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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하재영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 휴머니스트 2023
더 나은 실패를 위한 여성들의 기록
김다솔
문학평론가 solmeng2@naver.com
하재영의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 엄마와 딸의 공동 회고록』은 애증의 대상이자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결코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어머니라는 모순을 직시하면서 “엄마에 대한 모름을 앎으로 바꾸기 위해 시작”(7면)된 기록이다. 전작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라이프앤페이지 2020)에서 자전적 이야기를 통해 공간 이상의 의미를 지닌 집이 여성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풀어낸 바가 이 책의 토대가 되었을 터이다. “집이라는 ‘물리적 장소’ 안에서 여성의 ‘상징적 자리’를 가늠해보려는 어설픈 시도”(『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218면)를 딛고, 사회 내에서 여성성이 주조되어온 흔적과 현재 여성이 선 자리를 면밀히 짚어보려는 것이다. 특히 모성과 모계는 여성에 대한 억압을 본질적으로 정당화하는 도구로, 억압을 대물림하는 비틀린 관계로 오래 작용해왔다. 그러나 여성이 스스로의 힘을 응시하고 존재의 의미를 다시 정의해나갈 때 무슨 일이 가능해질까.
저자는 어머니와 함께 그동안의 삶을 반추하며 여성이 자신을 직접 발화할 수 있도록 목소리를 되찾는 데 무게를 둔다. 수동적으로 정의되던 여성이 “자기 삶의 저자가 되는 ‘사건’”(15면)을 구현하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때의 글쓰기는 곧 ‘싸우기’이자 “생존자임을 감각하는 행위”(165면)가 된다. 하지만 어머니에 대해 쓰는 것만큼 지난한 일이 또 있을까. 어머니라는 명칭이 한 사람을 가릴 만큼 어두운 심연과 같다면, 우리는 거기에 어떤 말을 덧붙일 수 있을까. 그래서 이 책의 목적은 어머니의 입장을 완벽히 복원하거나, 여성의 성공적인 깨달음과 탈주를 완성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저자는 딸로서 필연적으로 어머니의 삶을 오독하고 불완전하게 재현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예정된 실패를 향해 묵묵히 써나간다.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의 명구이자 책의 제목이기도 한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에는 이러한 다짐이 적실하게 담겨 있다. 주로 어머니와 딸의 거리를 강조해온 기존의 해석에 저자는 두가지 오독을 덧붙여 모녀를 고립으로부터 구원하고자 한다. 해당 문장이 거부하는 어머니는 현실의 어머니와 무관하게 만들어진 ‘어머니 원형’이다. 그렇기에 어머니가 ‘없다’라는 말은 새로운 여성으로 살겠다는 결의의 표현이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이러한 용기가 어머니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상속으로부터 온다는 점이다. 어머니의 삶의 어떤 순간들은 여성들을 자신으로 살지 못하게 만든 질서를 바로 보게 만든다. 그 안에는 부당함 속에서도 자신을 지키려 애써온 어머니의 노력과 ‘여성적 힘’이 함께 들어 있다. 그렇기에 저자는 거부할 것과 계승해야 할 것을 가르며 말한다.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기를 다짐하면서, 엄마처럼 살기를 소망한다.”(210면)
저자는 우선 결혼 전에 누린 특혜와 결혼 후에 겪은 차별을 알고 있지만 스스로를 평범하다고 말하는 어머니와, 점차 유순한 아이로 커갔던 자신의 유년기를 겹쳐 본다(1장). 한국사회에서 여성으로 태어나 ‘평범한 여자아이’가 되어 아내·며느리·엄마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여성들은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언어와 목소리를 잃게 된다. 세상을 구성하는 기존의 언어는 모든 여성을 오래된 이야기 속에 가두려 한다. “‘성차별주의’는 나의 모국어였다”(77면)는 진술은 그런 의미에서 깊이 와닿는다. 이러한 세계 속에서 모성과 여성성은 신화화되어 여성을 속박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여성의 공간은 한정되거나 사라지고, 모든 노동은 오직 ‘스위트홈’에 복무하거나 남성이 허락하는 한에서만 인정받을 수 있다(4장). 또한 구조의 불합리성을 가리기 위해 모든 결함의 원인으로 어머니가 지목되면서, 여자가 여자를 키울 때조차 가부장제의 문법을 답습할 수밖에 없는 악순환이 이어진다(3장).
그러나 이러한 실어(失語)의 순간이 기존의 언어를 의심하고 ‘다른 목소리’를 얻는 시작점이 되기도 한다(2장). “아무것도 아닌 사람”(31면)으로 자신을 정의하던 저자의 어머니는 회고의 후반부에 이를수록 회한이나 좌절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자존감과 책임감으로 본인과 가족을 지키며 살아온 삶의 궤적을 자긍한다. 또한 교제폭력과 스토킹을 계기로 “의식의 깨어남을 경험”(165면)한 저자는 글쓰기를 통해 꾸준히 투쟁해왔다. 그중에서도 어머니‘들’처럼 ‘비존재’로 치부되어 사라진 여성들을 기록하는 일은 더없이 중요하다(5~6장). 저자가 “개인적으로 가장 어렵고 불편한 이야기”(194면)라고 밝힌 친할머니와 어머니의 관계를 보자. 이들의 명예 남성-여성으로서의 관계가 분노 못지않게 깊은 사랑으로 이루어졌음을 이해할 때, 비로소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의미에서 “갇혀 있는 자”(210면)이며 그 기저에 깔린 여성의 선택 불가능성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직시할 수 있다.
또한 가족과 함께 살았던 친할머니와 달리 회고할 기억조차 없는 외할머니를 떠올리면서 저자는 “진정으로 비존재”인 외할머니와 달리 “엄마를 ‘존재’하게 만들기 위해서”(260면) 글을 이어나가야 한다고 밝힌다. 그러나 저자가 책의 한계이자 결여로 누차 인정하고 있더라도, 이 지점에서 드는 아쉬움을 감추기가 어렵다. 친할머니와 어머니의 관계가 중심이 된 5장에 비해, 6장에서 외할머니의 이야기는 핵심으로 다뤄지기보다 질병과 나이 듦에 희석되어버리고 마는 듯한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기억과 경험의 공백은 되돌릴 수 없지만, ‘말할 수 없음에 대한 말하기’는 가능할지도 모른다. 이 불가능성 자체를 집요하게 파고들 때 더 풍부한 결여가 쓰일 수 있을 것이다.
여성의 계보에 대한 사유는 노화와 노년 여성에 대한 책임으로까지 뻗어나간다. 언제나 돌봄의 짐을 진 주체이기만 했던 여성의 돌봄받을 자격을 함께 사유하는 것이다. 이때 불완전할지라도 연결될 가능성을 놓지 않는 해러웨이(D. Haraway)의 감응 가능성(response-ability)에 기대어 꿈꾸는 세계(255면)는 조금 더 따듯하고 덜 결핍된 곳일 테다. 어머니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힘을 물려받은 딸이자 번번이 이해에 미달하면서 그녀를 사랑하는 나로서는, 더 나은 세계를 위한 저자의 이 끝없는 실패를 응원할 수밖에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