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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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특별기고

 

 

김시종 金時鐘

1929년 부산 출생. 제주도에서 성장하던 중 1948년 4·3항쟁에 참여했다가 이듬해 일본으로 밀항해 1950년 무렵부터 일본어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시집 『지평선』 『니이가타』 『이카이노시집』 『경계의 시』 『잃어버린 계절』 등이 있다.

 

 

* 『잃어버린 계절』로 타까미준상(高見順賞)을 받으러 토오꾜오로 향하던 2011년 3월 11일, 동일본대지진이 발생했다. 이만명 가까운 사람들의 목숨부터, 말할 수 없는 생명의 엄청난 죽음. 너무 많은 죽음을 생생히 지켜봐야 했고, 출입금지 지역에서 떠돌고 있는 무표정한 개를 만부득이 보기도 했다. 노아의 홍수가 연상되는 대지진은 그대로, 일본에서 지금까지 나왔던 현대시의 현실마저 파탄으로 몰고 갔다. 관념적인 사념의 언어, 어디까지나 타자와는 포개지지 않는 지극히 사적인 자신의 내부 언어, 그런 시가 쓰이는 바탕이 근저에서부터 뒤집혔음을 실감했다. 시간이 지나 후꾸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원자로건물의 폭발조차 지나간 기억이 됐고 원자력발전소 재가동이 기정사실로 굳어져 진행되고 있다. 8월은 일본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달이기도 하다. 번쩍이는 태양 아래 일본 전체의 바다와 산이 흥청대고 있다. 아지랑이 연작시 「마르다」 「피어오르는 8월」과 「애도 아득히」(『背中の地図 金時鐘詩集』, 2018)는 동일본대지진 이후 재난을 ‘기억에 스며들게’ 하려 어떻게든 써내려간 시다.

 

 

 

마르다

아지랑이(陽炎) 연작 1

 

 

바라보는 저 멀리

햇볕도 쨍쨍한 아지랑이 되어

아지랑이 되어,

그림자도 오그라들고

골조만 남은 청사(廳舍) 잔해

아지랑이 되어

오가며 지냈던 삶, 사람들의 노래,

그곳에서 속삭이던 푸른 사상도

죄다 바싹 말라비틀어져

태고의 황무지로 아지랑이 되어

우리의 열망, 우리의 내일,

남몰래 흘린 잔해의 눈물

우물거렸던 분노도 염천(炎天)에 출렁여

아지랑이 되어,

밤하늘에 언젠가 흩어져 깔린

마음 쏠리는 시공의 채색

꽃불

그래, 그리고 달,

하나하나 마음에 머문

작은 기원의 별

모든 일이 끝난 후

가시빛에 앙얼(殃孼)을 입은 것

온종일 녹색 날개를 펼치고

섬광에 캄캄해지는 흑내장의 여름을 뒤틀리게 하는 것

또다시 돌고 돌아 여름이 오고

아뜩한 빛의 어둠이 되어

바라보는 곳은

어둠이 되어

 

 

 

피어오르는 8월

아지랑이(陽炎) 연작 2

 

 

햇살도 빛도

염천에 출렁이며 아지랑이 되어

땀투성이 기억의 아지랑이 되어,

팽팽하게 뻗어 부풀어

터무니없는 풍선(風船)의 백열 되어

8월의 꿈, 울려 퍼진 노래,

모여드는 그리움도 깊어진 채로

빙정(氷晶)을 머금은 먹장구름 되어

불현듯 인간세계에 놋날을 드리우듯 들이쳐

또다시 물크러지고 번쩍이며

비탄도 함성도 기화(氣化)됐던 날들도

흰 햇살 아지랑이 되어,

사물 언저리에서 끓어올라

희구도 기원도 가로막힌 언어도

바삭 마른 아지랑이 되어,

8월의 하늘

천공을 태우고

치솟아 올라간 구름

흔적도 없이 삼킨

하늘의 깊이를

기영(機影) 한줄기 꿰뚫고 가고

활주로 넘실대며

흔들흔들 철조망 너머로 아지랑이 불타고

눈앞이 어두워지도록 출렁이는

한나절 빛 아지랑이 되어,

원자로건물 그대로 드러난 덮개에서 끓어올라

점점 불어나는 지구의

늘어진 더위 아지랑이 되어

나날의 밑바닥을 휘젓고 뒤틀어

하얗게 불타올라

아지랑이 되어,

가냘픈 연기의

한줄기 선향 아지랑이가 되어

 

 

 

애도 아득히

 

 

몸뚱이는 뒤얽혀 떠내려가는 나무가

정체된 밑바닥에서 흘러내린다

판별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을 벗어난 시체였다

밤새도록 태풍이 몰아친 여파로 비바람이 치고

사람들은 숨을 죽이며 돌아오지 않는 가족의 권화(勸化)를 빌었다

 

내 양손은 합장한 채로

굳어갔다

확실히 축축해진 손이었다

천외(天外)의 푸른 불을 끌어들여

단란함을 떠올리게 한 마을이었다

그해 봄

마을과 함께 휩쓸려 사람들이 사라지고

그해 여름에도 다시 여기저기 산이 허물어지고

사람들이 사라졌다

 

사람이 거주할 수 없는 공백이 주위를 없애고

갑자기 침묵이 일어

버스기사가 돌아봤다

나는 입까지 굳었다

동공이 없는, 그는 죽은 자다

쌓인 잔해 사이를

자원봉사자의 선의가 함께 태워진 채 달리고 있다

 

바싹 마른 말을 내뱉고

차창을 열어 들이마시고, 또 내뱉어도

빼앗긴 목숨의 행선지는 희미해서 보이지 않는다

어지간히도 깊게, 죽은 자가 자신의 죽음을 매장한다

시대가 뒤틀려서 몸부림칠 때만큼

사람은 신묘하게, 죽은 자가 없는 죽음을 애도한다

애도함으로 갑자기 죽음을 묘석으로 바꾼다

시체는 점점 더 속이 텅 비어간다

죽은 자는 누구이며 나는 어떤 죽음의 누구에게

손을 모으고 있는 것일까

 

이변은 예측하지도 못할 황폐함을 낳고

휩쓸려간 거리는 또렷이 에워싸여

잠겨 있다

어쨌든 나는 나아가야만 한다

그것도 돌아오기 위해

나는 가서 되돌아와야만 한다

처음 지나가는 해변 마을의

그림자조차 둔한 저녁놀 속을

번역: 곽형덕(郭炯德)/명지대 일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