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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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란 朴笑蘭

1981년 서울 출생. 2009년 『문학수첩』으로 등단.

시집 『심장에 가까운 말』 『한 사람의 닫힌 문』 『있다』 등이 있음.

noisepark510@hanmail.net

 

 

 

병중에

 

 

변기를 바꿔야겠어요 언제 이렇게 낡은 건지,

아버지는 말이 없다

잠에서 깨어 진통제를 한알 털어넣고서 미지근한 물을 머금고서

나를 본다 선산 구덩이보다 퀭한 눈으로

 

내 너머 구부정한 창이 부려놓은 캄캄한 골목을

 

아버지는 망설인다

변기, 변기라니

 

매시간 화장실을 드나들면서도

사는 게 암병원 같다고 끝없이 이어진 흰 복도 같다고

꺼지지 않는 빛

그런 게 얼마나 잔인한지

 

아버지는 화를 낸다 대장을 한뼘 넘게 잘라낸 뒤

 

미래, 미래라니

너는 어떻게 그런 걸 쓸 수 있는 거냐?

 

쓰는 거예요 그냥

 

꼭 사기 같다 그런 건 너무 어렵고 너무 비싸고

나는 감히 살 수가 없어

살 수가 없다

 

앓다 기진한 아버지 곁에

아무것도 기약하지 않는 기약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시간은 질금질금 흐르겠죠

악취를 풍기며 역류하겠죠 때때로 뒤틀리는 배를 움켜쥐고서

간신히 아주 간신히

 

괜찮은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거예요 이웃을 돕고 길고양이의 밥을 챙기고

곧잘 눈을 피하면서도

사랑을, 백지에 가까운 믿음을 이야기하며 조금도 아프지 않은 척

아픔에 대해 뭘 좀 아는 척

쓸 수 있을지도 몰라요 남들처럼

 

큰 병에 걸린 게 아닐까 가끔은 전전긍긍하면서

 

문을 박차고 나갈 수 있을지도 몰라요 오물이 넘실대는 바깥으로

전진! 전진!

 

목구멍 깊숙이 들이쉴 한번의 숨을 위해,

꿈이나 영원이 아니라 비유로 꽉 찬 처방전이 아니라

무사히 똥을 싸고 오줌을 누는

그런

 

한알의 작고 둥근,

 

아버지는 그만 화를 낸다 꽉 막힌 삶에 시위라도 하듯

맹렬히 잠든다

TV에서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먼 나라 먼 도시 먼 사람들이

여전히 살고

찢어진 텐트 속에서

 

채널을 돌리면 낯모를 웃음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데

 

변기를 바꿔요 아침이 오면

형제종합설비에 전화를 걸어요 묵은쌀을 불려 죽을 끓이고

조금 울다가

멀고도 가까운 웃음에 덩달아 피식 웃다가

조금 살아요

 

미래, 미래라니

혀를 끌끌 차면서

 

오늘, 그리고 어쩌면

오늘,

오늘의 고지서를 챙기고 오늘의 달력을 넘기고 집 앞 농협에서 얻어 온

오늘의 시를 떠올리며

 

조금 더 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