다는 주장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죠. 당시 지리멸렬했던 민주당과 연합할 필요성을 주장하는 일은 진보진영 내에서 상당히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창비는 한국정치가 보수-진보 구도로 재편되기보다 이명박정권하에서 상당한 퇴행이 발생할 거라고 예측하고, 수구세력의 기반이 되고 있는 분단체제를 극복하려면 그 극복을 추구하는 세력 간의 연합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거죠. 실제로 이명박정권의 퇴행을 저지하는 데 연합정치가 상당한 돌파구를 만들었고요. 근대 적응과 극복의 이중과제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자본주의 극복이라는 전망에서 후퇴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많았어요. 그러나 오늘날에는 적응하며 극복하는 이중과제적 태도가 알게 모르게 큰 공감을 얻고 있다고 봐요. 우리가 삶을 살면서 한계를 돌파하려 할 때는 그러한 자세가 당연히 필요하니까요. 이같이 비현실적인 이상에 자족하지 않고 그렇다고 현실을 추수하지도 않으면서 변혁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 창비 담론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200호 이후 창비의 나아갈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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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선 좀더 구체적으로 향후 창비가 어떤 의제에 관심을 둘지도 독자들은 궁금할 것 같습니다. 50주년에는 ‘현장성 강화’를 주요한 편집방향으로 천명하고 소수자 운동, 젠더불평등과 돌봄문제, 생태문제 등을 논의해왔는데요. 창비에서 살펴야 할 또다른 사회적 의제, 나아가 200호 이후 창비의 편집방향은 무엇일까요?
이남주 지금 가장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대전환’이라는 지향을 구체화시키는 일입니다. 50주년 기념호에서도 대전환은 중요한 키워드였는데, 그 기획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어요. 대전환은 사상부터 정책과 운동까지 여러 차원과 관련되어 있고 분단·돌봄·생태·젠더·지역 등 다양한 의제와도 연관됩니다. 광범위한 만큼 실현 과정에서는 여러 어려움이 따를 테고요. 그래서 지금은 새로운 의제를 찾아내기보다 지금까지 제기된 다양한 의제를 대전환의 길에 어떻게 배치하고 어떻게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지 방법을 찾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대전환과 함께 좀더 구체적인 차원으로서 ‘이행’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개벽사상’을 좀더 탐구하여 대전환의 사상적 자원으로 삼으려는 시도도 하고 있습니다. 한가지 바람은 창비가 60주년을 맞는 2026년에는 촛불혁명에 대한 저항을 극복하고 사회가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해 있었으면 합니다. 그런 바탕 위에서 한국사회와 한반도가 한단계 더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편집방향을 제시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오늘날 촛불혁명이 저항에 직면해 있지만 새로운 변화의 열망들도 작동하고 있는 만큼 우선 윤석열정부의 퇴행에 맞서면서 60주년까지 더 나은 한국사회를 만드는 데 이바지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한기욱 공감하면서 한두가지 덧붙이면, 저는 대전환의 뒷면은 대환란이라고 생각합니다. 핵전쟁 위협과 전쟁·분쟁은 전부터 있었지만, 지금은 사회생태 위기 같은 더 큰 위기들에 맞닥뜨려 있잖아요. 정치가 엉망인데 기후위기까지 가중되면 사람들이 도저히 살 수 없는 나라가 되고, 이주와 난민이 대거 발생하는 현상이 생깁니다. 수단이나 예멘 등 아프리카와 중동 사람들의 유럽행 난민은 물론이고 라틴아메리카에도 미국으로 이주하려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죠. 저는 우리 사회로 들어오는 이주민도 늘어날 거라고 봐요. 이미 많은 이들이 노동자로 오고 있고, 출생률 저하를 고려하면 이주민을 받아들일 필요도 있고요. 그래서 돌봄·생태·젠더 등 기존의 여러 의제와 더불어 이주와 난민 문제도 관심을 기울여주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삶을 제대로 조명하면서 이주민들과 평등하게 살아갈 복합국가의 가능성도 점쳐볼 수 있겠고요. 그리고 챗GPT와 AI 관련해서도 좀더 이야기해주면 좋겠어요.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라는 원불교 표어처럼 이 물질세상의 변화를 어느정도 통제도 하고 활용도 하는 이중과제적 대응이 필요한데, 그를 위해 어떤 마음공부와 정신 단련이 필요할지 이야기되면 좋겠습니다.
김영선 200호 이후 문학 부문에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시는지요? 지금의 한국문학장에 대한 평가와 더불어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한기욱 독자 수의 감소에도 불구하고 한국문학은 역량과 잠재력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드라마·가요 등 ‘한류’의 밑바탕에도 한국의 언어적·문학적 자원이 빛을 발하는 측면이 있고, 전통적인 문학 장르에서도 페미니즘 문학이 새로운 활력을 보였어요. 거기에 원로급 작가들과 중진 역시 좋은 작품을 생산하며 두텁게 자리 잡고 있고요. 앞으로 충분한 번역이 이루어지거나 한국어 직독이 가능한 독자들이 늘면 세계문학계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점하리라 봅니다. 몇가지 아쉬운 점이랄까 경계해야 할 점도 보태고 싶은데요. 하나는 젊은 세대의 문학이 서구의 이론과 작품을 많이 참조하는 반면 우리 전통의 사상적·언어적·역사적 자원에는 다른 대중예술에 비해서도 관심이 적다는 것이에요. 또 하나는 ‘정치적 올바름’의 경향에서 나타나듯 첨단 이론이나 담론이 선행하여 서사를 압도하거나 조정하는 경향이 일부 보여요. 이런 점들에 좀더 유의했으면 하고, 그 과정에서 창비도 노력해주기를 바랍니다.
김영선 오늘의 창비가 있기까지 독자 여러분의 변함없는 성원과 애정 어린 조언이 있었다는 점도 기리고 싶습니다. 앞으로 『창작과비평』이 독자와 어떠한 관계를 맺어가면 좋을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남주 창비에 있어 독자는 단순히 책을 사는 구매자가 아니라, 여러 시련 속에서도 창비를 지켜준 분들이라는 의미가 큽니다.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가자는 공감대 속에서 창비를 읽어주고 계신 분들이고요. 특히 독자분들이 보내주시는 조언은 창비의 기획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작년부터 시작한 ‘내가 사는 곳’ 산문 연재가 무척 잘된 기획으로 평가받고 있고, ‘문학초점’ 좌담도 수도권 이외 지역에 가서 현지의 작가, 평론가, 교사분들과 함께 진행하기도 했어요. 지역에 이처럼 더 적극적으로 다가서게 된 데는 독자분들의 의견이 긴요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최근 몇년 사이 독자와의 만남이 드물었는데, 앞으로 독자분들의 목소리에 좀더 귀 기울일 수 있도록 소통을 활발하게 해나가려고 합니다.
한기욱 저도 ‘내가 사는 곳’ 시리즈를 무척 인상깊게 읽고 있습니다. 앞으로 ‘창비 부산’ 같은 문화공간이 더 생겨서 지역 독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온라인 화상회의를 활용해 독자와의 만남 자리를 꾸린다면 지역에 구애받지 않고 소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종이책과 전자책을 근간으로 하되 유튜브 같은 새로운 매체의 활용도 시의적절하게 구사했으면 합니다.
김영선 마지막으로 기존의 ‘책머리에’는 해당호의 주요 내용을 안내하는 역할도 겸하고 있으니 이번 200호의 기획 취지 및 구성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큰 틀에서는 ‘미래’가 키워드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남주 100호에서 200호에 이르기까지 25년이 걸렸고, 다음 300호까지도 25년이 걸릴 예정이에요. 25년, 즉 4반세기는 ‘중기’라는 시간 범주에 부합하고 한국사회나 국제질서의 큰 변화가 일단락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200호는 ‘25년 후 미래’를 키워드로 제시했습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담기 위해 구성도 다른 호와는 차별화했어요. 특집은 인터뷰로 구성해 다양한 세대의 각계 인사를 만났고, 사회변화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의제들에 대한 현장의 목소리를 담고자 했습니다. 논단은 ‘대전환’을 키워드로 삼아 한국사회 구조 전환과 관련한 과제를 논하는 글을 모았습니다. 창작란의 경우 시인과 소설가들이 미래에 대한 상상을 어떻게 작품 속에 구현하고 있는지를 살피며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촌평란은 평자들이 지난 25년여간 출간된 단행본 중에서 다시 읽어보면 좋을 책을 직접 선정해 소개합니다.
김영선 권두대담에 이어지는 200호의 다양한 지면을 독자 여러분들이 흥미롭게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두분과 이야기 나눌 수 있어 즐겁고 보람됩니다. 감사합니다.(2023.5.7. 창비서교빌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