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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선우 金宣佑
1970년 강원 강릉 출생. 1996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도화 아래 잠들다』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녹턴』 『내 따스한 유령들』 등이 있음.
lyraksw@hanmail.net
미륵의 고독 1
그때 나는 개였다……고 느낀다
아니 풀이었던가……
풀이었다면 개였을 수 없을 텐데, 개에게 말을 걸던
풀의 마음이 익숙하다
그렇다면 나는 뭐였나?
내가 뭐였냐는 게 이제는 중요하지 않지만
거기— 그 장소의 냄새가
사무쳐올 때가 있다
흙과 먼지와 피와 살과 눈물의 냄새, 그 사이로
향긋하게 번지던 가느다란 풀의 냄새가
1
처음엔 오른쪽 뒷다리에 상처가 생겼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곪기 시작했다 날이 더웠고
왼 다리까지 종기가 번졌지 걷기 힘들어졌다
흙먼지 피는 아득한 길을 바라보고 있자니
눕고 싶어지더군
걷는 건 일생의 쾌락이었지만
나이 들자 슬슬 고단해지기도 했지
이젠 좀 쉬어도 되지 않겠나
나는 누웠다
처음엔 편안했지
고통은 그뒤에 찾아왔다
상처가 깊어져 번지고 덧나면서
구더기가 끓기 시작하는데, 그때부턴 미치겠더군
미치도록 가려워본 적 있나?
단박에 숨이 끊어지는 목숨은 복된 거야
벌레가 끓으며 서서히 죽어가는 건 괴로운 일이더군
무너지는 느낌을 견뎌야 하는 거
무엇보다 미치게 근지러운
사각사각……
습습습……
그런데 이상한 일이— 글쎄, 이상하다기보다
예상치 못한 마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가려운 감각 너머—
벌레 하나하나가 몰입해 있는 식성이 떠오르면서
어쩐지 마음이 흔연해지기 시작했다
이 많은 벌레들을 내가 먹이고 있단 말인가!
평생 남의 살을 먹어왔지만
누구에게 내 살을 먹여본 적은 없으니까
죽음에 이르러야 빚을 갚는구나
이제 아무것도 죽이거나 훔치지 않아도 되는—
먹지 않아도 되는 세계가 코앞이었다
나는 흔쾌히 받아들였지
사는 동안 퍽 좋았으니까—
아쉬움이 없었다
무엇보다 바로 그 상태—
어린벌레들을 먹이고 있다는 게 좋았어
그래…… 근지러운 고통 속에서도 뜻밖에 좋더군!
그런데……
풀이……
내 얼굴 바로 곁에서
가느다란 풀이……
바싹 메마른 황톳길에 어쩌자고 풀이……
먼지 같은 씨앗에서 생겨났을
이제 막 풀다워진 그애가
너는 자려는 거야? 지금?
나도 곧 잠들긴 할 테지만
겨울이 오기 전까진 깨어 있을 텐데
너는 멈추려는 거야? 지금?
그러지 마
멈추면 차가워진다고!
너도 알다시피 낮은 더워도 밤은 춥잖아
여기는 풀이 살기엔 너무 메마른데
나는 싹 터버렸고
태어나 지금까지 너처럼 따뜻한 것이
내 옆에 이렇게 바싹 붙어 있는 건 처음인데
잠들겠다고?
그러지 마
부탁이야
2
풀의 말은—
모호하고도 신선한 의지를 부추겼는데
그러니까—
풀과 함께 있어주고 싶은 마음이……
그래 분명 그런 마음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자면 살아야 할 텐데
아 너무 멀리 와버렸나?
움직여보려 해도 꼼짝할 수 없었어
구더기들을 털어내보려 해도 힘이 없었지
이대로라면 잠들 수밖에 없겠는걸
살려고 마음먹었는데 죽음이 너무 가깝다는 건—
어쩐지 좀 쓸쓸했지만
사각사각……
습습습……
벌레들의 순수한 식성에 집중하자
기분이 훨씬 나아졌지
풀아, 미안—
너무 늦은 것 같아
그런데—
너는 죽음을 아니?
나는 자주 죽어!
그래서 지금은 네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가 다가온 건
그때였다
해진 승복을 걸친 수행자—
터덜터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풀이 내게로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나는 저이를 알아
풀은 상상할 수 없이 많은 씨앗으로 흩어지니까
드넓은 세상의 거의 모든 이야기를 공유하지
바람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는
우리는 풀이니까
나이면서 우리인…… 우리는……
오랫동안 보아왔어 저 수행자를
인간은 대체로 탐욕스러워서 볼품없지만
드물게 아름다운 인간들이 있지
저이는 세상 모든 존재에게 한없이 다정했던—
오래전 사람 고타마 싯다르타의 제자야
3
나는 우둔한 수행자
경전에 정통했지만 마음이 충만하지 않았네
나는 미래불의 친견을 발원했네
사원을 떠나 산속 동굴에서 수행한 지 삼년
아무런 응답이 없었네
동굴을 떠나 걷다가 한 바위를 보았지
작은 새들이 날아오를 때마다 날개를 부딪쳤는데……
바위가 움푹 패어 있었네
나는 동굴로 돌아갔지
다시 삼년이 흘렀으나 응답이 없었네
동굴을 뛰쳐나와 걷다가 한 바위를 보았지
위에서 물방울이 톡톡 떨어지고 있었는데……
바위에 깊은 구멍이 나 있었네
나는 동굴로 돌아갔지
다시 삼년이 흐르고
나는 떠났네 마지막이라 생각했지
길에서 한 노인을 만났네
뭉툭한 쇳덩이를 바위에 갈고 있더군
—친구여, 무얼 하고 계시오?
—바늘을 만들고 있다오
노인은 만들어둔 세개의 바늘을 보여주었네
나는 동굴로 돌아갔지
다시 삼년이 흘렀지만
나는 결국 미륵을 보지 못했네
우뚝 선 채로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로 갈지 방향을 정하지 못한 것일까?
아니었다
그는 나를 보고 있었다
늙은 수행자가 나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풀이 속삭였다
우리는 알고 있어— 인간의 눈물은
대체로 무해하고 그들 자신을 위해 유용하지
그런데 때로
스스로를 위해선 조금도 유용하지 않은 눈물을……
아프게 흘리는 이들이 있지
바로 지금 이런 눈물……
이것은 좋은 소식……
그가 내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가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가 내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그의 눈에서 계속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가 내 몸에서 구더기들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한참 만에 그가 손길을 멈추었다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손길에 터져 죽는 벌레들 때문에
그가 또 눈물 흘리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를 위해선 조금도 유용하지 않은 눈물을
아프게……
아프게……
4
잠시—
사라졌던
그가 돌아왔다
그가 작은 접시에 담긴 소젖을 내 앞에 놓았다
당신은 이것을 구하러 갔었나?
풍겨오는 젖 냄새를 맡자
어쩌면 풀의 곁에 조금 더—
겨울이 올 때까지 있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기운을 내어 접시에 혀를 대려는 순간이었다
그가 칼을 꺼냈다
그가 자기 허벅지에서 살점을 도려내었다
그 순간의 피 냄새
흙과 먼지 냄새
썩어가는 내 살과 방금 베어낸 신선한 살 냄새가 뒤섞이고
벌레들이 요동을 멈추었다
그가 몸을 구부려왔다
그가 혀로 벌레들을 핥아
베어낸 자신의 살점 위로 옮겨갔다
고요하고 막막했다
그 순간—
빛이 폭발했다
빛방울들이
빛방울들의 강물이
빛방울들의 강물이 폭포수처럼
나와 풀과 그가 함께 앉은 메마른 길의
동서남북을 감싸며 눈부시게 터져 나왔다
흰—
환하디환한—
빛의 폭포 속에서
그가 소리쳐 물었다
“미륵이시여, 왜 이제야 나타났습니까?”
흰—
환하디환한—
빛의 강물이 그를 감싸 안고 흘렀다
나는 늘 그대와 함께 있었다
나는 늘 그대를 보고 있었다
나는 늘 그대에게 손 내밀고 있었다1
미륵의 고독 2
그가 떠났습니다
떠났다—고
나는 말하지만—
네, 이렇게 말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어요
곁에 있었던 누군가는
떠나지 않습니다
떠난 뒤에도 그 무언가는 남고—
나는 그것을 미래라고 불러야 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나는 그가 얻어다 준 미래를 먹고 기운을 차렸어요
풀이 원하는 따뜻한 것—으로
풀 곁에 조금 더 머물 수 있게 되어 고마웠지요
풀과 나는 가끔 그를 떠올리곤 했습니다
떠나기 전 그는 빛의 강물을 향해 묻고 또 물었지요
“지난 십이년간 정말 내 곁에 계속 있었단 말입니까?”
빛방울들이 미소 지으며 끄덕였지만—
그는 의심했습니다
그의 얼굴엔 기쁨, 슬픔, 갈망이 함께 있었지요
빛의 강물을 어깨에 두르고 그가 저잣거리로 떠난 뒤에
풀의 혈육들이 전해온 이야기를 가끔 들었습니다
—내 어깨에 올라앉은 미륵이 보입니까?
—나를 보고 있는 미륵이 보입니까?
그가 저잣거리 사람들에게 물으며 돌아다녔대
어떤 사람은 그의 어깨에서
미륵불의 형상을 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축 늘어진 개를
어떤 사람은 풀 한포기를 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대
겨울이 왔습니다
풀이 떠날 시간이었고
우리는 편안하게 작별했어요
풀이 떠난 뒤 남은 미래를
나는 알뜰하게 마저 살았습니다
남은 미래의 사흘간
하루는 웃으며 풀을 떠올렸고
하루는 나를 위해 울던 그를 떠올렸고
마지막 날엔
투시타2를 생각했습니다
미륵의 거처—
그러므로 비어 있는 곳
비어 있을 수밖에 없는 곳
내 미래의 마지막 순간이
완전히 비어 환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