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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정지돈 鄭智敦
1983년 대구 출생. 2013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소설집 『내가 싸우듯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서 살 것이다』 『인생 연구』, 장편소설 『작은 겁쟁이 겁쟁이 새로운 파티』 『야간 경비원의 일기』 『모든 것은 영원했다』 『…스크롤!』 등이 있음.
hier910@gmail.com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
중요한 것은 보이는 것이며, 보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한스-게오르크 묄러·폴 J. 담브로시오
1
어린 시절 너는 드라이브를 좋아했다. 아버지는 오래됐지만 튼튼한 구형 피아뜨에 너와 어머니를 태우고 아뻰니노 반도 곳곳을 돌아다녔다. 너의 부모는 밀라노에서 함께 유학생활을 했고 너는 소수의 한인들에게 축하를 받으며 태어났다. 너는 돌로 된 바닥을 맨발로 밟으며 자랐다. 크고 육중한 건물에 둘러싸인 좁은 골목에는 해가 잘 들지 않았지만 맑은 날에는 건물의 높은 쪽에 드리운 햇살을 어김없이 볼 수 있었고 너는 발코니에서 담배를 피우는 어머니를 올려다보며 그녀가 내려오길 기다렸다. 아버지가 시동을 켜둔 차에선 비린 기름내가 옅게 풍겼고 낡은 가죽시트는 늙고 작은 포유류의 가슴팍을 만지는 듯 부드러웠다. 너는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아버지는 해진 지도를 펼쳤다 접길 반복했고 어머니는 너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손으로 빗어 넘겼다. 평원의 좁은 도로를 스쳐 지나는 차의 뒷좌석에는 갈색 곱슬머리 소년이 앉아 있었고 너와 소년은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느날 우르비노로 가는 언덕에서 타이어가 펑크 났다. 너의 어머니는 준비도 없이 여행을 나선 아버지를 탓했고 아버지는 지금 와서 그걸 따지는 게 무슨 소용이냐고 화를 냈다. 은퇴한 독일인 노부부가 차를 세우고 너의 가족을 도왔다. 노부부와 너의 가족은 우르비노의 오래된 뜨라또리아에서 식사를 했다. 너는 어머니의 품에 기대 잠들며 노부부의 반려견을 훔쳐봤다. 노부부처럼 늙은 닥스훈트는 바닥에 턱을 대고 누워 있었다. 꿈속에서 너는 닥스훈트에게 손을 물렸지만 아프지 않았고 이빨이 살을 파고드는 모습을 이상하리만치 담담히 바라봤다.
너는 과거를 잃어버렸다. 너의 부모는 말을 배우고 처음 친구를 사귄 너를 데리고 서울로 왔고 오래지 않아 갈라섰다. 너의 부모는 각자의 길을 선택한 후에야 상대를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왜 함께 살기를 결심했던 것일까. 왜 그토록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고 애정과 관심을 갈구하고 실망하고 분노했던 것일까. 그것은 차라리 증오가 아니었을까. 너의 부모는 만남이 풀리지 않는 신비이자 수수께끼라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변한 건 없었다. 부모의 이혼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너에게 아버지는 책에서 본 격언을 일러줬다. “펑크의 원인인 못을 찾는 것은 타이어를 교체하는 방식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너의 아버지는 다음 해 다른 사람을 만났고 결혼식을 올렸다.
너는 어린 시절 살았던 나라의 언어를 잃어버렸고 창문 밖으로 보이는 나무와 붉은 벽, 문 앞에 세워둔 자전거와 피아뜨, 거리의 사람과 풍경을 잃어버렸고 그들을 바라보는 너를 잃어버렸고 그들이 바라보는 너를 잃어버렸다. 너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집을 오가며 자랐고 너와 피부색이 같은 사람이 대다수인 나라에 적응해갔다. 사회는 빠르게 변하고 있었고 매 계절마다 새로운 프로그램이 시작되고 새로운 플랫폼이 유행했다. 너의 친구들은 너에게 태그를 달거나 달지 않았고 너의 연인들은 너를 드러내거나 너를 숨겼다. 요가를 하고 필라테스를 하고 볼더링을 하고 크로스핏을 하고 조깅을 하고 새로운 식단과 레시피와 책과 드라마와 전시를 공유했고 포트폴리오를 관리했다. 사람들은 스크린을 통해 인터넷을 통해 앱을 통해 서로를 드러내고 바라봤다. 홍수로 침수된 SUV의 루프에 앉아 핸드폰을 하는 사내의 사진이 밈으로 유행했고 너의 지인들은 사진을 공유했다. 중고차 시장에 침수된 차가 풀릴 거라는 게시글이 올라왔고 너는 밈의 흐름으로 세상의 정서를 이해했다.
정부가 개인계발지수 시스템 시행령을 발표했을 때 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들은 개인계발지수가 감시자본주의의 억압적인 체제이며 새로운 전체주의사회를 만들 거라고 걱정했지만 너는 다르게 생각했다. 사람들은 이미 사람에게 등급을 매겼다. 너는 학자금대출 연체기록 때문에 신용등급이 떨어진 경험이 있었고 은행에서 당한 수모를 기억했다. 오로지 경제 능력만으로 등급을 매기던 시절에 비해 개인계발지수는 객관적이고 인간적이었다. 부채 상환뿐 아니라 무단횡단, 음주운전 같은 사소한 교통법규 위반부터 마약 및 성범죄 등과 같은 범죄 이력, 기초대사율, 체지방률, 근육량, 폐활량 등 신체 능력과 수면시간, 스크린타임, 교육기관 및 직장 내 성취와 평판, 대인관계, 커뮤니티, 소셜네트워크 활동, 외국어 능력 및 자격증 취득, 자원봉사, 가정생활, 성적 취향 등 가능한 모든 자료를 수집한 빅데이터를 토대로 매겨졌다. 무엇보다 개인계발지수의 평가 기준은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지수는 비교나 경쟁의 목적이 아닌 개인이 스스로를 향상시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를 측정했다. 이는 최적화라는 용어로 요약된다. 너는 너에게 얼마나 최적화되었는가.
너는 셀프메이커 앱을 다운받았다. ‘셀프’는 개인계발지수의 실시간 변동상황을 알려주는 앱으로 론칭한 지 오년 만에 육십세 이하 국민 절대다수가 사용하는 서비스로 자리 잡았다. 셀프를 통해 사람들은 서로의 지수를 체크하고 최적화의 기술을 배우고 포트폴리오를 매력적으로 관리했다. 셀프에 접속하면 릴케의 유명한 시구에서 따온 문장이 메인화면에 떠오른다.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 조각가인 너의 연인은 릴케의 문장이 사실은 오귀스뜨 로댕의 가르침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알려준다. 돈이 궁하던 젊은 시인 릴케는 미술가연구 총서에 들어갈 로댕 파트를 써달라는 청탁을 받는다. 진짜들 사이에서 진짜처럼 느끼고 진짜로서 존재하기를 갈망했던 릴케는 로댕에 대한 논문을 쓰면 그런 삶이 가능할 것이라 믿었고 두 사람은 그렇게 가까워졌다. 릴케는 로댕에게 진짜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진짜 예술과 진짜 삶은 무엇인지 끊임없이 물었다. 그때마다 로댕의 답은 한결같았다.
“일하라, 늘 일하라.” 일에 대한 강박적인 헌신은 로댕의 특징이었다.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는 격언 뒤에 울리는 일하라는 후렴구는 직업으로서의 업무가 아니라, 지속적인 수련만이 바위 속에 묻혀 있는 형상을 발굴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고, 너의 연인은 거들먹거리진 않았지만 귀가 아플 만큼 흥분해서 이야기했다. 편안한 삶의 방식을 포기해라,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속물적인 만족을 버려라, 계속해서 공부해라, 노력해라.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 너는 셀프의 메인화면에 떠오른 문구를 볼 때마다 손마디가 저릴 정도로 두근거림을 느꼈다.
아침에 너의 귀에 제일 먼저 들리는 건 셀프의 수면사이클 탐지 알람이다. 셀프는 밤사이 너의 뒤척임을 감지하다 잠에서 깨어날 때 즈음 알람을 울려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기상을 유도한다.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 너는 쏟아지는 DM 소리에 눈을 뜬다. 셀프 앱에 수십개의 DM이 와 있고 확인하는 중에도 계속 알림이 온다. 너는 어제만 해도 상위 19퍼센트였던 너의 지수가 상위 1퍼센트로 상승된 걸 확인한다. 상위 11퍼센트인 너의 연인에게서 DM이 왔다. 어떻게 된 거냐고, 방법을 알려달라고. 너는 용수철처럼 침대에서 튀어올라 핸드폰을 확인하며 방 안을 서성인다. 무슨 일일까? 왜 갑자기 지수가 상승한 것일까? 육개월째 꾸준히 나가고 있는 지속 가능한 종이책 읽기 모임이 효과를 발휘한 것일까? 아니면 지지난달 시작한 저탄고지 트래킹과 ‘보스(boss)의 마라톤’이 영향을 준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지수가 급등할 요인이 없다는 걸 너는 안다. 그러나 너는 상위 1퍼센트의 지수가 무엇을 뜻하는지 깨닫는다. 너는 아버지의 말을 떠올린다.
2
너는 멀리 철도가 내려다보이는 오피스텔의 분리형 원룸 38층에 살았다. 습도 높은 여름, 어두침침한 복도에서 이웃 주민, 택배기사, 음식배달부, 저층의 회사 직원들 틈에 섞여 오지 않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때면 너는 어린 시절 살았던 장소를 생각한다. 활짝 열리는 창문과 새소리, 황금빛으로 빛나는 나무와 낙엽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적막한 거리. 오피스텔의 창문은 절반도 열리지 않았고 방충망은 조금만 힘을 써도 고장 났다. 집주인은 멀쩡하던 방충망이 이번 세입자 때만 고장 난다고 투덜댔고 네가 하루라도 월세를 늦게 입금하면 문자를 보내 독촉했다. 너는 계약 당일에 딱 한번 본 집주인의 얼굴을 기억한다. 오버사이즈 후드티를 입은 앳된 남자가 너의 앞에 앉아 다리를 떨며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계약서 처음 쓰는데 어떻게 해? 엄마, 엄마! 집주인은 너보다 어렸지만 너의 집과 비슷한 원룸을 대여섯개는 가지고 있었다.
너는 부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너는 세속의 욕망을 턱없이 쫓는 군중이 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너는 부자가 되고 싶었다. 어떤 여유,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 불쾌한 소음과 냄새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세상에는 그것을 가진 사람이 수없이 많다. 너에겐 없고 그들에겐 있다는 사실이 너를 분노하게 했다. 너보다 어리고 계약서도 쓸 줄 몰라 엄마에게 전화를 거는 애송이도 제대로 된 삶을 소유하고 있다. 너는 그의 개인계발지수가 몇 퍼센트인지 궁금하다. 너는 셀프로 그를 찾는다. 그의 지수는 15퍼센트다. 너는 이해할 수 없다. 그의 바지 벨트 위로 불쑥 나온 뱃살을 봤는데! 그러나 셀프의 포트폴리오를 확인한 너는 분노를 넘어 체념의 단계에 이른다. 그는 좋은 학력, 뛰어난 외국어 실력, 다종다양한 취미와 특기—스노우보드, 스쿠버다이빙, 피아노 연주와 코딩 자격증 따위—를 지니고 있었고 수만의 팔로워가 있다. 마약이나 성범죄 전과도 없고 주차위반 딱지 하나 떼지 않았다. 이 마마보이가 이렇게 멀쩡하다니! 너는 그가 보스의 마라톤 활동을 하고 있는 걸 발견한다. 지수 상위 20퍼센트 이상만이 동호회에 가입할 수 있다. 그때 너의 지수는 24퍼센트였다.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땀냄새 나는 엘리베이터에 갇혀 살 것이다.
이제 지수 상위 1퍼센트가 된 너는 새로운 집을 알아본다. 은행은 매매비용의 90퍼센트를 저금리 신용대출인 지수론으로 내줄 것을 약속한다. 지수 시스템을 운영하는 인적자원부가 너의 포트폴리오를 보증한다. 너는 가치투자가 유망한 종목이다. 보스턴에 본사를 둔 다국적 컨설팅 기업의 서울 지사에서 이직을 제안한다. 너는 수락한다. 너는 다이니마 소재로 만든 트레일러닝화를 구입하고 연인과 아이슬란드로 한달간 여행을 떠난다. 너와 너의 연인은 레인지로버를 렌트하고 섬의 서쪽 끝에 위치한 화산 스나이펠스외쿨로 향한다. 여행 중에도 독서와 운동, 명상 루틴은 계속된다. 너는 여행 기간 내내 셀프에 게시물을 올린다. 너는 유난 떠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으려 애쓴다. 남다른 경험을 추구하지만 관종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의식있으면서도 젠체하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고요한 여행을 위해 알림은 끈다. 그러나 오분에 한번씩 셀프에 접속한다. 너의 연인은 얼마 전 작고한 예술가 로니 혼의 「너는 날씨다(You are the Weather)」를 업데이트한다. 「너는 날씨다」는 아이슬란드의 자연 온천에 들어간 마그레트의 초상을 담은 사진 연작이다. 너의 연인은 쓴다. “물은 상태를 바꾸고 날씨는 상황을 바꾼다, 우리는 무엇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너는 새로운 직장에서 새로운 집에서 새로운 일상을 시작한다.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오지만 받지 않는다. 그녀는 이십년째 혼자 살고 있다. 너는 어머니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른다. 연인에게는 어머니와 연락이 끊겼다고 말한다.
셀프에 너의 팔로워가 늘어난다. 매일 수백에서 수천명씩. 사람들은 너에게 DM을 보내 토로한다. 자기 자신과 삶에 실망한 경험에 대해, 어떻게 하면 우울감을 극복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자신을 되찾을 수 있을지 묻는다. 너는 셀프에 루틴을 유지하는 노하우에 대해서 쓴다. 평상심을 유지하고 일상의 고요를 바라보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너를 따라 계획하고 소비하고 활동한다.
너는 보스의 마라톤 동호회에서 집주인을 만난다. 집주인은 네가 전 세입자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 너의 지수가 1퍼센트라는 사실에 놀라고 자신의 지수가 하락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어떻게 하면 다시 올릴 수 있을까요? 너는 지수에 집착하지 말라고, 자신의 리듬을 지키라고 대답한다.
집주인은 내년에 있을 런던마라톤을 같이 준비하자고 제안한다. 너는 관심이 없지만 생각해보겠다고 말한다. 그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사이를 유지하면 도움이 될 거라고 판단한다. 너는 종종 오는 그의 연락을 즐긴다.
네가 새로운 직장에 출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트레이닝복을 입은 남자가 칼을 들고 행인들을 쫓아다니는 사건이 일어난다. 너의 직장에서 멀지 않은 업무지구의 사거리에서 일어난 일이다. 또다른 뉴스가 이어진다. 대기업 과장인 한 남자가 점심시간에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린다. 벌거벗은 신원 미상의 여자가 기차에 뛰어든다. 한 사내가 대형쇼핑몰에서 칼부림을 예고한다. 붙잡힌 사내는 실행 의지가 없었다고 주장해 집행유예를 선고받는다. 경찰 조사과정 후기를 웹에 남긴 사내는 순식간에 스타가 된다.
잠자리에 든 너의 머릿속에 못이 떠오른 건 그즈음이었다. 너는 자고 있는 연인을 깨워 아버지의 자동차가 펑크 난 건 독일인 부부가 버린 못 때문이었을 거라고 말한다. 연인은 알아듣지 못한다. 너는 애초에 드라이브를 가지 않았으면 펑크가 나지 않았을 거라고, 도로에 못이 있다는 것도 몰랐을 거라고 말한다. 너의 연인은 너를 달래고 곧 다시 잠에 든다. 하지만 너는 뜬눈으로 밤을 새운다. 너는 불안하다. 왜 내가 상위 1퍼센트가 된 걸까.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너를 따르는 이유를 알 수 없다. 너는 스스로를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스쾃 무게는 늘지 않고 체지방률은 높고 C#언어 수업은 시작도 못했다. 읽어야 할 책은 줄지 않으며 업무 관련 리서치는 진전이 없다.
너는 혼란스럽다. 지수가 진짜 너를 반영하고 있는지, 회사에서 너의 업무가 무엇인지, 네가 회사에서 하는 일이 정확히 무엇에 기여하고 무엇을 생산하는지 의심스럽다. 네가 속한 부문 파트너는 “책임있는 리스크 수용자들로 이루어진 사회를 발전시키기 위해 리스크와 안전 사이의 관계를 변화시키는” 일을 한다고 요약한다. “우리가 더 철저하게 감시받을수록 더욱 잘 행동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은 일이 아니라 일을 위한 일이라고, 파트너는 상기시킨다.
열린 창문으로 서늘한 바람이 몰아친다. 어느 밤, 너는 연인에게 솔직하게 고백한다. 내 지수가 잘못된 것 같아. 너는 말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진실이 폭로될까 두렵다고. 블라인드의 홀더가 턱, 턱 소리를 내며 창틀에 부딪힌다. 연인은 창문을 닫는다. 그는 너의 겸손함을 나무란다. 지수가 너의 가치를 말해주고 있지 않니. 새 직장 사람들은 너를 동등하게 대하고 팔로워들은 너를 따라 발전적 자기 기술을 익히고 있어. 겸손함은 더이상 미덕이 아니야, 연인은 말한다.
연인은 마이크로도징을 권한다. 레크리에이션 용량의 십분의 일 정도의 실로시빈과 대마초에 함유된 미량의 카나비노이드를 매일 섭취하는 것이 자존감 향상에 도움이 될 것이다. 너는 중독과 경찰의 수사를 두려워하지만 연인은 웃음을 터뜨린다. 그가 구해온 약은 미국에서도 합법적인 거라고, FBI도 능률을 위해 매일 복용할 거라고 말한다.
눈이 내린다. 너는 회사 계단실 창문에 멈춰 서서 텅 빈 화산지대 위로, 회백색 연기 사이로, 온천의 불투명한 수면 위로 떨어지는 눈을 떠올린다. 약물과 결합한 너의 수용체가 세로토닌을 분비한다. 너는 못을 찾는 것보다 타이어를 교체할 방법을 찾는 것이 빠르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부문 파트너가 너에게 건네준 신경언어 프로그래밍 교수법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진실을 말할 것이냐 진실이 아닌 것을 말할 것이냐는 중요치 않다. 가장 효율적이고 건설적인 방식이 무엇인지를 자문하는 것이 중요하다.”
너는 사람들에게 들려줄 스토리텔링을 고민한다. 외국에서 태어난 너의 유년 시절과 부모의 이혼과 난독증으로 고생한 청소년기가 너의 삶을 어떻게 규정하고 옥죄었는지, 신체적 콤플렉스와 관계에서 오는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인생의 출발점이 뒤처졌다는 단점이 어떻게 반전의 계기가 됐는지 자아의 상태와 삶의 시나리오를 구성한다. 지금도 여전히 불면증과 섭식장애를 앓고 있음을 공개적으로 토로한다. 하지만 질병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안고 가야 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너는 네가 설명하는 사람이 되어간다.
그러나 너는 너를 지켜보고 있는 시스템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개인계발지수 시스템은 시행된 지 이십년을 맞아 대대적인 캠페인을 준비한다. 캠페인이 시작되기 직전에 인적자원부는 오류를 발견한다. 알고리즘의 알 수 없는 매개변수 조정으로 십수명의 사람들에게 잘못된 지수가 반영된 것이다. 너는 그중 한명이다. 시스템을 설계한 다국적기업은 알고리즘을 수정하는 일이 불러올 혼란을 염려해 사실을 공표하지 않고 오류 대상들을 관찰할 것을 권유한다. 오류 대상은 개인계발지수 시스템의 사회적 영향에 대한 귀중한 참고 사례가 될 거라는 보고서가 작성된다. 시스템을 관리하는 통계사무관 중 하나가 너의 데이터뿐 아니라 일상생활을 관찰할 업무를 부여받는다. 사무관은 해당 업무에 법적 문제가 없는지 네가 동의한 개인정보보호법 관련 서류를 검토하고 법무부의 인가를 요청한다. 사무관은 셀프에서 너의 계정을 팔로우한다. 너는 이제 유명인사다. 수만명의 사람이 너를 팔로우한다. 사무관은 매일 너의 지수를 체크하고 너의 셀프와 SNS 계정에 들어가 너의 일상을 관찰한다. 너는 차를 구입한다. 새롭게 출시된 피아뜨 전기차로, 연인은 피아뜨의 주행거리가 짧다고 반대했지만 너는 유년의 기억 때문에 피아뜨를 선택했다. 성능보다 내밀한 기억의 조각이 삶에 더 큰 영향을 끼친다고 너는 코멘트를 단다.
너는 현재의 부모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너의 부모는 과거 속에만 존재한다. 사무관은 너의 아버지가 네번째 결혼을 하고 분기마다 한번씩 너를 만난다는 사실을 안다. 그의 지수는 9퍼센트다. 그럼 너의 어머니는? 사무관은 그녀가 라임병에 대한 공포 때문에 은둔생활을 하는 기초생활수급권자라는 사실을 알아낸다. 그녀의 지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무관은 라임병에 관한 자료를 찾는다. “진드기가 사람을 무는 과정에서 나선형의 보렐리아균이 신체에 침범하여……” 라임병은 홍반, 근육통, 관절염뿐 아니라 기억장애, 기분장애, 안면마비를 일으키기도 한다. 흥미로운 건 라임병에 걸리지 않았는데도 걸린 것과 같은 증상을 보이는 라임병증후군 사례들이다. “증후군 환자들은 하나같이 사회생활을 거부하고 은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무관은 라임병증후군 환자들의 사례와 증상에 이상한 동질감을 느낀다. 그는 사람들과 교류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에겐 승진도 가족도 사회활동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적자원부에서 그의 업무는 고립되어 있고 그의 오피스텔에는 열리지 않는 좁고 세로로 긴 창문밖에 없다. 그는 밖을 보지 않는다. 그는 방 안에 앉아 반려견 우디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우디는 죽을 날을 앞둔 시력이 저하된 노견이다. 사무관보다 더 산책을 싫어하는, 무기력한 개.
3
사무관에겐 일상의 루틴이 있다. 그는 여덟시에 출근하고 다섯시에 퇴근한다. 매일 아침 오피스텔 상가 내의 까페에서 라떼를 산다. 점심은 인근 공원에서 지난밤에 싼 도시락으로 해결한다. 동료들은 혼자 도시락을 먹는 홀아비를 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는다. 퇴근길에 장을 보고 집에 들어와 발을 씻고 소파에 앉아 우디와 함께 저녁을 먹는다. 우디의 식사량은 많지 않다. 사무관 역시 아주 적은 식사량을 유지한다. 저녁을 먹고 이삼십분가량 책을 들고 멍하니 있다가—하루에 한 페이지 이상 읽는 일은 드물다—밤 산책을 나간다. 산책길에 편의점에 들러 주전부리를 사고 집에 돌아와 도시락을 싸고 칵테일을 만든다. 다양한 종류의 칵테일을 만들 수 있지만—이것이 그가 하는 가장 의욕적인 활동이다—가장 자주 만드는 건 잭콕이다. 칵테일을 마시는 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사무관의 방은 임시 막사처럼 휑하다. 침대, 옷걸이, 3단 수납장. 옷은 옷걸이 아래 수북이 쌓여 있다. 사무관은 오랫동안 새로운 것에 손대지 않고 관심 갖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너에게 관심을 가진다. 너의 연인과 너의 관계를, 네가 성장하는 모습을, 너와 연인이 피아뜨를 타고 여행하는 모습을 본다.
사무관은 구글에 피아뜨를 검색한다. 파스텔톤의 둥글고 작은 차들이 보인다. 사무관은 그중 하나를 클릭한다. 이딸리아의 남부 해변을 배경으로 만든 피아뜨의 옛날 광고다. 트렁크에는 아이보리색 가방이 실려 있고 백인 중산층 가족이 차 옆에서 환히 웃고 있다. 사무관은 너와 달리 유년에 여행을 다닌 기억이 없다. 사무관의 아버지는 가족에게 무관심했고 함께 여행을 가는 일은 상상할 수 없었다. 대학생이 되고 다른 친구들이 여행을 떠날 즈음에도 사무관은 자신이 속한 도시를 벗어나지 않았다.
서른이 조금 넘은 나이에 결혼한 사무관은 신혼여행지로 바르셀로나를 택했다. 아내의 요청이었다. 그녀가 왜 바르셀로나를 가고 싶어하는지는 의문이었다. 사무관은 처음으로 국제면허증을 만들었고 렌터카를 예약했다. 붉은색 점퍼를 입은 렌터카 직원은 국제면허증을 확인하지 않았다. 사무관은 꺼낼 일이 없는 서류를 언제나 가방에 지니고 다녔다.
여행에서 돌아온 아내는 스패니시그레이하운드를 키우자고 제안했다. 바로셀로나에서 산책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데리고 다니는 종이었다. 사무관의 눈에는 너무 마르고 슬픈 형상의 개였지만 아내는 그 점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아내는 인터넷으로 검색한 기사를 보며 말했다. 봐봐, 그레이하운드는 가장 많이 버림받는 개래. 아내는 기사를 읽는다. 스페인에선 연간 5만마리 이상의 그레이하운드가 죽는다. 가장 애용되는 방법은 타자기 처형법이다. 교수형처럼 높은 곳에 목을 매달되 뒷발만 간신히 땅에 닿도록 한다. 목이 졸린 그레이하운드는 천천히 죽음을 맞는다. 이때 뒷발이 땅에 부딪치는 소리가 타자기 소리 같다고 해서 타자기 처형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결혼생활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그와 아내 사이에 남은 건 검은색 스패니시그레이하운드인 우디뿐이다. 아내는 당신이랑 무척 어울리는 개라고 말했고 사무관은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다. 아내가 왜 이혼을 원하는지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왜 결혼을 원했는지도 의문이었다. 사무관은 가끔 헤어진 아내의 셀프에 들어가 그녀가 여행하는 다른 나라들을 본다. 그는 신혼여행 이후 여행을 가지 않았고 떠날 생각도 없다. 그는 너를 관찰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어느날 오후 한 사내가 운전하는 차량이 평화롭게 출근하는 사람들을 덮치는 사건이 일어났다. 아홉명의 사상자를 낸 차는 1층에 있는 까페를 부수고 들어가 불길에 휩싸였다. 전기차였던 탓에 화재는 쉽사리 진압되지 않았다. 운전자인 사내는 새카맣게 그을린 채 발견됐다. 사내의 뜻 모를 테러에 대해 별별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타격이 심한 건 사내가 운전한 전기차 브랜드였다. 주식을 보유하고 있던 사람들은 막심한 손해를 봤다. 너의 연인도 그중 하나다.
너의 연인은 새 작업을 만회의 기회로 삼는다. 세계적인 아이돌의 뮤직비디오에 들어갈 포스트퓨처리스틱한 조각을 의뢰받은 연인은 두달간 두문불출하며 작업에 전념한다.
너는 그동안 런던마라톤 풀코스 완주를 위한 훈련에 돌입한다. 훈련일지를 매주 셀프에 업데이트하고 보스의 마라톤 회원들과 세부사항을 공유한다. 세계 6대 마라톤대회를 모두 뛰는 게 목표라는 집주인은 너와 페이스를 맞춘다. 그는 이미 토오꾜오와 시카고마라톤을 완주했다고 말한다. 그가 너의 곁에 다가와 속삭인다. 통계적으로 일반인들 팔백명 중 한명이 마라톤을 완주해요. 그런데 30대 상장기업 보스들은 백명 중에 열명이 마라톤을 완주하죠. 우리는 백명 중의 열명이에요.
너는 마라톤을 완주했다는 그의 배가 왜 출렁거리는지 궁금하다. 너의 질문에 그는 얼굴을 살짝 붉히지만 큰 타격 없이 말한다. 스태미나. 스태미나가 여기서 나온다는 연구결과가 있어요.
아이돌의 뮤직비디오가 릴리스되고 수소가스로 내부를 채운 연인의 인플레이터블 조각은 가치가 상승했지만 기쁨은 잠시였다. 그의 조각이 일본 애니메이션을 표절했다는 폭로가 X에서 터졌고 소문은 빠르게 확산됐다. 아이돌의 기획사는 입장문을 발표했고 아이돌은 활동을 잠정 중단했다. 너의 연인이 속한 갤러리는 계약을 파기했다. 손절은 효율적이고 간결하게 이뤄졌다.
너의 연인은 너에게 런던 일정을 취소하고 같이 있어달라고 부탁한다. 공황장애 때문에 약이 없으면 반나절도 버티지 못한다고 울먹인다. 그는 X에 표절을 폭로한 익명 계정이 자신에게 원한을 품은 예전 연인이라고 믿는다. 스토킹했던 거 기억하지 않냐고, 너의 연인은 말한다. 너는 지금 그게 중요하냐고 반문한다. 정말 표절을 한 거야?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좋겠어. 너는 연인을 다그친다.
너의 연인은 예술의 역사를 거의 다 훑는 변명 끝에—미껠란젤로도 삐까소도 다르지 않았어— 표절은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완전히 똑같은데!
너는 그 말을 남기고 런던으로 떠난다.
런던마라톤을 4시간 52분 19초로 완주한 날 너는 연인에게 결별 메시지를 받는다. 너의 연인은 SNS에 공개적으로 결별을 선언했다. 너와의 결별이자 세상과의 결별이었다. 그는 자살만이 자신의 원본성을 알릴 수 있는 수단이라고 쓴다. 너는 뒤늦게 그에게 연락을 취하지만 전화는 꺼져 있다.
너는 첫번째 마라톤 풀코스 완주 기록을 셀프에 올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쉬워한다. 그러고는 깜짝 놀란다. 연인이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이 따위 생각이나 하다니! 너는 이 경험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야기하면 좋을지 고민한다. 사건의 강도가 세니까 직접 이야기하는 것보다 자서전이나 소설 같은 장르로 푸는 게 유리할지도 모른다. 너는 다시 도리질 친다. 왜 이러는 걸까. 왜 타인의 고통을 이용하려는 것일까. 하지만 너 역시 고통스럽다. 너는 진심으로 죄책감과 상실감을 느낀다. 문제는 네가 느끼는 감정과 이 감정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려는 욕구를 분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너의 경험은 너의 내부에 존재하지 않는다. 너와 너의 외부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너의 연인은 죽지 않았다. 자살시도는 실패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불법 약물남용이 적발된 연인은 구속수감된다. 사람들은 그를 동정하지 않는다. 커리어를 스스로 망가뜨린 실패자이자 남의 작품을 도용한 사기꾼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너는 동정을 받는다. 너는 그에게 기만당한 피해자 중 하나이다.
사무관은 개인계발지수 20주년 캠페인 관련 홍보자료에 너에 대한 내용을 포함시킨다. 인적자원부 내부 심사결과 범죄자와 관련이 있으므로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돌아온다. 가족 또는 지인의 전과가 지수와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두고 격렬한 토론이 이뤄진다. 합당한 지침이 마련되기 전까지 우선적으로 전과자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주요 프로그램에서 배제하기로 잠정 결정된다.
사무관은 우디를 데리고 먼 산책을 나선다. 너의 어머니가 사는 영구 임대아파트는 경기도 북서쪽 외곽에 위치해 있다. 심리적으로는 멀지만 실제 위치는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다. 고속도로 옆의 버려진 지대에 아파트 여덟동이 우뚝 솟아 있다. 아파트 주변은 오후 여섯시만 되면 음산할 정도로 조용해진다. 마트와 까페, 세탁소, 프랜차이즈 베이커리와 편의점이 하나씩 있지만 해가 지면 모두 문을 닫을 준비를 한다.
유일하게 특이한 가게는 반미샌드위치와 쌀국수를 파는 베트남 음식점이다. 난민 지위를 허락받은 미얀마인들이 운영하는 이 식당에서 사무관은 반미샌드위치를 산다. 사무관은 왜 미얀마 사람들이 베트남 음식점을 하는지 궁금하다. 그들이 말하길, 한국 사람들은 베트남 사람과 미얀마 사람을 구분할 줄 모르고 구분할 생각도 없기 때문이지요.
사무관은 우디와 함께 아파트 주변을 잠시 걷고 벤치에 앉아 반미를 먹는다. 이곳은 개인계발지수와 절대적으로 무관한 곳이다. 구름이 걷히고 해가 비친다. 사무관은 빛이 있는 쪽으로 자리를 조금 옮긴다. 우디가 그를 따라 천천히 움직인다.
사무관은 셀프에 접속해 너의 소식을 확인한다. 너는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잠시 서울을 떠났다. 네가 간 곳은 문명과 격리된 야생의 장소라고 한다. 네가 언급한 생소한 지명을 사무관은 기억하지 못한다. 스크롤을 내리자 인적자원부의 광고가 뜬다. 개인계발지수 시행 이후 국가 위상이 상승했음을 증명하는 수치와 사람들의 밝은 표정이 이어진다. 유엔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SDSN)의 보고서는 한국의 발전 속도가 이례적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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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을 완주한 최초의 사람은 죽었다. 장시간 주행을 하면 케톤이 쌓이면서 몸이 경직되고 산증으로 두통이 유발되고 신체기능이 저하된다. 엔도르핀이 너의 신체와 정신에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한번 달리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고 멈추면 다시는 달릴 수 없다는 공포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완주에 성공하고 나면 어떤 고통을 겪었더라도 그때의 기억이 너를 맴돈다. 그것은 신체를 통해서 신체를 벗어나는 상승의 경험이다.
일상은 실망의 연속이다. 너는 회사에서 너의 퍼포먼스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에 낙담한다. 머릿속에 그린 너와 실재의 너는 일치하지 않는다. 일상에서의 너도 다르지 않다. 다양한 요인들이 너를 좌절시킨다. 너의 지수는 점차 하락한다. 그러나 여전히 상위 10퍼센트 안을 유지한다. 낙담과 기대의 반복 속에서 시간이 흐른다.
너의 어머니는 죽은 지 한달이 지난 뒤 발견됐다. 시신을 수습한 경찰이 너에게 연락한다. 장례를 원하지 않으면 시신포기각서 및 위임서를 작성해야 합니다. 경찰이 말한다. 기분 탓일까. 너는 경찰의 어조에 묘한 비웃음이 섞여 있다는 느낌이 든다.
너는 아버지에게 연락을 한다. 너의 아버지는 안타깝지만 일정이 바빠서 몸을 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얼마 전 네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다. 이 나이에 육아를 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구나,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그러나 여전히 활력이 넘친다. 그는 무연고자로 처리하는 것이 효율적이지 않겠냐고 말한다. 그게 너에게도 좋을 것이다. 너는 결혼을 앞두고 있지 않니?
예전 너의 집주인이 지금 너의 연인이다. 그는 결혼 준비로 여념이 없다. 너 역시 결혼식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지만, 어쩐지 모든 일이 남의 일처럼 느껴진다. 연인은 결혼식에 초대할 손님 리스트를 섬세하게 조율한다. 결혼식은 사회적 평판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성공적인 결혼식으로 소문이 나면 지수 상승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물론 그것 때문에 열심히 준비하는 건 아니야…… 너의 연인이 말한다.
너는 연인에게 어머니 시신 처리 문제를 의논한다. 연인은 라임병은 옮는 거 아니냐고 묻는다. 그렇다면 곤란한데…… 너는 그 부분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한다. 사실 너는 어머니의 사인도 모르며 그녀가 실제로 라임병에 걸렸었는지 여부도 알지 못한다.
너는 무빈소로 장례를 치르기로 결정한다. 입관에는 참여하지 않지만 화장장은 찾는다. 과거가 희미하게 떠오른다. 발코니에서 담배를 피우는 어머니, 차창 밖으로 재를 떠는 모습. 그러나 무엇도 선명하지 않다. 너는 눈물을 터뜨리지만 눈물의 의미를 알 수 없다.
사무관은 유일하게 너와 함께 화장을 지켜보는 사람이다. 의아해하는 너에게 사무관은 이웃 주민이라고 말한다. 당신의 어머니는 사람을 꺼리셨지만 한번 말문이 트이면 이야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오랜 시간 홀로 지냈지만 과거의 삶에 대해 아주아주 많은 이야기를 품고 계셨고, 그때의 이야기를 전할 수 없어 아쉬워했습니다. 사무관은 말했다. 너는 고개를 끄덕이지만 사무관을 조금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데리고 온 개도 흔히 볼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다. 우디는 길게 드리운 나무 그림자처럼 보인다. 더이상 앞을 볼 수 없는 개는 누워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사무관은 화장을 지켜보는 내내 지수 오류에 대해 너에게 말할지 고민한다. 진실을 아는 것이 도움이 될지,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도움이 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사무관은 너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안다. 그러나 무엇이 옳은지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