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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 다시 읽고 싶은 책
김종철 『땅의 옹호』, 녹색평론사 2008
쇼핑몰에서 흙 묻은 언어 상상하기
김해자
金海慈 / 시인 haija21@naver.com
3년 전 작고한 김종철 선생(1947~2020)의 글은 떨쳐 일어서게 한다. 양배추처럼 안팎이 똑같아서 아무 데나 펼쳐 읽어도 생생하다. 자비와 분노가 한통속인 문채(文彩)다. 이해했다고 생각했으나 읽을 때마다 새로운 뉘앙스가 발견된다. 매번 뭐라도 하게 만든다. 새삼 문학의 힘을 신뢰하게 하고, 폼 잡지 말고 시라도 써야지 싶어진다. 영문학을 전공한 문학평론가이자 1991년 『녹색평론』을 창간하고 한국의 생태담론을 주도한 생태사상가였던 저자의 평론은 물론 강연과 대담과 토론 글이 함께 수록된 『땅의 옹호: 공생공락의 삶을 위하여』는 통 크고 깊숙하고 절박하게 질문하는 책이다. 근대문명과 성장과 진보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담겨 있거니와 민중의 평화와 자치 그리고 민주주의 등 저자가 다룬 굵직한 주제들은 오늘날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어찌 살아야 하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숙고하게 한다. 절박하면 용기가 생긴다. 근본적인 질문이 부재하거나 회피되는 시대를 향해 저자는 거침없이 피력한다. 명백히 파국으로 치닫고 있음에도 “환경이냐 경제냐 하는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그렇게 함으로써 사고를 단순화시키고 비판적인 물음을 봉쇄하기 일쑤인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권력들에 대하여 우리는 그들이 세계화의 이름으로 지금 우리더러 가자고 하는 방향은 공멸의 길이라는 것을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149면)고.
『땅의 옹호』가 서점의 부동산 서가에 꽂혀 있더라는 웃지 못할 일화를 전해 들은 적이 있다. 땅을 막대한 불로소득을 안겨줄 부동산 자산으로만 생각하는 투기꾼들의 세상에서, 끊임없이 땅을 파헤치고 죽이는 이른바 개발사업이 끝도 없이 계속되는 시대에, 저자는 살아 있는 ‘관계로서의 땅’과 ‘관계로서의 가난’과 환대와 우정과 함께 먹는 밥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한다. ‘농(農)의 세계’는 “식량자급이나 식량주권의 문제, 혹은 환경이나 에너지 위기와의 관련”(174면)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삶의 태도이자 관계이자 예술과 윤리, 그리고 생명 자체와 직결된 문제다. 망본초란(忘本招亂), 즉 근본을 잊어버리면 망한다. 그런 점에서 농업과 농민과 농촌의 몰락은 “다른 어떤 것들의 성공으로도 보상받거나 상쇄될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것의 죽음”(170면)을 초래한다. 이미 죽음은 오래전 시작되었고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고도성장의 열매인 풍요와 불평등의 한가운데서 우리 자신이 급격히 파괴되고 있는 지금, 무엇보다도 시급한 질문은 “농민과 농촌공동체가 사라지고, 수천년 동안 인간문화의 핵을 구성해왔던 농적 가치들의 재생산 기반이 돌이킬 수 없이 상실되어버린 뒤에 과연 우리는 어떻게 인간다운 삶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인가”(149면)이다.
저자는 환경·생태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서는 부분적인 땜질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강조한다. 즉 “쓰레기를 줄일 궁리를 하는 게 아니라 쓰레기 자체가 나오지 않는 삶의 패턴, 즉 순환형 삶이 가능한 사회로 방향전환을 해야 한다”(344면)는 것이다. 총체적인 농촌 붕괴와 함께 오늘날 우리는 자연과 공동체로부터 단절되어 무한경쟁의 시장에 내몰렸고, “이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적 주술(呪術)에 사로잡혀 서로가 서로에게 사나운 짐승이 되어버렸”(222면)다. 그것이 우리 삶을 점점 남루하고 비참하게 한다. 농촌도 마찬가지임을 저자는 누구보다 잘 안다. 오늘날 농부는 옛날의 농부처럼 “논밭을 가꾸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독성 화학물질과 기계를 가지고 땅에 대하여 공격적인 전투를 감행하는 생산도구들이” 되어가는 현실을 알기에 더더욱 절실하게 호소한다. 저항의 마지막 근거지를 방어하라는 듯이. 200년도 안 된 산업기술문명은 일상생활마저 지배하고 식민화해버렸고, “오로지 타자를 부리고 이용해 먹기 위한 정략적 언어, 광고의 언어”(332면)만 넘쳐난다. ‘나’와 ‘그것’의 관계에는 살아 있는 상징과 은유가 발붙일 자리가 없다. 바로 이것이 문명비판과 문학 혹은 시가 한 뿌리로 만나는 지점이다.
저자는 루쉰(魯迅)의 소설 『사소한 사건』(一件小事, 1920) 등을 통해 큰사람을 알아볼 줄 아는 ‘근원적 겸허함’이 문학의 본질임을 말하는 동시에, 민중의 토착적 가치나 ‘무의식적 야생의 삶의 기술’이 인간의 토대를 이루어왔음을 상기시킨다. 원시적 풍습이 남아 있는 공동체를 유지하는 부족들에게서 “나와 그대라는 관계 속에서 만물을 대하는 뿌리 깊은 태도”(같은 면)를 발견한다. 그들은 오랜 삶의 방식 속에서 세계를 자신들만의 것이 아닌 살아 있는 생명과 영혼을 간직한 존재들의 공간으로 인식하며, 자연의 순리에 자신들의 욕구를 적응시키며 살아왔고, 여전히 그러하다. 그런 점에서 시의 본질은 야생의 삶이 선사하는 “근본적으로 겸허한 태도와 감수성”(334면)이다. 시인은 서로가 연결되어 있는 생명의 그물망 속에서 원시의 언어를 기억하는 사람이자 “마음을 크게 갖는 사람”(342면)이며, “거룩한 것을 우리의 마음 가운데서 느끼고, 섬기는”(335면) 사람이다. 그런데 소비가 곧 삶이고, 삶이 살아남기 위한 돈벌이가 되어버린 ‘맥도날드와 스타벅스의 세상’에서 그러한 감수성과 “뿌리에 흙이 묻어 있는 언어”(222면)가 어떻게 가능할까.
권정생 천상병 김수영 횔덜린 루쉰 블레이크 등 근원적 겸허함을 간직한 수많은 작가와 시인들을 불러내며 저자가 제시하는 바는 의외로 단순하고 소박하다. 시적(詩的)으로 살자는 것이다. 즉 인간답게, 서로 도우며 자급자족하고 고루 가난하게 살자는 것이다. 당연히 절대적 빈곤을 찬양하거나 가난한 시절로 돌아가자는 뜻은 아니다. 가난에 대한 가치관을 바꾸어보자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의미의 가난조차 현실성이 없어 보일 수 있겠으나, 실현 가능성을 논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진실은 희망이 그 길밖에 없다는 것이다. 코로나19로 벌벌 떨던 지난 몇년을 보내고, 이제 이 바이러스를 기술의학으로 간단히 정복할 수 있는 해프닝 정도로 받아들이며 금세 적응하는 인류의 모습을 보면 회심(回心) 혹은 전환이라는 게 불가능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미래세대가 살게 하기 위해선 저자가 제안한 그 길밖에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저자의 제안은 지금 이 세계의 질서를 주도하는 엘리트나 전문가들의 사고방식과 지배언어로는 미래를 살릴 수 없다는 비타협적 저항선언이자 생명선언인 것이다. “가부장적 체제, 남녀차별, 계급, 자연의 도구화를 필연적인 것으로” 하는 지금의 문명으로는 작금의 생태복합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기에. 아프고 병든 땅에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가는 생명붙이들의 고통을 받아쓰는 언어는 전근대적이고 촌스러운 방언으로 취급될 수도 있고, 시대에 역행하는 미치광이 취급을 받거나 고립을 각오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럴수록 명령과 지배와 타성의 언어에 저항해야 하고, 더더욱 “살아 있는 비유와 상징을 말”(333면)해야 한다.
급진적이고 비판적인 상상력을 이어가자면, 농촌이 붕괴되고 농업이 사라지면 ‘쇼핑몰’ 같은 세계가 될 게 뻔하다. 저자는 만약 우리가 쇼핑몰에서 평생을 산다면 어떨까 가정한다. “필요한 것은 현금일 뿐, 다른 것들—예컨대 상부상조와 협동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적 상호관계, 우정과 환대, 사상과 시와 예술은 심히 거추장스러운 것이 될 것”이다. 그런 세상에서는 “어렸을 때 어머니의 품속에서 그리고 가족과 동네사람들을 통해서 익힌, 풍부한 뉴앙스와 깊은 울림을 가진, 우리들 대부분에게 유일한 시적 언어, 즉 모어(母語)가 반드시 필요하지도 않”(175면)겠다. 물건과 서비스를 사고파는 단순하고 피상적인 접촉을 유지하는 데는 일차원적·기능적 언어만으로 충분할 테니까. 복잡한 일은 사이보그나 인공지능이 다 알아서 하지 않겠나. 다음 질문은 쇼핑몰 안에서 진정 자유롭고 행복할 것인가, 그리고 설령 행복하더라도 지속 가능할 것인가이다. 간디 말처럼 “지구는 모든 사람의 기본욕구를 위해서는 풍요로운 곳이지만, 인간의 탐욕을 충족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곳”(118면)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런 점에서 “성장의 필연적인 소산인 사회적 양극화, 불평등, 좌절, 실패가 보편적 현상”(225면)이 된 이 시대, 불편과 약간의 가난을 감수하는 삶의 회복만이 공동체를 회복하고 절멸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 아니겠나.
‘불편함’과 ‘가난’을 공생공락의 가치로 전환시키는 발상이 시대착오적으로 여겨질 수 있음을 알면서도, 현실주의와 실용주의를 넘어서 급진적 상상력으로 돌파해간 김종철 선생에게서 옛 스승들의 구원과 개벽을 향한 열망을 본다. 어느 시대나 스스로와 뭇 생명의 아픔을 들여다보며 고통스러워할수록 다른 세상을 간절히 꿈꾸는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대체로 근본적인 개안(開眼)과 회심을 촉구했다. 이제 세계와 자연과 사람을 “관리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계의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야” 할 때 아닌가. 최소한 진보와 개발과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과 관리와 조작의 언어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것이라도 멈추고, 버려지고 죽어가고 쓸모없어 보이는 것을 “기리고 찬미하는 정신적 공간을 확보”해야 하지 않겠나. 비록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그래서 실패하고 멸절이 코앞에 닥친다 해도, 권력 혹은 기술주의자들의 “상투적인 가정, 논리들을 뒤집”(336면)으며 맞서야 하지 않겠나. 그것이 우정이자 자비이고 정의이자 예술이자 구원의 길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