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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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환 朴一煥

1961년 충북 청주 출생. 1997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등단.

시집 『푸른 삼각뿔』 『끊어진 현』 『지는 싸움』 『등 뒤의 시간』 『귀를 접다』 등이 있음.

pih66@naver.com

 

 

 

박제가 된 파리

 

 

박제가 된 천재를 아시오?

이상은 그렇게 말했다는데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박제가 된 파리를 아시오?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에 들렀더니

소변기 가운데 파리 한마리 붙어 있다

밖으로 오줌이 튀지 않도록

조준을 잘해서 누라는 표지다

 

아무리 갈겨도 끄떡없는 파리를 향해

오줌을 누다 말고

파리보다 못한 것들을 떠올리는 건

내 오줌발이 약해서가 아니다

 

그 자리에 왜 대통령이나 하다못해 재벌 회장, 방송사 사장, 같잖은 국회의원 나리들을 갖다 붙이지 못했을까?

겨우 파리나 겨냥하도록 만든 것도 우습지만

애써 정조준해보려 했던 나도 우습기는 마찬가지다

 

모욕을 모욕으로 느끼지도 못하는 사내들이

엉거주춤 바지춤을 올리고 돌아설 때

박제가 된 파리는, 다음 차례는 누구야?

와서 마음껏 갈겨봐!

덤벼, 덤비라고, 기껏 파리채나 들고 다니는 비루한 것들아!

 

한껏 비웃음을 날리며

지린내 나는 소변기 중앙에 악착같이 달라붙은 파리는

피하거나 도망갈 생각 같은 건 한번도 하지 않았다

 

 

 

일사분란

 

 

학교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배운 건

앞으로나란히!

 

우향우! 좌향좌!

앞으로가! 뒤로돌아가!

구령 없이는 움직이지 못했던 날들

 

앞으로나란히!

구령에 맞춰 올려 뻗은 손을

아직도 못 내리고 있는 이들 있겠지

 

줄 밖으로 고개 내밀지 말라고

여전히 소리치는 목소리도 있을 테고

 

그런 와중에 마주친 일사분란

맞춤법도 모른다며 쯧쯧, 혀를 차는 당신 곁에서

나는 왜 눈이 번쩍 떠졌을까?

 

일사불란을 흠모하는 대신

분란을 견디는 힘을 길러야 하지 않겠냐고

이구동성 곁에 이구다성도 놓아두면 어떻겠냐고

 

중얼거리며 혼자 히죽 웃어보는 동안

앞으로나란히!

환청이 난청이 되어 마구 뒤엉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