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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금희 金錦姬
200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 『너무 한낮의 연애』 『오직 한 사람의 차지』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장편소설 『경애의 마음』 『복자에게』, 연작소설 『크리스마스 타일』 등이 있음.
장편연재 2
대온실 수리 보고서
정문 매표소에는 외국인 몇명이 표를 사고 있었다. 제갈도희는 이쯤 해서 사무실에 연락을 해놓자고 했다. 대문간에서 쫓아낼 정도로 냉혈한은 아닐 테니까. 제갈도희가 매표소 사무실로 들어가 내선전화로 통화하는 동안 나는 외국인들을 인솔해서 투어를 시작하는 해설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생활한복을 입고 헤드셋을 쓴 해설사는 영어와 일본어를 섞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영어 투어에 들어와 있는 일본 관광객들을 배려한 것 같았다. 또 한편에는 노인들이 모자를 맞춰 쓰고 대기하고 있었는데 해설사가 일본어를 한마디 할 때마다 등산스틱을 들고 있던 노인이 알은체를 했다.
“매화나무라고 하는구먼. 이 다리 옆이 죄 매화래. 야간개장 때 음악회도 한다고 하니까 지금 저 일본인들이 와, 하는 거야.”
“와,는 무슨 와. 요즘엔 이렇게 왕래해도 원수는 원수지.”
“그렇지. 그러니까 이승만 때는 말이야, 쪽바리놈들은 오지도 가지도 말라 했다고.”
“저기 아버님, 그런 말씀 하시면 안 돼요.”
해설사가 마이크로 노인을 불렀다.
“손님들이잖아요.”
노인은 뜨끔하는가 싶더니 “아니 역사가 그렇다는 거지, 나도 어려서 일본어를 배웠어요” 하고 오히려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니까요, 배우신 분이 그러면 더 안 되죠. 여기도 한국어 하시는 분들 계세요. 자, 에브리바디 레츠 고 백 투 조선. 사아, 쵸오센에타이무스릿뿌시떼미마쇼오까? 아버님도 궁궐 잘 보고 가시고요.”
세 언어로 상황을 정리한 해설사는 옥천교를 건너다 해치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그 당시 목조건물에는 화재가 큰 문제였기 때문에 상상의 동물 해치를 세워두어 궁궐을 화마로부터 지키려 했다는 내용이었다. 사무실과 연락이 닿았는지 제갈도희가 나와서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였다. 적어도 미팅을 못하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동궐관리청은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을 거쳐 문정문으로 나와 숲길을 걸으면 닿는 관천대 옆에 있었다. 세살문 창을 단 단층 한옥건물이었다. 제갈도희가 엎어져 있던 ‘외부인 출입을 금합니다’ 표지판을 세우며 관리청으로 들어갔다. 게양대에 달린 태극기가 건물의 검정기와에 닿을 듯 크게 펄럭이고 있었다. 게양대는 고궁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셈이었다.
건물 안은 책상과 파티션이 놓인 현대식 사무실이었다. 직원 한명이 제갈도희를 보고는 알은체했고 장과장이 지금 자리를 잠깐 비웠다고 알려주었다. 제갈도희가 대온실 공사를 담당하는 왕주웅 주무관이라며 그 직원을 소개해주었다. 제갈도희와 왕주무관은 담소를 주고받더니 며칠 뒤 상세실측 때 관리청과 건축사무소 실무자들끼리 점심식사를 같이하자고 얘기를 나눴다.
“완전 좋죠. 이 근처에 맛집도 많잖아요?”
“도희 디자이너님은 뭐 좋아하세요?”
“안 좋아하는 게 없죠.”
주무관이 잠깐 자리를 뜨자 제갈도희가 “저 주무관님이 올봄에 발령받은 신입직원이거든요. 그래서 아직 영혼이 살아 있어요” 하고 속삭였다. 나는 영혼이라는 말에 웃었다. 사십분을 기다려도 장과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주무관이 한번 전화를 걸어주었지만 연결은 안 됐다. 나는 기다리는 건 아무렇지 않았는데 제갈도희가 점점 숨을 가쁘게 쉬는 게 신경 쓰였다. 이 의협심 강한 곤줄박이는 금방이라도 깃털을 잔뜩 부풀린 채 일어나 이 무례한 대기 상태에 대해 항의할지도 몰랐다. 그전에 장과장이 왔으면 좋겠다고 초조해하며 공문을 재차 확인하는데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장과장이 아니라 아까 홍화문에서 봤던 해설사였다.
“연구사님, 벌써 네시차 끝났어요?” 왕주무관이 묻자 “비가 와서 종료했어요. 선생님들 모르고 있었어요?” 하며 그가 머리를 털었다. 누군가 창을 열었고 굵게 떨어지는 빗방울이 지붕을 흘러 처마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직원들이 일어나 무채색 고궁 담장들 위에 만들어지는 빗자국들을 지켜보았다.
“이런 풍광 보며 일하시면 좋겠다. 차분하고 조용하고.”
제갈도희가 해설사에게 말했다.
“그런데 빈집 지키는 기분 같은 걸 느낄 때가 있어요. 뭐라도 채워져 있는 곳은 대온실밖에 없잖아요. 원래 쓰임대로 있는 건 거기뿐이야.”
“왜요, 책고에 책들도 있잖아요.”
왕주무관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학예연구사 오아랑씨를 우리에게 소개했다.
“과장님 왔네.”
창밖을 보던 직원들이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차 한대가 들어오고 남자가 내렸다. 아랑씨도 탕비실로 사라지고 왕주무관만 입구를 서성이고 있었다. 그리고 사무실로 들어온 장과장이 매트에 신발을 터는 동안 우리의 방문을 알렸다. 우리를 힐끔 본 과장은 “그래?” 하고 반응한 뒤 책상으로 직행했다. 그리고 책상 위 공문부터 확인하더니 정말 믿을 수 없게 서랍에서 자를 꺼내 서류의 여백을 재기 시작했다. 미리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실제로 보니 너무 괴이하게 느껴져서, 혹시 이 모든 상황이 별로 재미없는 장난 아닌가도 싶었다. 하지만 장과장은 한참이나 공문을 살폈고 드디어 우리를 불렀다.
“저희가 자료 대출까지는 협조를 안 해요.”
장과장은 고개를 들지 않고 말했다.
“우리가 일해주려면 뭣 하러 수주를 줍니까? 우리가 하지.”
옆에서 제갈도희가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뭘 더 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있는 자료를 빌려달라는데 냉담하게 나오다니. 나는 괜히 일을 만들었나 싶었다.
“그러면 할 수 없겠네요.”
내가 책상 위에 놓인 공문을 집어들려고 하자 장과장이 볼펜을 들고 몇군데에 줄을 그었다. ‘해방 이후 복원’이라는 부분을 가리킨 그는 “해방 이후에는 케이블카랑 대관람차까지 세워서 아예 놀이공원을 만들었죠. 복원이라고 하려면 1983년이 기점이에요”라고 정정했다.
“표현이 그렇게 됐지만 그 무렵 복원공사에 대해서는 저도 알고 있어요. 동물원이랑 식물원도 옮겨 가고, 그래서 그 중건 보고서를 촬영하려는 것이고요.”
“설계도서 조사를 이렇게까지 해요? 나쁘다는 건 아닌데……”
장과장의 말투는 덤덤했지만 여전히 불만스러워서 무슨 의도로 질문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저희는 설계도서뿐 아니라 공사 완료 후 최종 수리 보고서까지 맡았어요. 그리고 문화재청 고시 문화재수리 설계도서 작성기준령 5조를 보면 수리대상과 환경에 대한 철저한 고증 및 현황조사에 근거해 작성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고요. 법령에 명시된 이상 따를 수밖에 없죠. 제대로 된 고증 없이는 제대로 된 복원도 없다고 저희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사람 얼굴 대신 종이만 보고 있던 장과장은 마지막으로 ‘시민에게 개방’이라는 부분에 흐릿한 선을 그으면서 “그 당시 경성 사람들을 시민이라고 표현할 수는 없을 거예요”라고 한 뒤 결재란에 싸인했다. 관리청의 자료실은 창덕궁 궐내각사 건물에 있다고 했다. 아까 왕주무관이 잠깐 언급했던 책고 건물이었다. 아랑씨가 우리를 안내하겠다며 나섰고 우리는 사무소를 나가 이제 비가 그친 풀밭을 걸었다. 통명전을 통과해 계단을 오르니 창경궁에서 창덕궁으로 넘어가는 문이 있었다. 현판은 없지만 ‘함양문’이라고 아랑씨가 알려주었다.
아랑씨는 건물들을 지날 때마다 시선 닿는 곳들을 설명했다. 저 건물이 왕과 왕비가 살았던 희정당이에요. 저기 가게는 원래 관리들이 회의하던 빈청이었는데 일제시대 때 자동차 보관하는 어차고가 되고 지금은 까페로 써요. 호박식혜가 맛있어요. 이 밑으로 가면 이방자 여사가 계셨던 낙선재가 나와요. 창덕궁 건물을 바라보자 그 담을 끼고 있는 원서동이 더 가깝게 느껴졌다. 고궁에 곁붙어 있다는 건 그 동네의 가장 큰 특징이었지만 그때의 내가 그곳을 특별하게 느끼기 시작한 건 그 때문은 아니었다.
그건 주유소에서 내 코트를 망쳐버린 금성무 역시 원서동에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였다. 번호를 받은 건 나였지만 세탁비를 물어내라고 연락하지는 못했다. 차라리 내 연락처를 알려줬어야 했는데, 나는 뒤늦게야 생각했다. 그러면 물때를 기다리듯 편안하게 연락을 기다리면 되는데.
강화보다 서울이 더 춥게 느껴졌던 나는 4월까지 코트를 입었고 옷자락에 묻은 기름자국도 그렇게 봄까지 학교생활을 함께했다. 리사와 나는 학교에서 바로 옆 반이 되었다. 한 반이 아니니 서로의 생활을 낱낱이 알 수는 없어도 관심을 가지려 한다면 충분히 서로를 살필 수 있는 거리였다. 리사는 대체로 조용히 학교생활을 하는 것 같았다. 쉬는 시간에 지나다가 유리창을 통해 힐끔 보면 십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에도 책을 펴놓고 공부를 하고 있었다. 친구가 없는 건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전교 1등만 한다는 키 작고 안경 쓴 여자애와 급식을 함께 먹고 교정을 거닐었다. 하지만 그애는 전혀 인기가 없어서 리사가 정말 좋아서 그애랑 다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언젠가 붓글씨시간에 누군가 실수로 전교 1등에게 먹물을 쏟았는데 선도위원회에 회부되어 징계를 받았다고 했다. 의도적이라며 부모가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병원을 운영하는 그 부모는 학교 일에 꽤 많이 간여하고 있었다. 리사와 내가 한집에 사는 것을 모르는 애들은 내 앞에서 전교 1등을 빽으로, 리사를 빽라이트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그리고 리사가 빽에게 달라붙어 있는 것이 일종의 후광효과를 누리기 위해 머리를 쓰는 것이라고 흉봤다.
학생 수가 많아서 그런지 교실은 마치 퍼즐판처럼 세밀한 경계로 각자 나뉘어 있었다. 전교생이라고 해봤자 서른명도 되지 않는 석모도에서는 그물처럼 성글었던 구분들이 여기서는 한층 촘촘해졌다. 어디 사는지, 출신 초등학교가 어딘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어느 학원을 다니는지가 너무 중요한 기준이었다. 내 하굣길을 누가 볼까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어 보였다. 학교가 끝나면 아이들은 자기 그룹의 승합차를 타고 일시에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혼자 먼 길을 돌아 지하철을 타면서 대체 리사가 뭘 걱정하고 있는지 냉소했다. 아무도 누구도 관심 없다. 새학기가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런 문장들을 마음속에 끊임없이 써보는, 리사의 충고대로 덜 웃는 아이가 되었다. 아무도 누구도 관심 없다, 나에게,라고 더 정확히 되뇌면 그 차가운 말에 마음까지 얼어붙을 듯하면서도 곧 그것에 지지 않겠다는 미약한 저항감이 들곤 했다. 음울함의 풀장으로 뛰어드는 건 어쩌면 어떻게든 힘을 내어 수면 밖으로 나오고 싶어서일지도 몰랐다. 그러던 4월의 어느날, 동네로 접어드는데 누군가 자전거를 타고 가다 말고 나를 불렀다. 고개를 들었더니 꽃샘추위가 만만치 않은 계절에 벌써부터 티셔츠 하나만 달랑 입은 금성무가 있었다.
“아직도 코트 입고 다녀?”
잘생긴 이목구비 때문에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얼굴이지만 나는 누군지 못 알아본 척을 했다. 금성무는 자전거에서 내리더니 내 코트자락을 가리키면서 “아직도 세탁 안 한 거야?” 하고 다시 말했다.
“지우지도 않았으면서 왜 연락 안 했어?”
“내가 공부가 바빠서.”
“얼마나 바쁘길래 옷도 안 빨고 다녀?”
“모의고사가 멀지 않아서.”
“모의고사 그거 학기 초에 보는 거 아니지 않아? 내가 공고 다녀서 잘은 모르지만 암튼 복장단정은 학생의 기본이다.”
나는 자세를 바꿔서 기름자국이 보이지 않게 했다. 이렇게 만든 게 누군데 왜 내가 충고를 들어야 하는지. 서서히 열이 받기 시작했다.
“내가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서 세탁소가 어딨는지 몰라.”
“너 어디 사는데?”
나는 손가락으로 낙원하숙의 나무대문을 가리켰다. 저녁 햇살을 받은 대문에서는 손잡이 부분만 반짝 빛났다.
“아, 일수집 할머니네 사는구나.”
나는 놀라서 눈이 동그래지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금성무는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그리고 나를 데리고 럭키세탁소로 갔다.
“순신이 왔냐?”
세탁소 사장이 다림질을 하면서 물었다.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뭘 다리고 있나 봤더니 지폐들이었다. 세종대왕과 퇴계 이황의 얼굴이 팽팽하게 펴지고 있었다. 순신이라고 불린 금성무는 내게 코트를 벗으라고 했다.
“그러면 내일부터 뭐 입어?”
나는 누가 코트를 뺏기라도 할 듯 주머니에 넣은 손으로 그 안의 솔기를 꽉 쥐었다.
“요즘 같은 날씨에 코트 입고 다니는 게 정상이니? 내일부터 안 입고 다녀봐. 다닐 만할걸?”
금성무는 그렇게 설득했고 세탁소 사장도 “지금은 겨울옷을 싹 정리해서 넣을 때지. 입을 때는 아니야” 하고 도왔다. 하기는 강화에 있었다면 지금까지 코트를 입고 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추웠고 그건 몸을 덥히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나를 안정적으로 눌러줄 얼마간의 무게가 필요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나 같은 건 누군가 놓친 유원지 풍선처럼 날아가버려도 그만일 테니까. 대문 밖만 나가면 아는 얼굴들이 나타나는 섬과, 사람 물살을 헤치고 다닐 때마다 생소한 얼굴들이 차고 슬프게 다가왔다 사라지는 이곳의 봄은 완전히 다른 계절이었다.
나는 눈치를 보다 책가방을 내리고 코트를 벗었다. 하지만 최후의 자존심을 지킬 요량으로 직접 세탁소 사장에게 내밀었다. 코트를 받아 들려고 기다리던 금성무는 내 얼굴을 잠깐 살피더니 머쓱해져 손을 거뒀다. 세탁소 사장은 사흘 뒤에 찾으러 오라고 했다.
“내가 찾아서 갖다줄게. 우리 집이 바로 여기거든.”
금성무가 가리킨 곳에는 골무늬 플라스틱 지붕의 단층집들이 서 있었다. 지붕과 복도를 공유한 단칸방들이 붙어 있는 형태였다. 창덕궁의 사괴석 담장과 집들 사이에는 소보로빵의 표면처럼 덩어리진 시멘트 반죽이 더덕더덕 붙어 있었다. 금성무는 세탁소 일을 처리하더니 잘 가라, 하고 다시 자전거를 타고 도로 쪽으로 달려갔다. 행인들을 요리조리 피해 가더니 아는 누군가를 만났는지 한 손을 들어 흔들었다. 막상 웃옷을 벗어보니 별로 춥지는 않았다. 나는 봄의 저녁 바람을 잡을 듯이 손을 한번 내밀어보았다.
웅장한 팔작지붕을 한 인정전 앞에는 어도가 펼쳐져 있고 양편의 품계석들 사이로 관광객들이 여기저기 돌아보고 있었다.
“연구사님이 생각하는 창덕궁 핫스폿은 어디예요? 저도 한번 가보게요.” 제갈도희가 물었다.
“인기 있는 곳은 정말 많죠. 누구는 후원이 최고다, 누구는 일월오봉도와 옥좌가 놓인 인정전이 멋지다. 그런데 저는 낙선재 같아요. 모던하고 섬세하고. 꽃담과 만월문 창살도 유명하지만 저는 거기 아궁이 빙벽이 그렇게 마음에 들어요.”
“아궁이벽이요? 전문가라 디테일이 다르시네요.”
그 벽은 낙선재 누마루 아래 있어서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데 특이하게도 깨진 얼음 모양을 하고 있다고 했다. 아궁이 불씨를 막는 화방벽으로 화재를 예방하려는 바람을 담아 얼음을 새겨넣었는데 마치 벽화처럼 보이기도 한다고. 불길을 덮으려는 깨진 얼음들이 어딘가 조선의 역사를 생각하게 한다고. 저마다 갈라진 운명이라 다시 하나로 맞춰보기 어려울 정도로 나뉜 세계같이.
“연구사님은 역사 전공이세요?” 내가 아랑씨에게 물었다.
“아뇨, 문화예술경영 전공했고 어공이에요.”
내가 어공이라는 말을 못 알아듣자 제갈도희가 ‘어쩌다 공무원’의 준말이라고 알려주었다. 공무원시험을 거치지 않은 임기제 공무원을 가리킨다고.
“영두씨는 역사 전공하셨어요? 건축?”
“아뇨, 저는 국문과 나왔는데 어쩌다보니 지금 수리 보고서를 쓰게 됐네요.”
“영두님은 석모도 헤밍웨이라고 하십니다.”
제갈도희가 빗물에 파인 웅덩이를 넘으며 말했다.
“이렇게 꼼꼼히 자료 찾아달라고 하는 분 처음이에요. 더 큰 공사 할 때도 없었어. 저도 도울 일 있음 도울게요.”
“감사합니다.”
“저한테는 공문 안 쓰셔도 돼요. 나 그런 거 싫어해.”
우리는 같이 웃다가 봉모당에 다다랐고 700년 된 향나무 앞에 섰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는 높이보다 부피를 키워 양옆에 육중한 가지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오래되어 이제 광물처럼 단단해 보이는 가지에는 나뭇결이 뚜렷하게 소용돌이쳤다. 우리는 잠시 냄새를 맡았다. 아랑씨는 향나무 어딘가에 원숭이가 있다며 찾아보라고 했다.
“원숭이를 풀어놨어요?”
제갈도희와 내가 이리저리 둘러봤지만 오목눈이들이 긴 꼬리를 흔들며 가지를 옮겨 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아랑씨는 바닥까지 닿은 향나무 가지를 가리키며 관람객들이 원숭이 모양이라고 한다고 알려주었다. 가지의 휜 모양이 정말 원숭이 얼굴과 굽은 등처럼 보였다.
“원래 창경궁에 동물원이 있었다고, 저희 부모님도 그런 거 기억하시더라고요.”
“영두씨 이십대죠? 우리 중에는 그때 일 기억하는 사람 없을걸요. 서울대공원으로 다 옮겨가고 한참 뒤라서.”
우리는 봉모당을 가로질러 책고에 도착했다. 붉은 나무판으로 마감한 다섯칸짜리 건물이었다. 제갈도희가 나무벽 아랫부분을 가리키면서 통풍을 위해 일정하게 구멍을 뚫었다고 알려주었다. 책고에는 원래 궁중의 책들이 보관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대부분 연구원 등지로 옮기고 동궐관리청에서 관리하는 정부간행물들이 주로 채워져 있었다. 필요하다고 해서 현대식 건물을 세울 수 없는 상황이다보니 복원된 궐내각사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내부로 들어가니 윙윙 돌아가는 제습기 소리가 들렸고 철제책장들이 널찍한 간격으로 서 있었다. 책장을 살펴보며 걷는데 밑선반에 모여 있는 액자들이 눈에 띄었다.
“옛날 관리들 사진이에요.”
액자틀에는 먼지가 수북이 내려앉아 있었다. 아랑씨가 쪼그리고 앉아 하나씩 넘기며 이름을 읽었다. 궁내부차관이자 창경궁 공사 책임자였던 코미야 미호마쯔(小宮三保松), 박물관, 동물원, 정원 및 식물원을 담당하는 사무관으로 출발해 창경궁 총책임자로 20년을 일한 스에마쯔 쿠마히꼬(末松熊彦), 그의 뒤를 따라 창경원의 책임자가 된 시모꼬오리야마 세이이찌(下部山誠一). 창경궁사를 사전조사했을 때 한번씩 나왔던 이름들인데 사진으로 보자 실감이 더 뚜렷해졌다. 아랑씨는 동궐관리청 사업으로 역사서를 만들 때 시모꼬오리야마 세이이찌를 찾아보려 한 적이 있었다고 했다. 전임 동궐관리청장에게 전해 들은 얘기였다. 1990년대의 일이었고 당시 그가 여든다섯 정도의 나이였기 때문에 충분히 인터뷰가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그의 행방을 찾을 수는 없었다고 했다.
“유명한 조류학자이기도 하고 일본이 패전할 때까지 여기를 지켰던 사람이라 궁금했겠죠.”
아랑씨는 여러 액자를 넘기다가 한 사진에 멈췄다. 동그란 안경을 쓰고 입매가 얇은 남자가 흰색 셔츠를 넥타이도 없이 입고 있었다. 아랑씨는 어쩌면 내게는 이 사람도 중요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어려서 창경궁 대온실에 원정(苑丁)으로 취직해 사무국 지원으로 일본 원예 유학을 한 뒤 돌아와 식물원 주임이 되었으니까. 나는 왜 그 이름을 놓쳤을까 생각하며 일본 이름도 있을까요, 하고 물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랑씨는 『인사관계철』을 꺼내보더니 ‘키노시따 코쭈우’라고 알려주었다.
“자기 성을 파자해 성을 만들고 조선 이름을 일본어로 그대로 옮겼네요. 그 당시 창씨개명이 내키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이 그랬거든요.”
나는 수첩을 꺼내 박목주(朴木柱), 키노시따 코쭈우라고 메모했다.
리사는 낙원하숙 사람들과 대체로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딩 아주머니와는 거의 앙숙에 가까웠다. 딩 아주머니가 하숙집 일을 건성으로 한다고 불평했고 낙원하숙을 ‘락원하숙’이라고 하는 말씨에조차 시비를 걸었다. 딩 아주머니는 리사가 욕심이 너무 많고 음흉하다며 혀를 찼다. 그렇게 전화통만 붙들고 있을 거면 월급을 덜 받으시라고 맹랑하게 말했다가 딩 아주머니가 며칠 나오지 않은 적도 있었다.
할머니는 창신동에 있는 딩 아주머니 집까지 사과를 하러 갔다. 나도 동행했는데 그렇게 할머니 외출을 돕는 일이 내 주된 임무였다. 할머니는 별말 없이 비탈길을 걷다가 “딸기 파는 데가 있을까” 하고 물었다. 딸기를 사 들고 간 딩 아주머니네 집은 계단이 가파르게 난 단독주택의 2층 방이었다. 아주머니는 방에 누워 있다가 형님 왔어요? 하고 문을 열었다.
“내가 괘럽와서 못 겐듸겠어요. 열몇살 어린 것 싀집살이를 다 하고. 같이 늙어간 형님 봐서 참아왔어도 이제는 전부 싫어요. 상황 되면 중국도 다시 갈 거고.”
한탄하는 딩 아주머니 얼굴을 할머니는 별말 없이 멀거니 바라보았다. 마치 그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돌릴 수 있다는 듯이. 그때 나는 노인들의 눈에는 아주 진득한 감정이 들어 있다고 느꼈다. 단일하고 명징한 진심 같은 것.
“갈 돈은 있나? 고향 갈 돈 모아놨나?”
그 말에 딩 아주머니는 대답을 못했다. 그날의 대화로 알게 된 사정은 이랬다. 할머니는 오랫동안 동대문 평화시장에서 여성복 가게를 했고 딩 아주머니는 도매로 물건을 떼 가 중국에 팔던 보따리장수였다는 것. 나중에는 아예 한국에서 일할 생각으로 들어왔지만 성격이 허술해 돈을 모으지는 못했다는 것. 할머니가 가게를 접고 나서는 소식이 끊겼다가 우연히 재회했는데 그사이 술과 도박으로 몸도 상하고 생활도 엉망인 상태로 할머니네 하숙집 찬모로 들어왔다는 것.
“형님도, 친손네도 아닌데 너무 공 들이지 말아요. 기런다고 그 집 아바이도 글코 형님 은공을 알 애가 아이에요.”
나는 리사가 친손녀가 아니라는 말을 듣고는 놀랐다.
“그게 아깝나?”
“아이, 아깝지. 늙으면 돈이 있어야지 더 늙어서 어디케요?”
“그게 무섭나?”
그때의 할머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아깝지 않고 무섭지도 않은 할머니는. 어떤 앞날이 눈에 보였기에 아깝지 않고 무섭지 않았을까. 나는 리사의 못된 점을 이야기하는 딩 아주머니에게 열렬히 동의했지만 그래도 리사가 구제불능인 듯 말하는 게 마냥 좋지는 않았다. 리사에게는 그렇게 단정할 수 없는 여지가 있었다. 어쩌면 그런 막연한 기대조차 리사가 사람들을 조종하는 자기만의 기술이었는지 모르지만. 리사가 하는 미운 짓에는 본심이 아니리라는, 어떤 신경증적인 예민함과 미숙함, 오래전부터 계속되어왔을 듯한 불만족 탓이리라 이해되는 측면이 있었다. 그런 서사는 머리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리사를 보면 그냥 느껴지는 것에 가까웠다.
할머니가 딸기 봉지를 열자 딩 아주머니는 “따기가 여태 나와요” 하고 은근히 반겼다. 할머니는 딸기 꼭지를 따서 씻으면서 하숙집으로 나오라고 아주머니에게 다시 일렀다. 딩 아주머니는 양평 어디 식당에 나가기로 벌써 얘기가 됐다고 했다. 야간 일이라서 일당도 세다고.
“돈으로 일을 하면 안 되고 사람 보고 하는 거라고 말 안 했나.”
“형님은 돈놀이도 하면서 별말을 다 합니다.”
그 말을 하며 딩 아주머니는 농담하듯 웃었지만 할머니는 전혀 웃지 않았다.
그날 창신동에서 하숙집으로 돌아오는데 할머니가 “내가 영두 할머니 어떻게 만났는지 얘기했던가?” 하고 물었다. 나는 못 들었다며 반색했다.
할머니는 지금과 정반대로 아주 추운 날이었다고 말했다.
“한겨울이었어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무 급하게 물었다가는 이야기라는 것이 사라져버릴까봐 경계하듯이. 외할머니 얘기를 듣는 건 엄마 얘기를 듣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네살 때 사고로 세상을 떠난 엄마는 긴 머리카락과 자주 입던 청바지색 정도로만 기억에 남아 있었다. 외할머니가 엄마 얘기를 해주기는 했지만 언제나 그 끝이 울음이었기 때문에 자주 들을 수는 없었다. 알고 싶은 만큼 알기 위해서는 누군가 과거에 대해 얘기해주어야 했다. 어떤 것이라도 들어서 차곡차곡 모아놓아야 했다.
“얼마나 추운 겨울이었는지. 강화포구 시장에서였는데, 바구니에 얹어 나온 생선들 잇몸이 다 시려 보였지.”
생선이 잇몸이 있었던가. 숭어, 병어, 조기, 아귀까지 강화포구의 물고기들이 다 떠올랐지만 그 물고기들의 잇몸은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빨이 있으니 당연히 잇몸도 있겠지. 나는 잇몸이 시릴 정도로 추웠다는 상황을 상상해보기 위해 혓바닥을 앞니 위로 문질러보았다.
“저희 오잘머니는 뭐 하고 계셨는데요?”
“생선을 팔고 계셨지.”
그다지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생선장수였던 할머니가 생선을 판 건 일상적인 일이었으니까.
“할머니는 뭐 하고 계셨고요?”
“나는 좌판 보며 서 있었고.”
장사하러 나온 외할머니와 손님으로 만났다는 건 뭔가 시시한 느낌이었다. 그래도 수수께끼 하나는 푼 셈이니까 나는 실망감을 감추며 네, 하고 대답했다.
“한참을 보고 있으니까 고기 살라고요? 하고 물어. 내가 돈은 없어요, 했더니 영두 할머니가 어디 먼 데서 오셨시꺄? 하고 한참 보더니 물고기 한 사라를 그냥 주더라고. 쪄 먹어요, 하면서.”
“뭐였어요?”
“조그맣고…… 그러니까 그…… 망둥어, 말린 망둥어.”
할머니는 버스의 의자 손잡이를 붙들며 잠깐 웃었다. 나는 둘의 우정이 강화 바다에 흔하디흔한 망둥어에서 시작되었다는 걸 알면 아빠가 재미없어하리라고 낙담했지만 그래도 알려는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강화는 왜 가셨어요?”
생선 살 돈도 없으면서 시장에는 왜 서 있었을까 싶어서 내가 물었다. 할머니의 표정은 별안간 고요해졌고 더 정확히는 아주 시려 보였다. 초여름 찌는 버스 안에서 오직 할머니에게만 시린 눈이 내리고 있는 듯했다. 엄마 얘기를 듣고 싶어 시작한 대화에서 할머니에게로 초점이 이동하는 걸 느꼈다. 좀 이상한 기분이었다. 비로소 할머니가 눈에 들어오는 것 같았다.
“강화가 아버지 고향이라서 가봤지.”
“그러면 할머니도 저처럼 강화 사람이에요?”
할머니는 무릎 위에 올려놓았던 낡은 가방 손잡이를 한 손에 쥐면서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자신은 일본 토오꾜오에서 태어나 아홉살이던 1943년에 한국으로 왔다고 알려주었다.
시간은 흘러 내게도 친구들이 생겼다. 대체로 일과시간에 함께 지내다가 학교가 끝나면 떨어져 나와 혼자가 되는 패턴이었지만 그래도 한결 나은 생활이었다. 그중 안나는 나처럼 학원을 다니지 않는 애라서 우리는 종종 방과 후를 함께 보냈다. 떡볶이를 사 먹거나 노래방에 가거나 한강공원을 걸었는데, 안나는 명랑하고 목소리가 크고 꼭 변성기 때문이 아닌데도 음색이 허스키했다. 일정한 간격으로 얼굴을 찡그리는 틱 증상이 생겨 그 때문에 초등학생 때도 밤 열시까지 다니던 학원을 쉬고 있었다. 스트레스를 줄여야 한다는 의사의 권유 때문이었다.
“그냥 모른 척해줘. 그러면 돼.”
어느정도 친해지자 안나가 부탁했다. 틱이 시작되면 안나는 콧구멍을 벌렁거리고 미간을 쉴 새 없이 찡그렸다. 정작 자기는 의식을 못한다고 했다. 지적당하면 당황해서 더 심해지니까 내색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리사가 내 일거수일투족을 마음에 안 들어했다면 안나는 나의 이런저런 면들을 지나치게 좋아해. 마치 스프레이 방향제처럼 칭찬을 뿌려댔다. 내가 금방이라도 돌아설 것 같아 붙잡아놓고 싶어하는 사람처럼. 달리기가 빠른 것과 수학과목을 잘하는 것, 탄탄한 팔근육을 가진 것과 짐 캐리 흉내를 잘 내는 것, 새 이름을 잘 알고 벌레를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사소한 점까지. 그러면 나도 칭찬으로 답해줘야 하나 싶었는데 지적이든 칭찬이든 그런 평가를 왜 서로서로 열심히 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수시로 하트가 찍혀 휴대전화에 도착하는 안나의 우정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너, 나랑 얘기 좀 해.”
어느날 학교에서 돌아왔는데 리사가 나를 불렀다. 그리고 나를 데리고 대문 밖으로 나오더니 빨래터 쪽으로 올라갔다가 주위를 살피다 다시 큰길로 내려왔다. 그리고 걸었다. 창덕궁 앞을 서성이더니 매표소에 줄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는 상대적으로 한적한 창경궁으로 갔다.
“너, 학생증 있지?”
학생증을 꺼내자 리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내원에게 보여주라고 했다. 무료로 통과한 우리는 진귀하게 생긴 소나무들을 지나 인적이 드문 춘당지 앞에 섰고 물음표처럼 목을 세운 오리들이 수면 위를 떠다니는 걸 바라보았다.
“너 그 틱장애한테 우리 할머니 일본사람이라고 말했니?”
리사가 날카롭게 물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 할머니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서울 할머니가 그렇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리사가 경고한 대로 우리 동네가 어디인지 떠들지 않았고 리사와 함께 하숙하고 있다고도 하지 않았다. 그냥 아는 할머니네 집에 와 있는데 할머니는 일본에서 태어나신 분이라 가끔 일본어를 한다고 무심결에 말했을 뿐이었다.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안나가 일본어를 재밌어했기 때문에 한 얘기였다. 내가 그렇게 해명했는데도 리사는 분이 풀리지 않는 것 같았다.
“너 한국사람들이 일본사람들 얼마나 싫어하는지 몰라? 그런데도 그런 얘기를 했니?”
“네 얘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무슨 상관이야?”
“그러다 소문나는 거야, 그러다 들키는 거라고.”
나는 리사가 터무니없이 트집을 잡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할머니는 아버지가 강화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나? 내가 그렇게 응수하자 리사는 입가에 냉랭한 미소를 띠었다.
“뭘 안다고 나대는 거야? 할머니는 일본사람이야. 자기 엄마도 일본사람이고 뭣보다 자기가 그렇게 생각해. 우린 아니야. 우리랑은 피 한방울 섞이지 않았다고 아빠가 말했어.”
“그러면 너는 왜 여기 와 있는 건데? 무슨 자격으로 할머니랑 살 수 있는 건데?”
내가 그렇게 공격적으로 묻자 리사는 모욕감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것 같았다.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큰 눈에 금세 적의를 담아냈다. 시작을 알 수 없어서 언제 그칠지도 예감할 수 없는 그 맥락 없는 적의를.
“양딸로 우리 증조할머니집에 살았거든. 그래도 우리가 그나마 남은 친척이라고. 우리마저 없으면 정말 남밖에 없는 거야. 딩 아줌마 같은 사람들이 돈이나 뜯어내려고 옆에 있을 뿐인 거지. 할머니는 매번 남을 믿고 매번 사기를 당한다고 아빠가 그랬어.”
“사람을 믿는 게 잘못은 아니야. 네 말대로 그렇게 혼자라면 믿어야 살 수 있으셨겠지. 어떤 사람들은 그래서 매번 누군가를 믿기도 해.”
내가 항변하자 리사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나한테 예의를 좀 지켜줬으면 좋겠어.”
나는 내친김에 한마디 더 말했다.
“예의라고?”
리사는 바람에 헝클어진 긴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정돈했다.
“내가 어떤 친구와 무슨 얘기를 하든, 학교생활을 어떻게 하든, 신경 쓰지 말라고. 그게 네가 원했던 거잖아. 나도 네가 누구랑 놀든, 같이 어울리는 친구가 어떻든 말 안 하잖아.”
“할 말이 있는데 참으신다는 거네, 되게 고맙다.”
“당연하지, 너 정말 그 빽이라는 애가 좋아서 같이 다니는 거야?”
리사는 대답하지 않고 춘당지를 바라보며 섰다. 그새 춘당지에는 저녁 윤슬이 생겨나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환한 풍경과 달리 대화는 밤처럼 어둡다고 생각했다. 이따금 원앙들이 일으키는 잔물결 위로 나무와 진달래와 오래된 석탑이 드리워지면서 마치 연못 속에는 그것과 동일한 세계가 하나 더 있는 듯한 아득한 착각까지 드는데, 서로를 할퀴어대는 얘기에나 열을 올려야 한다니. 순간 그 눈부신 풍경은 불필요하고 심지어 무자비하게 느껴졌다.
“필요해서 친구로 지내는 것뿐이야. 막상 지내보면 그렇게 최악도 아니고.”
리사는 어미를 따라 조르르 유영하는 새끼 원앙들을 보며 말했다.
“걔가 다니는 학원, 우리 같은 애들은 레벨테스트도 못 받는 곳들이야. 난 고등학교까지 여기서 다닐 생각이 없어. 어떻게든 미국에 가야 해. 나는 부모도 만만치 않게 싫거든. 너랑은 꽤 다르게 아주 다크한 인생이라고.”
어쩌면 그건 가까워지는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조금은 서툴고 때론 과격하게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었을지도. 서울 지리에 익숙해질수록 학교생활에 적응할수록 나는 처음 강화에서 올라왔을 때 나를 당혹스럽게 했던 리사의 무게감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춘당지에서의 대화를 계기로 우리는 더더욱 어색하고 냉랭한 사이가 되어 아예 등교조차 같이하지 않았다. 내가 일부러 리사와 다른 버스를 타기 위해 머리를 빗는 척하며 밍기적거리고 있으면 그 사정을 다 안다는 듯 할머니가 바라보고 있기도 했다.
나는 우리 사이의 갈등을 감추거나 하면서까지 할머니에게 잘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리사가 그런 못되고 배은망덕한 애라는 걸 알리고 싶은 마음이 있기도 했고, 하지만 그쯤은 이제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나도 여기에 적응했다는 걸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그런 식으로 서로의 성장을 견주고 있었다.
기말고사가 다가오자 음악 실기평가가 예고됐다. 평가 방법은 악기연주였다. 악기를 배우지도 않고 악기 실기평가를 치른다니? 의문을 품은 사람은 나뿐이었다. 다른 애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아무 질문도 하지 않았다. 안나에게 묻자 그냥 평소에 하던 악기를 연주하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꼭 클래식일 필요도 없고 가요나 찬송가를 연주해도 되는데, 다만 피아노는 하는 애들이 너무 많아서 좋은 점수 받기가 어렵고 좀 희소한 악기가 좋다고.
안나는 둘 다 그리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바이올린과 플루트 중에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내게 물었을 때 리코더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답했는데, 안나는 농담인 줄 알고 웃었다가 표정을 수습하며 희소하기는 할 거라고 간신히 위로의 말을 생각해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리코더를 연습했다. 초등학생이나 부는 장난감 같은 악기였지만 별수 없었다. 리사는 할머니에게 당분간 빽네 집에 가서 피아노 연습을 하고 오겠다고 했다. 할머니는 그렇게 신세를 질 거면 과일이라도 사서 가라고 했지만 리사는 걔네 집은 백화점 과일밖에 안 먹어요, 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백화점 과일이라고 하나 다른 거 없어. 한국사람들은 거뜻하면 사치를 부려서는.”
지나가던 딩 아주머니가 한마디 했다. 리사는 그런 아주머니에게 아무 말 하지 않았고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붙들고 국을 떠먹었다. 딩 아주머니가 며칠 안 나온 게 효과는 있어 보였다. 그날부터 나는 좋아하는 영화의 수록곡인 「에델바이스」를 선택해 밤낮으로 리코더를 연습했다. 내 연주를 좋아하는 하숙집 사람들은 없었다. 이렇게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데 음악선생이 높은 점수를 줄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그래도 낙제보다는 나으니까, 나는 불고 또 불었다.
그러던 어느 밤, 유화 언니가 방문을 두드렸다. 언니는 하숙집을 여관방처럼 썼고 들어오는 날보다 들어오지 않는 날이 더 많았는데, 그날은 공연을 끝내고 아주 피곤한 몸으로 귀가한 참이었다. 나는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온 언니의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뱀 나온다, 뱀 나와. 창덕궁 뱀떼가 다 몰려들겄네.”
“언니, 거기 뱀이 있어요?”
“당연히 있지. 후원에 살모사 있어.”
리코더를 부느라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던 나는 더위가 삭 가시는 기분이었다. 그러고 돌아갈 줄 알았던 언니는 오히려 방으로 한발 들어오더니 무슨 애들 방이 이렇게 깨끗하냐고 정 없어 보인다고 했다. 딩 아주머니가 가장 욕하는 방이 유화 언니 방이었기 때문에 나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키득키득 웃었다.
“실기 준비하냐? 리코더 갖고 되겠냐?”
언니는 내가 설명하지 않았는데도 대번에 상황을 알았다. 나는 할 줄 아는 게 없다고 대답했다.
“어차피 그런 거면 언니가 추천해주는 걸로 해라. 내가 리코더보다는 점수 더 받게 해줄게.”
보름도 안 남았는데 무슨 악기를 지금 배워서 한단 말인가. 하지만 어차피 리코더보다는 나을지도 몰라서 “어떤 건데요?” 하고 기대를 담아 물었다.
“장구.”
“장구요?”
나는 실망과 우려를 담아서 되물었다. 장구라고 하면 이따금 술에 취한 동네 할아버지들이 메고 나와 당신들끼리 신나고 즐거워하며 덩덩거리던 그 악기 아닌가. 초등학생 때 학습과정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실제 장구는 구경도 못하고 나무책상을 두드려 대강 배우고 지나갔던 그 악기 아닌가. 내 말을 들은 유화 언니는 참 한국교육이 문제다, 하고 혀를 찼다. 우리 문화의 좋은 건 다 버리고 외국 것만 멋지고 폼 나는 줄 안다는 거였다. 정작 외국에서는 ‘난타’라고 해서 사물놀이 리듬을 사용한 넌버벌 공연이 대흥행을 하고 있다고 했다. 유화 언니가 지금 하고 있는 연극도 그것이라고 덧붙였다.
“언니도 난타 공연자예요?”
“아니, 난타는 아니고 비슷한 거.”
아무튼 언니는 생각 있으면 내일 소극장으로 오라고 했다. 약도를 그려주었는데 집에서 아무리 가까워도 혜화동까지 걸어가본 적은 없어서 찾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너, 서울 온 지 몇달인데 대학로도 안 와봤어?”
“대학로는 대학생들만 가는 데 아니에요?”
내 말을 들은 언니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 종로는 종들만 가냐?”
그 밤은 리코더냐 장구냐를 결정해야 하는 일생일대의 밤이었다. 빽네 집에서 피아노 연습을 하고 돌아온 리사는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책상 위를 피아노 건반 삼아 계속 손가락 연습을 했다. 대체 얼마나 높은 점수를 받으려고 저러나 싶으면서 나도 오기가 났다. 희소하기로 따지자면 피아노보다야 장구 아닌가. 마침내 아침이 되고 한번 경험 삼아 대학로에 가보는 게 좋겠다는 결론이 들었다. 어차피 남는 게 시간이니까. 그렇게 대학로까지 걸어 내려갔다. 열네살의 내 눈에 비친 마로니에공원의 나무들, 거리에 서서 어떻게든 사람들을 웃겨보려는 공연자들, 그곳은 내가 보던 서울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언니네 극장은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야 있는, 생각보다 훨씬 초라하고 좁은 곳이었다. 무대가 있다는 점 말고는 지하실에 가까웠다.
“그래, 잘 왔다.”
유화 언니가 소품실에서 꺼낸 장구를 앞에 두고 우리는 마주 앉았다. 나는 그렇게 마주 보는 상황이 민망해서 슬그머니 눈을 피했는데, 언니는 근엄한 표정으로 자기를 똑바로 보라고 했다. 그리고 허리를 곧게 세우라고 했다. 궁채를 왼손에 잡고 열채를 오른손에 쥔 채 한동안은 기,라고 외치면서 오른쪽 북 중앙을 치는 연습을 했다. 기, 기, 기, 기, 그러고 나서는 북 테두리를 두드리며 닥,이라고 했고 나중에는 두 동작을 연속으로 하면서 기닥기닥기닥기닥기닥, 소리를 냈다.
그렇게 장구를 칠 때마다 손이나 팔뿐만 아니라 몸 전체에 진동이 이는 듯했다. 심장이 두근두근거렸다. 언니가 가르쳐준 노래는 도라지타령 같은 전통민요가 아니라 언니도 대학 와서 배웠다는 슬기둥이라는 밴드의 「산도깨비」였다. 박자가 단순하니 노래를 같이 부르라고 언니는 시켰다.
“연주시험인데 노래를요?”
“얘가 지금 한가한 소리하네. 그래갖구 플루트며 하프며 하는 서양 것들을 어떻게 이기냐?”
그러고 장구 연주도 버거운 내게 언니는 노래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달빛 어스름 한밤중에 깊은 산길 걸어가다 머리에 뿔 달린 도깨비가 방망이 들고서 에루화 둥둥
깜짝 놀라 바라보니 틀림없는 산도깨비, 애고야 정말 큰일 났네. 두 눈을 꼭 감고 에루화 둥둥
저 산도깨비 날 잡아갈까 가슴소리는 콩당콩당, 걸음아 날 살려라! 꽁지 빠지게 도망갔네
언니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명창들처럼 목청이 좋고 소리가 제대로 났다. 언니가 먼저 한소절 하고 내가 따라 부르는데, “야, 지금 도깨비가 몽둥이 들고 따라오는데 소리가 그 정도밖에 안 나냐?” 하는 일갈이 장구 소리 사이로 들려왔다.
“다시 해봐. 거르마아, 나아알 살려라!”
“걸음아아……”
“더 크게. 지금 온다, 뿔 달린 도깨비가 나 혼자 있는데 달려온다!”
“걸음아아, 날 살려라……”
그러다 나는 문득 울어버렸는데 유화 언니는 왜 우냐고 무안을 주거나 이유를 묻지 않았고 “아주 제대로 배웠다” 하더니 그날 수업을 마쳤다.
완전히 지쳐 소극장에서 나오니 어느새 저녁이었다. 장구 치고 노래하다 어이없게 울어버린 나는 하숙집으로 발길이 향하지를 않았다. 별수 없이 창경궁으로 들어갔다. 산책을 할 셈이었다. 헛헛했고 뭔가가 한바탕 속을 뒤집고 간 듯했다. 유화 언니는 그게 ‘신명’이라며 실기점수는 이제 걱정 없다고 장담했다. 오랜만에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섬에 한번 내려오라는 말치레가 또 전해졌다.
나는 안 된다고 했다. 음악 실기연습을 해야 해서 바쁘다고.
“야, 서울 학생 다 됐네.”
“나 없어도 술 조금만 먹고 밥도 챙겨 먹고.”
“걱정을 마시껴. 온갖 산해진미로 상다리 부러지게 챙겨먹겠씨다.”
아빠는 지키지도 않을 약속을 다시 거창하게 했다. 불이 켜지자 창경궁의 창호들로 아늑한 빛이 비쳐 나왔다. 희게 빛나는 대온실은 입체라기보다는 종이 같은 단면처럼 보였다. 창호지나 흰 천 같은 것. 온실의 환한 조도 때문에 주변 정원은 더 어두워 보였다. 고양이들이 진을 치고 있는 숲길을 지나는데 벤치에 낯익은 뒷모습이 보였다. 리사였다. 알 게 뭐냐 싶어 그냥 지나치며 힐끔 봤더니 뭘 먹고 있었다. 아침에 할머니가 빽네 갖다주라고 한 천도복숭아였다. 아마 안 내놓고 그냥 싸 온 모양이었다. 차마 버릴 순 없었나보지, 그런데 저 많은 걸 혼자 다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나는 소나무 둥치로 기어오르는 단미종 고양이들을 구경하다가 벤치로 걸어가서 앉았다. 리사는 나를 보고 흠칫 놀라더니 다시 복숭아를 천천히 씹었다.
“씻은 거야?”
내가 묻자 리사는 “당근이지” 하고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미친 듯이 장구를 치느라 배가 고팠던 나는 천도복숭아를 꺼내 먹기 시작했다. 시고 달고 향긋한 맛이 입안에 감겼다.
“그런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
또 싸우고 싶은 건 아니지만 이번에는 정말 이해라는 걸 해보고 싶어서 물었다. 리사의 세계를 알아내고 가능하면 조립해보고 싶었다. 그 안에 있는 두려움, 수치심, 공격성, 슬픔, 연약함, 욕심, 채워지지 않는 허기 같은 것을.
“수준을 들키는 것보다는 낫지.”
리사는 그렇게 답하고는 턱까지 흐른 침을 얼른 손등으로 닦았다. 나는 말해봐야 소용없으니 복숭아나 먹어치워야겠다고 결심했는데 리사가 “너 정말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 하고 물었다. 시선을 내 발치쯤에 둔 채였다.
“뭘?”
어둠 속에서 실잠자리들이 마치 먼지처럼 둥실 떠오르고 있었다.
“때로는 믿어야 살 수 있어서 누군가를 믿게 된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막상 리사가 진지하게 물어오니까 나는 답을 못하고 한동안 복숭아만 우적우적 씹었다.
“나는 당연하게 생각되는데, 아니면 사람이 대체 어떻게 살지?”
내가 그렇게 답하자 리사는 복숭아씨를 벤치 아래로 뱉고는 땅속으로 밟아 밀어넣었다. 그리고 창경궁은 밤에 봐야 정말 사람이 살았던 곳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정말 사람이 사는 집처럼 적당히 비밀스러워진다고.
*
포도란 평균 지름 1.2센티미터의 열매를 내는 덩굴성식물일 뿐이지만 누군가에게는 12만 7천 킬로미터 지름의 지구만큼이나 중요한 존재였다. 1억 4천만년 전 출현해 한번의 빙하기에서 살아남은, 방주를 만들어 종말을 피한 인류의 조상 노아가 배에서 내리자마자 처음으로 심은 이 농작물은 결국 메이지 시대 일본 농상무성의 한 공무원으로 하여금 유럽으로 가야겠다고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반슈우포도원에서의 쓰라린 실패 이후 후꾸바는 ‘실제’를 갈망하게 되었다. 직접 유럽으로 건너가 지식과 경험을 배양해 포도 재배의 신기술을 습득하고 싶었다. 하지만 일개 공무원인 후꾸바가 나랏돈으로 외국에 공부를 하러 간다는 건 그 당시로서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한 설득력과 타인들의 조력이 동시에 필요했는데, 불행히도 그는 사람들에게 그다지 인기가 없는 인물이었다. 후대 원예계 종사자들이 꼬장꼬장한 성격이었다고 후술하고, 자기 스스로도 “후꾸바 방식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다”라며 회고록에서 여러번 일갈했듯 그에게는 평균의 이해를 벗어나는 성격이랄까, 심지랄까 하는 게 존재했다.
일례로 학생들을 가르칠 때는 노트를 소지하지 못하게 했다. 두 손은 호미질을 하느라 바빠야 하니까, 지식은 머리로만 암기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도제식 교육법은 케케묵은 옛것으로 취급받아 인기가 없었다. 후꾸바는 차라리 오이와 베틀을 구분하지도 못하면서 외국서적만 유창하게 읽는 선생이 낫겠다며 대놓고 조소했다.
그의 업적 중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일본의 황실 식물원 신주꾸교엔은 창경궁 대온실의 모델이 된 곳이기도 했다. 후꾸바는 교엔의 향초실보다 더 큰 온실을 창경궁에 건설했고 그건 당시 아시아 최대 규모였다. 그런 신주꾸교엔을 운영하면서 후꾸바는 “폐휴주의(廢休主義)”라는 다소 급진적인 원칙을 주장했다. 말 그대로 휴일을 없애는 것이었다. 식물은 매순간 생장과 발육을 멈추지 않는데, 그것을 다루는 인간들이 때마다 쉬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당연히 누구에게도 환영받기 어려웠고 직원들의 반감만 키웠다.
아랫사람들과의 불화만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메이지 신정부의 정사편찬회 일원이지만 전통 사무라이였던 한 관리는 후꾸바가 일군 시험장을 둘러보다 서양 포도는 맛이 없으니 모조리 불태워버리라고 명하기도 했다. 그 한마디에 서양배나 사과나 양배추 등도 쏙쏙 뽑혔고, 그런 소중한 과채들이 버려질 때 후꾸바는 문명개화를 통해 무지에서 탈각해야 할 근대 일본의 미래가 내던져지는 좌절감이 들었다.
이에 후꾸바는 분연히 농상무성에 유학을 요청한 것이었지만 그 당시 내각 총리대신이었던 이또오 히로부미는 예산 문제로 불허했다. 그의 유학이 포도를 위한 것이라는 그 진실이 문제였다. 그 당시 일본에는 정치학, 경제학, 법률학, 의학, 수학, 약학, 세균학, 공학, 전기화학, 공업화학, 지질학, 이론물리학, 문학, 통신학 등 엘리트들이 나아가야 할 곳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으므로 그 작은 보랏빛 과실을 든 이를 위한 자리는 없었다.
후꾸바는 해외유학생 중에는 사회와 큰 관련도 없는 연구를 하다 돌아와서 국가에 아무 기여를 하지 않는 자도 많은데 자기 연구가 거부당한 현실을 수긍할 수 없었다. 그는 그런 불만을 혼자 삭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주장하고 다니면서 굳이 적을 만들어냈다. 다행히 다리를 놔주는 사람이 있어 기적처럼 이또오 히로부미와 만날 수 있었고, 자신의 유학은 포도 사업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평소 소신과는 다소 다른 해명을 했다. 국비유학생답게 이문명(異文明)에 대한 종합적 지식 순례를 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후꾸바는 단순히 외국종을 수입하는 것이 아니라 잡종 육종을 통한 신품종 산업을 꿈꾸고 있었다. 우수한 정국(正菊)과 세상 일반의 영리사업이 될 복숭아, 무화과, 자두, 외국산이 부럽지 않을 만큼 훌륭하게 개량될 붉은 토마토, 길쭉한 아스파라거스, 탐스러운 딸기, 향긋한 멜론. 결국 후꾸바는 3년을 2년으로 줄여 유학을 허락받았다.
1886년 4월 19일 후꾸바는 프랑스 동양우편회사 정기선에 승선해 두달을 보낸 끝에 마르쎄유 항구에 내렸다. 마치 울창한 숲처럼 크고 작은 배들의 돛이 펼쳐져 있었고 창고에는 교역에 따른 화물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모든 것은 낯설기도 했고 오래 갈망해온 만큼 익숙한 세계이기도 했다. 후꾸바는 리옹을 거쳐 빠리에 도착했고 다음 해 여름까지 프랑스 남서부의 보르도에서 지냈다. 일본인은 후꾸바 혼자였다. 이후 후꾸바는 프랑스의 여러 지역, 때론 인접한 유럽 국가를 시찰하고 대학의 청강생으로 강의들을 들었지만 이또오 히로부미에게 장담한 것과 달리 대체로는 포도 산지와 양조장들을 주유(周遊)했다.
몽뻴리에 농과대학의 청강생 자격으로 강의를 듣던 그는 곧 얻을 것이 없다며 중세 때부터 학원 도시로 유명하던 그곳을 떠나 프랑스의 유명 와인 산지인 부르고뉴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 와이너리에서 직접 포도를 수확하고 양조작업을 돕는 일꾼으로 일하며 지식을 전수받았다. 그에게는 그 노동이 너무나 “유쾌한” 시간이었다. 그 당시 포도는 평지가 아닌 비탈에서 재배되었는데, 평지에는 밀 같은 농작물을 심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언덕배기에 위치한 포도원을 열정적으로 오르내리며 혼신의 힘을 다했다. 마치 축제와도 같이 몰아닥치는 포도 수확기를 프랑스어로 방당주(vendenge)라고 부르는데, 그 행렬의 충실한 참여객이 되어 손톱 밑이 새카매질 정도로 포도를 따고 주조장으로 옮겼다. 그렇게 그의 지식은 오크통 안의 포도즙처럼 육체와 정신으로 발효되어갔다.
하지만 어느날 그는 몸이 평소 같지 않다고 느꼈고 이내 고열로 쓰러졌다. 병원에 실려가 진찰을 받아보니 비극적이게도 장티푸스였다. 의사는 후꾸바가 24시간 내에 죽을 것이라고 진단 내렸고, 시신 처분을 위해 빠리 주재 일본공사관에 전보를 보내 사람을 부르라고 알렸다.
“포도를 너무 좋아해서 죽다니.”
태블릿 피씨로 장티푸스를 찾아보던 산아는 한숨을 쉬었다. 이번에도 벌레가 문제였다며 장티푸스는 살모넬라 타이피균에서 발생하는 급성전신감염 질환으로 파리가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설명을 소리 내 읽었다. 산아는 뭔가를 너무 좋아하면 역시 안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불행해진다고. 나는 산아가 쓴 불행,이라는 무거운 단어가 신경 쓰였다.
“왜 사람들은 다 그렇게 너무 좋아하는 게 생겨버리는 걸까? 엄마도 돈이면 다 좋다고 하고 오빠는 게임만 하고. 이모도 그런 게 있어?”
나는 생각을 더듬었다. 좋아하는 상태를 더 심화시키는 ‘너무’라는 부사를 사용해본 적이 있는지를. 좋아하는 일에 대해 생각하면 늘 금성무, 어쩜 성마저 이씨라서 조선의 명장군과 이름이 같아져버린 순신이 떠오를 따름이었다. 어른이 되고 나서도 연애가 시작되거나 끝이 날 때면 서류철을 딱 닫아 보관하듯이 그때와 비교해보곤 했다. 거기서 얼마나 걸어 나왔는지를.
“그런 경우로, 이모는 이순신을 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순신 장군? 정말?”
산아는 그렇게 되묻더니 이모 약간 역사 덕후인가보네, 하고 중얼거렸다. 나는 굳이 해명하지 않고 웃었다.
“산아는 어때?”
“나는 아직 없어. 그건 좀 무서운 일인 것 같아. 이 포도 과학자처럼.”
나는 과학자가 아니라 원예가라고 정정하려다가 그리 틀린 말 같지는 않아서 그냥 두었다. 산아는 화제를 바꿔 그 말 없는 아이와 좀 친해졌다고 전했다. 최근에 이모가 얘기해준 포도뿌리혹벌레를 그려줬는데 의외로 그 그림이 아이의 말문을 열었다고. 나는 선물로 벌레를 그려준 산아의 발상도 신기했지만 대화를 나눈 것도 놀랍다고 생각했다.
“이름이 수미가 아니라 스미였어. 스민다고 할 때 스미. 걔가 말해줬어.”
“이름이 특이하네. 틀리게 부르는 사람이 더 많겠다.”
“응, 상관은 없대.”
이야기를 나누면서 알게 된 의외의 사실은 또 있었다. 지난번 우리를 곤혹스럽게 했던 스미의 그림도 곤충이라고 스스로 말한 것이었다. 포도뿌리혹벌레에 대한 산아의 열의있는 설명이 흥미를 끈 것 같았다.
“이모가 한번 맞혀봐요. 곤충 중에 뭐였을지.”
“개미? 매미?”
“땡.”
“딱정벌레?”
“아니야.”
“그럼 뭔데?”
“벌.”
나는 벌은 정말 예상 밖인데 하고 말하면서 산아에게 초콜릿 음료를 더 따라주었다.
“그래서 내가 학교 뒷산에 벌집 있는 나무 있다고 알려줬거든.”
“그래, 거기 벌들이 살잖아.”
그랬더니 스미는 자기도 그런 곳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자기가 다니다 온 학교는 서울에 있었고 학교 후문을 나와 좀 걸으면 오래된 창고가 하나 있었다고. 그 지붕 아래 벌집이 있었고 자기는 하교시간에 그 아래 서 있곤 했다고. 산아는 벌을 절대 우습게 보면 안 된다고 깜짝 놀라 알려줬다. 가을이면 꼭 섬의 누군가는 말벌에 쏘여 구급차를 타고 강화로 실려가는 걸 직접 보곤 했기 때문이었다.
“그랬더니 나도 그러고 싶지 않았어, 스미가 말하더라고.”
“그런데 왜 서 있었대?”
“애들이 시켜서.”
산아의 말이 거기서 끊겼다. 우리는 더이상 대화를 이어나가지 못했다. 매미 소리가 침묵을 채우고 후텁지근한 바람이 매화나무잎을 흔들었다. 아빠가 없으니 매실을 딸 사람도 없어서 열매는 매년 그대로 시들거나 나무 아래 떨어져 있었다. 내가 스무살 때 세상을 떠난 아빠의 마지막 말은 “나 없이 영두 혼자 어떻게 살까?”였다. 마치 아이를 두고 가듯 아빠는 걱정이 컸다. 그때 나는 중졸도 아니고 초졸이었으니까 어쩌면 무서울 만큼 걱정이 되었을 거였다. 아빠가 떠나기 전에 검정고시를 봤으면 좋았으리라는 생각을 나는 나중에서야 했다.
“그 못된 짓은 ‘혼내주자’라는 한국말로 시작됐대. 국제학교라서 영어를 쓰는데 그 신호는 한국말이었다는 거야.” 산아는 진지하게 화가 난 투였다.
“그래서 섬으로 왔구나. 지금 반에서는 괜찮니?”
“적어도 우린 벌집 아래 누군가를 세워놓진 않아.”
섬 아이들은 소수라서 더 많은 어른들의 시선 속에서 학교생활을 하고 있었다. 교장과 교사 모두 작은 학교의 기적을 만들어보기 위해 의욕적이었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여기는 낙원이 아니고 아이들은 싸웠고 부모들은 각자 생각이 달랐다. 다만 그런 문제가 일어나면 동네 전체에 알려졌고 그것이 때론 상황을 나쁘게, 때론 더 낫게 만들었다.
“너무 마음 아파하지는 말자.”
내가 산아에게 말했다.
“너무 마음이 아프면 외면하고 싶어지거든. 아까 우리도 말했지? 너무를 조심하자고.”
“맞아, 죽으니까.”
“아니, 그 사람 안 죽었어. 1927년에 죽었으니까 죽긴 죽었지만 그렇게는 안 죽었어.”
이야기가 끝난 줄 알았던 산아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정말?”
“기적적으로 살아나서 시체 치우러 올 필요 없다고 전보에다 직접 답장을 썼대. 아, 근데 너 전보가 뭔지 알아?”
사실 그런 질문은 산아에게는 필요 없었다. 산아는 늘 태블릿 피씨를 들고 다니며 마치 탐정처럼 그때그때 의문을 해결하는 아이였으니까. 산아 같은 아이들에게 과거는 이제 다른 의미를 지닐 것 같았다. 그건 접근 가능한 형태로 온라인에 있으니까. 물론 정말 그럴지는 미래가 와서 오늘이 과거가 돼야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산아는 검색으로 전보에 대해 찾아보더니 다른 사람이 써서 보내주는 거면 비밀은 적을 수 없는 편지네, 하고 논평했다. 나는 사실은 비밀이 아주 많을 수밖에 없는 편지,라고 말을 약간 바꿔주었다.
3. 야앵(夜櫻)
정밀실측 날에는 창경궁 대온실로 출근했다. 매번 밖에서 지나듯 구경했던 곳이라 비교할 만한 기억은 딱히 없었는데 그 점이 새삼스러웠다. 왜 한번도 들어가볼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온실 앞에는 거의 모든 사무실 직원들이 나와 있었고 소장도 아침 일찍부터 대기하고 있었다. 첫주 동안 우리는 마치 매미처럼 대온실 건물 곳곳에 붙어 실측을 했다. 나는 기록 담당이었지만 소장까지 사다리를 타고 스타프라고 하는 7미터짜리 철제 자를 세우고 있는 판에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기준 위치를 표시하는 폴대를 잡거나 사진촬영하는 소목을 도왔다.
제갈도희는 고행하는 수행자처럼 심각하게, 삼각대 위에 붙인 제도지에 실측 결과를 표시하고 있었다. 구심기를 이용해 지상과 제도판의 지점을 잡았고 대상이 바뀔 때마다 삼각대를 이동시키며 위치를 기록했다. 제갈도희가 그리는 도면들은 설계도라기보다는 대온실을 그린 섬세한 스케치처럼 보였다. 그림체가 밝고 부드러웠다. 대온실의 철제 아치라든가, 식물넝쿨이 뻗어나가는 모양의 용마루 장식이라든가, 불꽃을 닮은 화엽(花葉)과 문 하단의 오얏꽃까지.
계량 표시 공간이 필요해 출입문은 한쪽만 그렸는데, 마치 누군가를 맞이하기 위해 문 한편이 열려 있는 듯 보였다. 내 말에 제갈도희는 “영두님, 거 너무 낭만적인 시선 아니에요? 노가다 중에 노가다를”이라고 하면서도 햇볕에 탄 얼굴로 씩 웃었다.
그 주의 마지막 날, 지금은 관리실로 쓰는 부속사 쪽으로 직원들이 모였다. 대온실 뒤편이라 관람객 눈을 피해 그늘에서 적당히 쉴 수 있는 장소였다. 은세창은 카트에 기계를 싣고 옮겨다니며 못다 한 작업을 하고 있었다. 몇발자국 단위로 세밀히 움직이며 대지를 촬영했다. ‘지표투과 레이더’라고 하는 장비인데 물질마다 전자파를 반사하는 정도가 달라 땅을 파지 않고도 그 속을 파악할 수 있다고 했다.
“크기가 딱 보일러실이죠?”
은세창이 소목 쪽을 향해 물었다. 묵직해 보이는 산업용 노트북으로 데이터를 확인하던 소목은 “지레짐작은 금지”라고만 답했다. 여름 햇볕에 지친 직원들은 그늘 아래에서 가끔 불어오는 한줄기 바람에 땀을 식히고 있었다. 제갈도희도 나더러 앉아서 쉬라고 했다. 현장에서는 먹을 수 있을 때 먹고, 쉴 수 있을 때 쉬고, 쌀 수 있을 때 얼른 싸놔야 한다고.
“궁에서 담배 피웠다가는 계약해지당할 테고 정문까지 걸어가면 가다가 내가 죽을 것 같고.”
소장이 작업복 안에 든 담배를 잡았다 놨다 하며 중얼거렸다. 땀으로 등이 다 젖어 있었다.
“여기 고양이들 있는 솔숲 옆에 문이 있어요. 월근문이라고 거기로 나가보세요.”
그렇게 담배 피울 방법을 알려준 것이 소장과 나의 거의 첫 대화였다.
“그쪽에 입구가 또 있나?”
“저 담 밖이 주차장이잖아요? 주차장 관리요원들이 거기로 화장실이며 드나드니까 사정 얘기하면 나가실 수 있을 거예요.”
그러자 소장은 내게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다. 공사 건으로 여러번 드나든 자기도 모르는 걸. 막상 물으니 또 그 많은 얘기를 전할 길이 없어서 나는 그냥 웃었다.
“아, 사연이 있는 모양이네. 사연은 나중에 말해줄 수 있으면 말해주고 암튼 당케 쇤, 당케 쇤.”
엉덩이를 털며 일어난 소장은 안전모자를 한 손에 들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 더위에 그 모자를 어디서나 챙겨 써야 하는 것도 측량 첫날 장과장이 으름장을 놓고 갔기 때문이었다.
장과장은 굳이 비유하자면 어치 같은 사람 같았다. 까마귓과인 어치는 경계심이 많고 자기 영역에 대한 통제력도 강하다. 다른 새들을 자주 괴롭히는데 어미 소리를 내며 새끼를 유인해 잡아먹기도 하고 고양이 울음을 따라 해 작은 새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들기도 한다. 혓바닥이 발달해서 앵무새처럼 다양하게 소리를 흉내 낼 수 있다. 그래서 산아는 어치가 나타나면 인상을 쓰며 오태양 날아다니네 하고 말하곤 했다. 태양이는 산아가 학교에서 가장 못마땅해하는 애였다.
장과장 역시 뭐랄까, 일부러 갈등적인 상황을 만들어 자기 통제력을 확인해야 하는 사람 같았다. 살얼음처럼 냉랭하게 구는 태도도 그를 위한 포즈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공문의 문단 위치나 띄어쓰기, 공사장 안전모자 같은 것들이 만들어주는 영향력만큼 허망한 게 있을까. 그런 식의 만족감이란 겨울의 빈 새둥지처럼 허망하고 쓸쓸하지 않나. 사람들에게는, 진심을 주지 않음으로써 누군가를 결국 무력화하는 힘이 있는데 어떤 부류들은 그런 진실에는 무관심하곤 했다.
은세창이 대지를 다 스캔하자 직원들이 모여 이 주의 마무리 브리핑을 시작했다. 우리가 조사한 대온실 기둥만 해도 50여본이었다. 대온실의 중요한 건축적 특징은 목재와 철재를 혼합해 사용했다는 데 있었다. 철재로는 온실의 주요 기둥을 세웠고 내부의 클리어스토리와 캣워크 등을 만들었다. 클리어스토리는 온실 솟을지붕을 지탱하고 있는 유리로 된 옆벽을 가리켰다. 캣워크는 온실 공중에 만든 폭 좁은 접근로로, 꼭대기 온실 창이나 키 높은 대형 수목을 관리하기 위한 장치였다. 대온실 외부도 목재와 철재를 같이 써서 입면을 구축했는데, 이 점이 당시 유럽 온실과 다른 특징이라고 한 직원이 말했다. 나무를 쓰면 결로로 썩게 되니까 당연히 철재로 짓는 것이 정석이었다. 지금도 대온실의 창틀들은 심각하게 노후된 상태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철을 구하기 어려웠으니까, 그리고 예산 문제도 있었을 테고요.” 직원은 말했다.
“큐가든도 철목재 혼합구조 아닌가? 내가 확인해볼게. 친구가 지금 영국에 있거든. 답신 오면 영두씨한테 넘길게요, 보고서에 넣고. 다음 또 뭐?”
이슈 하나가 나올 때마다 소장은 이후 작업을 바로바로 결정했다. 시선은 은세창이 지표투과 레이더를 옮기며 낸 자국에 멈춰 있었다.
“지금은 다 매장됐지만 관리실 밑이 온수 보일러실이었고, 지금은 온실 양쪽 전실에 석유 송풍기를 놓고 쓰고 있고. 그런데 세창은 보일러실이 왜 두개나 필요했다고 생각해?”
작업을 끝낸 은세창은 반소매를 둘둘 걷고는 와그작와그작 얼음을 씹고 있었다.
“지하에 있으니까 보일러실이겠지 했는데, 소장님 말씀 들으니까 하기는 방 두개로 나눌 필요는 없었겠네요.”
“후꾸바 설계도에 표시된 배양실일 수도 있잖아. 그렇게는 생각이 안 되고?”
“배양실에 대한 기록이 없어도 너무 없어서.”
은세창이 겸연쩍은 듯 웃으며 말했다. 1909년 후꾸바가 설계한 평면도 외에는 배양실을 언급한 자료가 없어서 나중에 변경됐거나 공사과정에서 아예 지어지지 않은 듯 보였다고.
“제가 다른 자료에서 배양실에 관해 찾기는 했어요.”
나는 어젯밤에 읽었던 『경성 원예』라는 잡지를 떠올렸다. 조선총독부 농상국에서 발간한 원예 잡지였는데, 특히 「20년 복무의 원예길」이라는 키노시따 코쭈우의 글이 흥미로웠다. 아랑씨가 말한 것처럼 키노시따 코쭈우는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4년 친척 어른의 소개로 창경궁 식물원 말단직원으로 취직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원정이라는 직책에 있었던 것은 아니고 정확히 말하면 신주꾸교엔에서 자리를 옮겨 온 일본인 원정들을 돕는 잡부였다. 퇴비를 만들거나 하는 단순노동부터 온갖 심부름을 했는데 때때로 동물원 일까지 가리지 않았다고 했다.
키노시따의 글은 황교통(黃橋通), 곧 종로4가에서 창경원까지의 출근길을 회상하며 시작했다. 열여섯 소년은 냉맥주와 냉사이다를 파는 노점들을 통과해, 복숭아와 하귤을 문전에 늘어놓고 유람객과 총독부 의원의 손님들을 호객하는 장사꾼들을 지나 궁으로 들어온다. 가슴에는 이름표와 표찰이 달려 있고 갈색 작업복을 입었다.
출근부에 싸인을 하지만 사무소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어차피 그의 자리는 대온실부터 붉은사슴, 영양, 노루, 얼룩말들이 있는 동쪽 초식동물사까지 전체이니까. 궁에는 하루도 조용한 아침이 없었다. 홍화문을 들어서자마자 동물 소리가 포획하듯 귀를 덮었다. 귀 있는 사람이라면 듣지 않을 수 없는 소리였다. 대만, 일본, 히말라야, 필리핀, 브라질, 아프리카 등지에서 온 수십마리의 원숭이가 노는 소리, 제주 말과 요크셔 돼지들이 우는 소리, 삵과 늑대가 목적 없이 위협하는 소리, 동양 최대의 큰물새우리에서 들려오는 두루미와 흑고니, 왕관앵무와 펠리컨과 청둥오리, 가마우지 같은 새들의 지저귐, 노천방사장을 나는 백여종 새떼들의 날갯짓 소리, 그 모든 것이 동물사 냄새와 함께 아침을 열었다.
벚꽃철이면 그 당시 경성 인구의 10분의 1인 2만 5천명의 입장객이 하루 만에도 들어와 북새통을 이루는 창경궁에서 가장 조용한 곳은 의외로 맹수사였다. 사람들이 붙어 휘파람을 불며 관심을 끌려 했지만 쿄오또에서 들여온 사자는 단 한번도 포효한 적이 없었으며 위장병을 앓고 있었다. 백두산에서 사로잡아 온 호랑이도 있었지만 암컷 한마리뿐이었기에 그다지 용맹함을 드러낼 필요 없이 심심해하고 있었다.
맹수사의 활기는 강원도에서 포획한 한쌍의 표범 부부가 담당하고 있었다. 새끼를 세마리나 낳고 사방을 경계하며 바쁘게 움직였다. 소년에게는 그 모든 세계가 궁으로 들어서자마자 한꺼번에 불어닥쳤다. 소리와 냄새와 우리 안에서 날려 온 깃털이나 털뭉치들이 한데 엉킨 그 풍경을 달리다보면 종국에는 텁텁한 흙냄새 같은 것이 남았다. 소년은 이곳저곳에서 부르는 대로 달음박질치면서 하루 종일 심부름을 다녔다. 그래도 내심 좋아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동식물원 관장 부서인 장원실의 기수인 시모꼬오리야마의 조류표본실을 청소하는 일이었다. 시모꼬오리야마는 관리이면서 조류학자이기도 해서 모은 표본들을 장서각의 다락과 지하실에 보관하고 있었다. 장서각은 시민당을 허문 터에 지은 콘크리트 건물로 기와지붕이 덮여 있었다.
소년이 믿고 따랐던 조선인으로는 사육사 박영출이 있었는데 순종의 마부였던 그는 궁에 자동차가 들어오면서 실직하고 동물원 부서로 옮겨 온 경우였다. 오랫동안 궁에서 성실히 일하며 재산을 모아 살림이 넉넉했고 종종 소년에게 책 선물을 해주곤 했다. 『와세다대학 강의록』 같은 제법 어려운 책들이었다. 그리고 소년은 배양실로 들어가 원정들의 작업을 훔쳐보는 것을 좋아했다. 누구 하나 소년을 붙들고 뭔가를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눈과 귀로 익히고 외우는 것이었다. 그들은 조선인에게, 더구나 잡부에 지나지 않는 아이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저 비가 오면 식물들이 자라고 있는 대온실 뒤 화단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키노시따, 뭐 해? 호미 가져와서 골을 파주지 않고?”
은세창은 내 말에 놀라더니 이래서 문이과 통합이 중요하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배양실이라고 보고 발굴조사도 해볼 수 있지 않겠느냐며 흥분했다. 지표투과 레이더를 하면서 잡혔던 데이터들도 꽤 흥미로웠다고.
“뭐가 있었어?” 소장이 물었다.
“네, 뭔가가 있을 것 같은, 작도의 신만이 느낄 수 있는 미미하지만 심증이 확실히 가는 느낌적 느낌?”
“하이데나이……”
소장은 버릇처럼 독일말로 중얼거리며 한숨을 쉬었다.
“발굴할 유물이라도 있으면 그나마 다행인데 다 토양화됐을 뿐이면 누가 반길까. 실상 파악한다고 공사만 한없이 지연될 테고, 소득도 없고.”
소목은 일단 컴퓨터 분석작업을 해보고 확실해진 다음에나 의논하자고 했다.
“우리가 뭘 선택할 수 있어? 까라면 까고 덮으라면 덮어야지.” 소장이 투덜댔다.
“우리 연희 소장도 늙었다야, 발주처 만능주의나 외치고. 싸워서라도 건축주를 설득하라는 게 평소 소신 아니었어?”
소목이 장갑을 탁탁 털어 주머니에 넣으면서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소장은 장비를 정리하고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고 했고 먹을 수 있을 때 먹어두기 위해 우리는 각자 짐을 챙겨 홍화문 쪽으로 향했다.
북촌의 고깃집은 내 기억에도 있는 가게였다. 아빠가 강화에서 올라와 저녁을 사줬던 생각이 났다. 같은 골목의 깡통만두는 금성무와 처음 밥을 같이 먹은 식당이었다. 이십여년이나 됐는데 아직도 이런 장소들이 남아 있다니, 나는 어쩔 수 없이 반가움을 느꼈다. 고기가 나오자 직원들 모두 “오늘도 무사히” 하며 건배를 했고 식사를 시작했다.
“영두씨 혼자 살아요?”
소장이 물었다. 그렇다고 하자 “우리 동지네” 하는 답이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결혼한 직원은 둘뿐이었다. 나머지는 각자의 이유들로 1인가구들이었다. 술이 더 들어가자 사람들 각자의 속마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술을 즐기지 않았는데 깨고 나서의 허망함이 싫었기 때문이었다. 술이 들어갈 때는 기분이 좋아 박장대소를 하다가도 깨고 나면 바람 빠진 풍선처럼 마음이 텅 비어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렇지만 첫 회식이나 다름없으니까 다른 사람들 속도에 맞춰 술을 들이켰고 건축가들은 다 그런가 싶을 정도로 직원들 모두 빠른 속도로 술잔을 비웠다. 이차로 맥줏집을 들렀다가 삼차로 양꼬치집에 갔을 때는 다들 취해 있었다.
모두들 자기 힘든 얘기를 꺼내는데 불평을 두루 듣고 있는 사람은 소목뿐이었다. 소장은 이 일에 크고 작은 회의감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 돈이 안 되고 주어지는 실측설계 작업기간이 너무 밭고 기껏 열심히 해봐야 공사 들어가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수정되고 무시당해서 힘이 빠진다고 했다. 독일에서 이런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횡포라고. 설계사의 제언을, 뇌물이나 받아먹는 자문위원들이나 이름만 내건 채 자격증 장사에 열심인 유명 장인들이 바꿔버리는 어이없는 경우가 한국에서는 흔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돼? 청은 감리사 탓하고 감리사는 시공사 탓하고 시공사는 설계사 탓하고. 무형문화재 중에는 백억대 자산가도 있다는데 공사는 날림으로 가고.”
“그래서 힘이 빠진 거야? 그냥 적당히 수리하기로 한 거야?”
소목은 막걸리만 마시는 주종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맥줏집과 양꼬치집에서도 주인의 양해를 구하고 편의점에서 사온 술을 홀짝홀짝 마셨는데, 소목의 말투는 그런 막걸리 같은 묽고 쌉쌀한 이의제기를 담고 있었다. 소장은 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회한으로 빠져들어갔다.
“아직 타협 안 했잖아. 왜 그렇게 생각해? 내가 변했어?”
소장과 소목은 한동안 마주보더니 소목이 먼저 시선을 돌렸다.
“내가 네 곤란함을 모르겠어? 사무실 유지비만 해도 얼만데. 공사는 일년에 몇개 수주하기도 어렵고. 그래도 이번에 대온실 공사 땄잖아. 그래서 이렇게 영두씨같이 좋은 사람도 만나고.”
서서히 졸음과 취기에 빠져들어가고 있던 나는 놀라서 눈을 번쩍 떴다.
“감사합니다.”
앞뒤는 잘 몰라도 일단 그렇게 인사하는데 제갈도희가 끼어들었다.
“소목님, 저는 마음에 안 드시죠?”
은세창이 놀라 제갈도희의 입을 막으라며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내가 무슨 수로 대화를 끊을까. 나는 이제 다들 일어나야 할 시간 아닐까요, 하며 가방을 챙기는 척을 했다.
“제갈도희 디자이너야말로 날 마음에 안 들어하나본데? 보통 상대에게 그런 자기 마음을 전가하거든.”
소목이 웃으며 두 손으로 깍지를 껴서 뒤통수에 댔다.
“네, 안 듭니다. 죄송합니다.”
“츤데레, 츤데레잖아요. 우리 제도가.”
은세창이 얼른 말을 끊었다. 하지만 우리의 노력은 허사였고 곤줄박이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날개를 폈다.
“소목님, 요즘은 3D스캐너로 설계하는 세상입니다. 기계만 딱 갖다놓으면 스캐너가 점을 파바파바 찍어서 짠. 설계사 손을 산재로부터 좀 보호하면 안 되나요?”
제갈도희가 오른손을 펴서 소목 앞에 갖다 댔다. 소목의 안경렌즈에 부딪혀 지문이 남을 정도로 가까이.
“인간이 만든 건물은 인간의 손으로 수리하자는 이 인간의 마음도 이해해주라. 제도의 신아.”
소목이 제갈도희의 불만을 그렇게 넘기고는 옥수수면 두그릇을 시켰다. 그리고 음식이 나오자 작은 볼에 나눠 직원들 앞에 하나씩 놔주면서 “자, 다들 속 풀고 이제 집에 가자” 했다.
일행들과 헤어진 나는 계동길을 올랐다. 폐점한 기념품점에는 이미 오래전 유행한 드라마와 아이돌 포스터들이 남아 있었다. 가회동성당을 빼고는 눈 익은 건물이 없었다. 그곳은 그해 서울에서의 첫 겨울을 담고 있는 장소였다. 중간에 은혜에게 전화가 와서 지나가다 봤는데 왜 집에 불이 꺼져 있느냐고 물었다. 아직 서울이고 아마 여기 어디서 자고 내일이나 섬에 갈 듯하다고 하자 은혜는 그 동네 어디서 청승 떨고 있는 거 아니지? 하고 물었다.
“청승이 아니고 고독이라고 해줄래? 산아는?”
“몰라, 뭐가 화가 났는지 학교 갔다 와서 지 방에 틀어박혔다.”
무슨 일인지 모르냐고 하자 엄마들에게 들어보니 오늘 학교에서 도난사고가 있었다고 했다. 누가 그랬는지는 쉽게 잡혔는데 전학 온 애라서 좀 시끄러웠다고.
“내가 걔 좀 조심해야겠더라 그랬더니 가방을 홱 던지더니 엄마가 뭘 안다 그래? 그러고 들어가버렸어. 키워놔봤자 저 속을 어떻게 알까. 아주 차갑기가 쏜물 같은 기집애.”
쏜물, 강화말로 찬물을 가리키는 그 단어를 듣자 우리가 절교하자며 싸웠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래서 나한테도 그 말 한 적이 있다고 하자 은혜는 그랬냐? 하고 되물었다. 내가 섬으로 돌아간 뒤 은혜는 우리 사이에 연락이 끊겼던 때가 없는 듯 굴었다. 묻지도 내색하지도 않고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 은혜에게서 안전함을 느꼈다. 아주 알맞은 온도의 이해였다.
원서동으로 넘어가 도착한 빨래터에서는 여전히 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가로등이 달무리 같은 노란빛을 구불거리는 수면에 드리우는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낙원하숙 시절만 해도 빨래를 하거나 등목을 하는 동네 사람들이 있었는데 지금도 그런지 궁금했다. 밤에도 매미 소리가 소나기처럼 쏟아져내렸다. 날개로 내는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강도였다. 그 소리의 힘에 기대 걸었고 아직 남아 있는 럭키세탁소 간판을 발견했다. 하지만 맞은편의 금성무, 순신의 집은 철거되고 없었다.
우리가 친해지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창덕궁 주변 무허가 건물들이 정비되고 있었으니까 어쩌면 당연했다. 순신은 자꾸 공무원들이 드나드는 걸 보니 자기네 집 차례가 멀지 않은 듯하다고 했다. 그 사람들이 자꾸 자기 집을 ‘불량주택’이라고 부르는 데 순신은 기분 나빠했다.
“계속 사람이 살면 창덕궁 담 모양을 제대로 못 본다는 거지. 야, 근데 궁만 보면 됐지, 바깥담까지 누가 보냐? 너 창덕궁 담 다 보고 싶어, 안 보고 싶어?”
나는 관심 없다고 했다. 어차피 담 모양도 다 똑같고.
“거봐, 근데도 나가라고 난리다.”
우리의 감정이 연애로까지 넘어간 건 그해 여름방학 때였고 좀 이상한 계기였다. 같이 일수를 받으러 다닌 것이다. 그때 섬에 잠깐 다녀와보니 문자 할머니가 다리에 깁스를 하고 있었다. 다락을 오르내리다가 다쳤다고 했다. 할머니는 나를 불러서 시장으로 심부름을 좀 다녀야겠다고 했다. 동대문에 가서 상인들에게 이자를 받아 오는 일이었다.
“가서 돈 받고 수첩에 도장만 찍어주면 된다.”
그 당시 내게 돈이란 아주 꺼려지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다 약속이 되어 있으니 그냥 받아만 오면 된다고 했지만 그럴 리가 없다고 짐작했다. 세상 좋은 어른이었다는 말을 들은 우리 외할머니조차 돈 앞에서는 고약했으니까.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돈이 어떤 의미인지는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떠올리면 빤히 답이 나왔다. 할머니 방수 앞치마 속으로 들어간 돈은 잔돈 거슬러줄 때를 빼고는 웬만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건너가지 않았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도매외상을 다 갚지 않고 생선꽁지만큼이라도 남겨놓곤 했다. 비유하자면 자동차 한대는 너끈히 들어간다는 캘리포니아의 어느 늪지대처럼 완전히 집어삼켜 도무지 내놓고 싶어하지 않았다.
“어렵겠니?”
자신은 없었지만 거절할 도리는 없었다.
“아니요. 할게요, 할머니.”
리사는 내가 일수를 받으러 간다는 사실을 알고 약간 애석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작년에 할머니가 입원했을 때는 딩 아주머니가 며칠 대신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 이번에도 딩 아주머니가 하면 되지 않을까?”
내가 반색하자 리사는 2층 마루에서 음악을 듣다가 혀를 찼다. 그리고 가르쳐줄까 말까 뜸을 들이더니 모호하게 말을 맺었다.
“또 시킬 수 없는 데는 이유가 있지 않겠니? 잘해봐, 굿 럭이야.”
그 사정은 내 심부름 건을 알게 된 딩 아주머니의 말을 통해 짐작할 수 있었다. 아주머니는 할머니가 나이가 들어 의심이 많아졌다며 나더러 조심하라고 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할머니의 기억력이나 인지능력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하숙집에서 덤벙거리고 정신없어하는 건 오히려 우리였다. 유화 언니는 식당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주문을 제대로 못 받아 잘렸고 삼우씨는 기말고사조차 까먹고 치르지 않아서 유급 위기를 맞았다가 마음 약한 교수 덕에 위기를 모면했다. 나는 모든 관심이 순신에게 꽂혀 얼이 나가 있었다. 동네에서 마주치고 같이 햄버거나 떡볶이를 먹고 복잡한 종로거리를 하릴없이 걸으면서 몸과 마음이 달뜨고 있었다. 아마 그때 체온을 재봤다면 순신보다는 내 열기가 더 높았을 거였다.
우리는 교제는 시작도 안 했으면서 그 화제에 대해 열심히 대화했는데, 주로 내 공격적인 질문을 통해서였다. 이성친구를 사귀어본 적 없다는 내 말에 순신은 좀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그러면 어디부터 설명해주어야 하냐고 되물었다. 지금 생각하면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지만 나는 그렇게 질문세례를 퍼붓는 걸 플러팅이라고 오해했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일종의 성교육을 이론적으로 해달라는 거지. 너는 나보다 나이도 많잖아.”
혜화동의 마로니에길을 걸으며 나는 이런 정신 나간 얘기를 지껄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한자리를 지켜온 마로니에 나뭇잎들이 우우 흔들리며 내 흥분을 낮춰보려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너 혹시 공부 잘하냐?”
음악실기도 무사히 통과하고 반에서 꽤 높은 성적을 받았던 나는 그즈음 자신감에 차 있었다. 내가 잘한다고, 우등생반에 들었다고 하자 순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공부 잘하는 애들은 사람을 좀 번거롭게 하는구나,라고 이상한 소감을 말했다. 순신은 자기 친구들과는 달리, 스무살이 넘을 때까지는 성경험을 하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너무 빨리 해버리면 뭔가 자기 자신이 불량한 기분이 들 것 같다고. 안 그래도 공고에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학교 이름만 말하면 편견을 갖는 사람들이 많아서 기분 나쁜데 그런 데 부응하는 인생이고 싶지 않다고.
좋아하는 남자애가 생겼다는 소식에 안나는 열광적인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친구들이 떨어져 나가 둘만 남게 되면 자기가 알고 있는 연애, 그리고 스킨십에 대해 이야기했다. 자기는 사촌언니를 따라 ‘레드 핫 칠리 페퍼스’라는 미국 밴드 콘서트를 갔다가 갑자기 외국인 남자애의 입맞춤을 받았다고 했다.
“혀가 오가지는 않았어.”
안나는 그때 기억에 집중하는지 얼굴을 약간 씰룩거리며 침착하게 설명했다. 그뒤로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팬이 되었는데, 밴드는 흥이 달아오르면 양말로 성기만 가린 채 나체로 무대를 뛰어다닌다고 했다.
“그럼 너도 그거 봤어?”
“아니, 미국 간 사촌언니가 찍어 온 영상으로만 봤지.”
장구를 치며 도깨비나 부르는 내게 그 얘기는 문화충격이었다. 안나는 홍대 클럽데이에만 가도 헐벗은 남자애들쯤이야 질리도록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안나가 어느 고등학교에 다니는 애인지 물었을 때 나는 순간적으로 답을 피하고 요즘 학교는 잘 안 나가고 방황 중이라고 답했다.
“아, 아는 집 중에도 그런 애들 있어. 결국 유학을 보내더라고. 미국으로 곧장 갈 실력 안 되면 필리핀 같은 데를 거치고.”
학교 이름을 알려주는 것보다 차라리 등교를 등한시하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낫다는 판단은 어떤 경험에서 나왔을까. 나는 한동안 그 회피의 말이 마음에 걸렸지만 프라이버시 영역이니까 하고 자책감을 덮었다.
낙원하숙이 있던 골목으로 다가갈수록 나는 그 집이 아직 남아 있을지 사라졌을지 심장이 두근거렸다. 있다면 누가 살고 있을지, 사라졌다면 내 모든 기억은 조용히 잠겨 있으면 되는 건지, 침잠된 기억을 이따금 일렁이며 살면 되는지, 지금껏 그랬듯이.
골목 어귀로 다가가 모퉁이를 도는데 누가 뒤에서 내 어깨를 쳤다. 돌아보니 여기까지 뛰어왔는지 제갈도희가 숨을 몰아쉬며 얼마나 불렀는데 듣지를 못해요, 하고 약간 책망했다.
“아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느라 전화도 안 받으시고.”
나는 그제야 무음으로 해놓은 휴대전화를 꺼냈다. 은세창과 제갈도희가 번갈아 전화한 알림이 남아 있었다.
“시간 늦었는데 집에 어떻게 가시나 하고요. 괜찮으면 우리 집 가서 자요, 언니.”
취기 탓인지 괜히 그렇게 불러보고 싶었는지 제갈도희는 호칭을 언니라고 바꿨다. 그게 싫지 않아서 “그럴까?” 하고 선선히 동의했다.
“집이 어딘데요?”
“수색이요.”
“그러면 나 잠깐 이 골목 좀 살펴보고 가도 될까? 내가 전에 하숙하던 집이 남아 있는지 궁금해서.”
“아, 여기 사셨구나. 어쩐지.”
“어쩐지 뭐요?”
“너무 차분하더라고요. 보통은 여기가 궁이에요? 야, 대온실이 이렇구나 하면서 호들갑 떨기 마련인데. 그런 게 없이 그냥 편안했어.”
나는 제갈도희가 지켜보고 있었다는 데 당황하다가 원래 곤줄박이는 사람에게 관심이 많으니까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제갈도희에게 곤줄박이 닮았다는 얘기를 해주자 그게 뭐든 새를 닮았다는 말 자체가 근사하다고 만족스러워했다. 제갈도희와 나는 골목으로 들어섰다. 골목의 형태 자체에는 큰 변화가 없었지만 사람이 살던 주택들이 공방이라든가 기념관이라든가 하는 시설로 바뀌어 있었다.
“보존가치가 있는 건물들이네요. 여기에 이런 골목이 있구나.” 제갈도희가 둘러보며 말했다.
한발 한발 걸어가는데 골목 끝 쪽, 낙원하숙이 있어야 할 곳이 어둑했다. 없어진 모양이구나 생각하려는 그때 낯익은 지붕이 먼저 보였다. 그리고 닫혀 있는 대문이. 유리 문고리는 어디로 갔는지 없었지만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그 시절과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인기척은 없었고 대문에는 매매에 관심 있으면 부동산으로 연락하라는 안내가 한글과 영어로 붙어 있었다.
“문화재등록을 안 했구나, 팔려고 내놓은 걸 보니. 이거 희귀한 2층 한옥 같은데. 언니, 여기 1층 2층 사이에 다락 있지 않았어요?”
나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틈틈이 거기 내려가 무언가를 정리하던 문자 할머니 모습이 생각났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보이던 환한 가르마도. 제갈도희는 백팩에서 카메라를 꺼내 집 사진을 찍었다.
“어려서 산 집도 멋짐이네요.”
초점을 맞추며 제갈도희는 엄지를 들어 보였다.
“나, 평생 들을 멋지다는 말 도희씨에게 다 들은 것 같아. 자존감 장난 아니게 높아진다.”
“들을 만하십니다.”
나는 마지막으로 내가 지냈던 방의 창문을 한번 바라보았고 옛날에는 없었던 작은 나무가 담장 높이로 자라고 있는 것을 눈에 담았다.
(다음호에 계속)
* 생선 잇몸이 시릴 정도의 추위는 바쇼의 하이꾸를 변용한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