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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제23회 창비신인시인상 수상작
이하윤 李霞玧
2004년 서울 출생.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재학.
hayun0124@naver.com
코트와 빛
이것 봐
내 검정 코트 안으로 고양이가 들어왔어
몸보다 한참 커다란 옷을 입고
산책로 한가운데에 앉은 네가 말했다
코트의 안감이 희게 반짝거렸다
나는 네 쪽으로 한껏 몸을 기울인
고양이를 쓰다듬는다
감긴 눈이 감긴 채로 흘러갈 수 있도록
얇은 피부 아래의 등뼈는 곧고 단정하고
오래도록 하얄 것이고
나는 왠지 이 온기를 품고
미동도 않는 고양이의 시간을
너와 건너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들켜서는 안 되는 마음
고양이의 것과는 너무도 다른 손이
모든 걸 망쳐버릴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말은 함부로 건넬 수 없겠지
기르는 삶에 대해
죽은 이의 손톱처럼 계속 자라날 나머지에 대해
산책하는 모든 것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우리를 지나친다
질문이 모르는 사람에게로 뻗어나가듯이
부드러운 털을 흩트리는
손의 윤곽이 너무도 선명하다
고양이가 코트를 떠난다
발목에 묶인 시간을 내려놓으며
우리는 결코 다다를 수 없는 곳으로
너는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의 뒷면을 털어낸다
중요한 짐을 두고 온 사람처럼
자꾸만 뒤돌아보고
겨우 등을 가진 사람이 되었구나
나는 멀어진다는 말의 처음을 알게 된 것 같다
너의 검정 코트는 여전히
다른 무엇을 품을 수 있을 만큼 넓고
그런 옆이 나에게도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어진다
마중
그릇은 주먹 하나 들어갈 정도의
깊이가 적당할 것이다
컵에 미지근한 물을 받아 가까운 곳에 둔다
물레에도 호흡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니
일종의 오래달리기 같은 거야
무른 흙과 구분할 수 없게 된 손등은
표정이 녹아내린 누군가의 얼굴을 돌보는 것 같다
그릇이 부풀고
손바닥은 손바닥이 아닌 것을 구분하는 일에 몰두하고
나는 당장 물레를 멈출 수도 있지만
분주한 바깥에 대한 생각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서
계속 표면을 다독인다
담긴 것이 새어나갈 틈이 있는지
살핀다
저녁을 옮기는 발들의 뒤축을 마주하려고 예고 없이
길 한가운데 주저앉고 마는 아이처럼
오래도록 주변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낯선 문을 두드리기 전의 몸짓으로
그릇을 넣었던 가마를
한번 더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다
공방의 시간이 지속된다
함께 숨소리를 흘려보내는 것만으로도
부드러운 바깥이 되어가는 중인 무언가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멀리서 아이가 뛰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나도 덩달아 가쁜 숨을 쉰다
심장이 아닌 곳에서도 박동이 느껴진다
짙은 흙냄새
습기가 공방의 창문에 닿아 부서지면
보이지 않던 자국들이 서서히 나타나고
하얀 손은
하얗게 구워진 그릇을 지켜낸다
파생
리얼 퍼 핸드메이드 라마는 뻬루에서 왔다
흩어지는 순간
더이상 라마가 아니게 되는 것처럼
진열대 위에 멈춰 있는 라마는
내게 다음 동작을 보여줄 것 같다
풀을 뜯어 먹거나 앞으로 우르르 쏟아지거나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하고 말을 거는
집으로 데려가는 사람도 있겠지
유구한 물건이라며
몇대에 걸쳐 물려줄 수도 있겠지
아무도 움직이는 라마를 실제로 본 적이 없는데
나는 손가락의 뼈마디를 짚어본다
모든 꼭대기는 이렇게 태어날 것 같다
번복되는 슬픔으로
라마의 털을 깎는 뻬루 사람의 품을 자꾸만 떠올린다
비어 있는 옆자리를
오래 들여다볼 수 있는 눈동자를
기다란 팔이 라마의 몸을 여러번 감았다가 풀면
몸의 굴곡을 따라 벗겨지는 털
그 속에 연약한 목을 드러내고 서 있을 라마
거대한 알이 품어지는 형식으로
상점을 헤매다보면
어느새 처음의 자리로 돌아와 있다
나는 아무것도 사지 않고 상점을 나온다
다음에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긴다
라마가 태어난 순간부터 걸을 수 있다는 건
상점의 주인이 알려준 사실이다
여운 시간
오랫동안 고요한 곳에 놓이면
아주 작은 소리도 들을 수 있게 된다
내가 일으키는 작은 소란에도 놀라게 된다
화분을 가꾸다가
식물은 사람이 들을 수 없는 주파수의
목소리를 가졌다는 말을 떠올린다
아기가 타인의 목소리를 듣고 말을 배우고
첫마디를 내뱉는 것처럼
식물은 내가 들을 수 없는 방식으로
이미 말했을지도 모른다
손목을 기울여 화분에 물을 준다
적당한 습도를 생각하고
줄기가 갈라져 나온 부분을 살핀다
모든 일은 조용하고 조심스럽게 이루어진다
누군가와 함께했던 장면이 기억에서 사라질 때에는
목소리부터 잊어버리게 된다고 하는데
그런 고요를 맞이하는 순간이 도착해도
나는 남겨진 얼굴들을 되짚어보며
끝없이 제자리가 되어갈 것 같다
식물의 몸은 귀의 모양과 닮아 있다
안쪽으로 고이거나 바깥으로 뻗어나가는
창문은 열지 않는다
방 안에 앉아 날씨를 짐작하고
나 아닌 다른 이의 목소리를 떠올린다
우리가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만 알 것이다
화분 받침대에 고여 있던 물이 흘러넘친다
대답처럼
다음의 믿음
천천히 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언제쯤 도착할 것 같은지는 묻지 않았다
교차로가 다 내려다보이는 창가
차는 차가운 상태로 천천히 우러나고
비 오는 날 우산을 기다리는 아이의 기분으로
눈앞에 보이지 않는 너의 걸음을 짚어본다
네가 지름길을 발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불현듯 만난 우리의 대화가
온통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 있었던 일들이라면 좋겠어
티백이 누구의 도움도 없이 말라가는 동안
나는 계속 미래에 대해 생각한다
모든 멈춤을 뚫고
저녁이 오는 일에 대해
젖은 냅킨 위에 지도를 그려본다
깜빡거리며 점등되는 가로등처럼 자꾸만
하나의 지점으로 고이는 모양
네가 오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아
빈 찻잔은 빈 찻잔들이
모인 곳에 가져다두고
기다린다
일정한 시간마다 사람들이 멈추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간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오는 다음의 약속들이 무수하고
나는 이미 너를 만난 것도 같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