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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황유원 黃有源
1982년 울산 출생. 2013년 문학동네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세상의 모든 최대화』 『이 왕관이 나는 마음에 드네』 『초자연적 3D 프린팅』 등이 있음.
yuwon626@hanmail.net
무언어
말이 필요 없다는 말이 좋다
너무 많은 말과 소리
너무 많은 글자들 속에서
이해하지 못할 소리로도 모자라 자막까지 따라 읽어야 하는
피로함 속에서
말이 필요 없는 영화가 좋다
미켈란젤로 프람마르티노 감독의 영화 「네 번」 DVD 뒤에는
Language 무언어
Subtitles 무자막
Running time 88분
이라고 되어 있었다
매일 저녁 노인은
염소젖과 바꿔 온 한줌의 성당 먼지를
물에 타 마시고
그러면 자신의 병이 나을 거라고
굳게 믿는다
88분간 이어지는 가차없는 무언어 속에서
말은 자막을 잃고
보는 이는 할 말을 잃고 만다
할 말을 잃고 만 사람의 얼굴에 지어진 표정 위로는
부드러운 먼지가 쌓이듯
무언어가 내려
쌓이고
그는 먼지를 털고 일어나지 않는다
그는 먼지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
휴대폰이나 확인하러 내면 밖으로
걸어나가지 않는다
그 모습 그대로 말없이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고
말과 말 사이
말 잠깐 쉬는 곳에서
먼지를 가루약처럼 물에 타 마셨다
멀리멀리 퍼졌다
아이스크림의 황제
제이크 레빈에게
나는 배스킨라빈스에 절대 가지 않지만
오늘 문자로 도착한 KT멤버십 생일쿠폰에 배스킨라빈스 4천원
할인권이 포함된 것을 보고
오랜만에 배스킨라빈스나 한번 가볼까
하고 생각한다
우리 동네처럼 작은 동네에도 있는 배스킨라빈스
너 반월 왔을 때 딱 한번 같이 가본 배스킨라빈스
차가운 아이스크림 먹고 기뻐하던 네 얼굴이
나는 아직도 눈에 선해
그 장면은 갓 퍼낸 아이스크림처럼
고물 냉장고 같은 내 머릿속에
녹지 않고 남아 있다
이상하다
너는 아이스크림의 황제도 아닌데
내게는 네가 꼭
아이스크림의 황제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그때 그 과도할 만큼의 달콤함이
기억에 묻어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기억만으로도 벌레가 꼬일 만큼
우리 동네의 자랑인 사슴벌레들이
사방에서 날아와 입을 박고 빨아댈 만큼
그러면 너는 크로넨버그 영화나 카프카 소설 속 주인공처럼
사슴벌레 여인과 키스하고
사슴벌레 여인이 썩은 나무 안에 한가득 낳는 새하얀 알을
여인과 함께 돌보게 되는 것이다
알을 까고 나오는 자그마한 사슴벌레 황손들의 양육자가 되어
배스킨라빈스 31을 365일 매일
갖다 먹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너는 다시
반월에 찾아올 것이다
오늘 나는 네가 없는 배스킨라빈스 반월점에 혼자 있지만
또 어느날 너는 내가 없는 배스킨라빈스 반월점에 혼자 찾아와
오늘의 나처럼 그때 그날을 떠올릴 것이다
그날은 참으로 달콤했다고
그동안 뱃살이 늘고 당수치도 늘었지만
다 그럴 가치가 있었다고
삶은 언제나 쓰디쓰지만
잘 살피면 그 안에는 많은 달콤함이
초콜릿 알갱이처럼 박혀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