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소설

 

 

김금희 金錦姬

200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 『너무 한낮의 연애』 『오직 한 사람의 차지』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장편소설 『경애의 마음』 『복자에게』, 연작소설 『크리스마스 타일』 등이 있음.

 

 

 

장편연재 3

대온실 수리 보고서

 

 

그해 여름방학 나는 저녁을 먹고 낙원하숙을 나섰다.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교복을 입고, 크로스백에 일수 장부를 챙겨 넣었다. 교복 입기를 꺼려하자 할머니는 그래야 네가 학생인 줄 알 거라고 타일렀다. 내가 내켜하지 않는 그 점이 심부름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식이었다. 나는 할 수 없이 리본 타이까지 챙겨 맸다. 상인들에게 찍어줄 도장도 받았는데, 단단한 재질의 백옥색 도장은 손닿는 부분이 미세하게 닳아 아주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할머니는 인주를 묻혀 제대로 찍을 수 있는지 해보라고 시켰고 나는 책상에 놓인 다이어리에 도장을 찍었다. 일반적인 도장보다도 지름이 작고 앙증맞았는데 거기 새겨진 한자는 테두리를 뚫고 나갈 것처럼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기계가 아니라 손으로 새긴 멋진 글씨체였고 어떻게 보면 나뭇잎의 잎맥들처럼도 보였다.

창덕궁 앞에서 버스를 타고 동대문에서 내려 청계천을 건너면 평화시장이었다. 해변도 아닌데 색색의 파라솔들이 건물 끝까지 펼쳐져 있었다. 노점들이었다. 도로변에 면한 1층 매장에서는 잡화류를 팔았는데 벌써 가을을 겨냥한 색과 패턴의 스카프들이 쌓여 있었다. 시장으로 가까이 갈수록 사람과 짐들과 밀차들로 북적댔다. 어린애가 들어갈 만큼 큰 봉지를 든 사람들 사이로 나는 이리저리 떠밀렸다. 할머니가 약도를 그려주기는 했지만 점포를 찾는 것도 일이었다. 사각 나일론 가방을 이고 상인들이 건물 전체를 오가는 가운데 나는 두리번거리며 2층 여성복 매장으로 올라갔다. 약도를 참고해 몇군데를 돌았지만 일수를 받으러 왔다고 하면 일단 사람들은 모르는 척했다. 순순히 내준 매장은 한군데밖에 없었다. 문자 할머니가 미리 전화를 해놓았다고 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아니, 누가 개시도 안 한 집에 일수를 받으러 와? 언니도 늙었는지 영 경우가 없어졌어. 하루 장사 망하면 책임진대?”

마네킹의 플라스틱 엉덩이 옆에 서서 란제리 가게 사장이 손사래를 쳤다. 할머니보다 조금 젊어 보이는 여자였는데, 그후 내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고 매대를 정리하는 척했다. 대체 얼마나 많은 브래지어와 거들과 팬티가 쌓여 있는지 누를 때마다 그 손길을 속옷들이 탄력성있게 밀어냈다. 시장은 밤 여덟시에 열어 다음날 새벽에 폐점했다. 가게가 닫을 때나 적어도 영업을 좀 해서 현찰이 모였을 때 일수 방문을 받는 게 그간의 방식이었다.

“제가 학생이라 너무 늦거나 일찍은 심부름을 올 수가 없어서요.”

양해를 구했지만 사장들은 개시도 안 한 돈통을 열어야 하는 상황을 아주 싫어했고 그 반감을 내게 감추지 않았다.

“내가 지금 학생 상황 봐주게 생겼어? 내일 와, 내일 줄게.”

나는 한시간 넘게 쭈뼛거리며 시장을 돌다가 겨우 수첩 두개에 도장을 찍고 밖으로 나왔다. 박스를 짐칸 넘치게 실은 차들이 고가 쪽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고 동대문운동장의 조명 타워는 경기장 쪽은 꺼지고 주차장과 풍물시장으로 쓰는 쪽만 환했다. 나는 쓸쓸해져 순신에게 전화를 걸었다. 동대문이라고 하자 만날 추리닝 바람으로 다니는 애가 웬일로 쇼핑을 갔냐고 놀렸다.

“쇼핑은 아니고……”

“쇼핑 아니면 동대문에서 뭐 해? 사장님, 여기 이 라인에 대세요!”

순신은 아르바이트 중이었다.

“아무것도 안 해, 끊어.”

그리고 크게 숨을 몰아쉰 나는 다시 평화시장으로 들어갔다. 여성복 매장을 지나 화려하고 짧은 원피스들이 많아진다 싶더니 나중에는 인어공주의 비늘 같은 눈부신 반짝이가 장식된 드레스들이 나타났다. 딴 세상에 온 것처럼 눈이 휘둥그레져서 나도 모르게 그다음 방문지인 ‘퀸 패션’ 사장에게 이건 다 무슨 옷이에요? 하고 물었다. 다른 점포와 달리 그다지 바쁠 것도 맘 급할 것도 없다는 분위기로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사장은 “응, 여긴 홀복 전문이야” 하고 답했다. 문자 할머니가 보내서 왔다고 말하자 그 역시 내가 원하는 반응을 하지는 않았다.

“내가 지금 마수걸이가 언짢은데.”

이 밤의 문전박대는 대체 언제 끝날까 한숨이 나오는 순간, 사장이 의자를 내주며 앉으라고 했다. 조금 더 기다리면 물건이 팔릴 테니 그때 돈을 주겠다는 거였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거기 앉아 멍하니 기다렸다.

“정말 멋진 인생을 산 여자 같지 않아?”

사장은 작은 가위로 손톱 주변의 거스러미를 잘라내면서 물었다. 누구를 말하는지 모르겠어서 어리둥절하자 그는 “오드리 헵번 말이야. 학생 「문 리버」도 몰라?” 하고 다시 말했다. 클래식 기타를 든 가수가 텔레비전에서 팝송을 부르고 있었다. 나는 네에, 하고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마음이 급한 건 나뿐인 듯했다.

“우리 문자 언니도 멋지게 살았지. 결혼도 깔끔하게 딱 한번만 하고.”

그렇게 불쑥 주어진 정보를 통해서 나는 할머니의 과거를 알게 되었다. 아주 젊었을 때 결혼했지만 “좋은 놈이 아니라” 이혼했다는 걸. 할머니가 할머니가 아니라 문자이기만 했던 시절의 이야기는 일수 걷는 일을 잠깐 잊을 만큼 흥미로웠다. 한번에 자세한 사정을 이야기해주지 않고 선문답 같은 말부터 떡밥처럼 던지는 사장의 독특한 말투 탓에 대단한 미스터리를 푸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분명 귀하게 자랐어. 그러다 어느 순간 마음이 끝장나버리는 일을 겪었겠지, 과거 얘기를 잘 안 하는 걸 보면. 그래도 손끝이 매워서 이렇게 성공했잖아. 학생은 손녀라고 했나?”

나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그냥 비슷한 거라고 했다. 친손녀가 아니라고 하면 왠지 돈을 걷는 데 불리할 것 같았는데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사장은 비슷한 거? 하고 되묻더니 그냥 심상하게 넘어갔다. 그리고 선반으로 가 전기주전자를 켜더니 커피를 탔고 얼음을 넣어 내게 내밀었다. 나는 한번도 먹어본 적 없는 커피를 최대한 자연스럽게 마셨고 생각보다 달달하고 시원한 그 맛이 마음에 들었다.

“맛있어요.”

“맛있지?”

사장은 자기도 들고 한모금 마시며 설탕, 프림, 커피를 둘둘둘 비율로 넣으라고 알려주었다.

“언니가 창신동에서 시야게공장 돌리면서 여기 매장까지 하나 할 때 너무 예뻤지. 실크 원피스 입고 딱 나타나면 2층 분위기가 삭 달라졌어. 남자들이 줄을 섰지. 학생은 원피스 좋아해?”

“저는 원피스 안 입어요.”

“왜?” 사장은 오른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치마 원래 안 입어요.”

“그러면 안 되지, 치맛자락 휘날리면서 살아야지.”

뭐라고 말을 이어야 하나 고민할 때 다행히 손님이 왔고 사장은 한동안 이 옷 저 옷을 보여주며 추천을 했다. 이미 두 손 가득 한 짐을 든 손님은 허리 부분에 움켜쥔 듯 주름들이 잡힌 사롱형 스커트를 색깔별로 사 갔다.

물건값을 받자 사장은 그중 헌 지폐를 골라 일수 돈을 건네주었다. 그러면서 할머니한테 모찌 자주 사다드려라, 좋아하시니까, 하고 당부했다. 물론 일수 돈에 모찌값이 포함되어 있지는 않았다. 마지막집까지 어떻게든 돌고 1층으로 내려와 할머니가 시킨 대로 경비실 앞 씨디기에 입금했다. 녹초가 되었지만 그래도 이 밤의 심부름이 말짱 헛수고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에 대해 알게 되었으니까. 같이 밥 먹고 잠자는 사이가 가족이라면 지금은 문자 할머니도 내 가족이었다. 아마 영영 가까워질 것 같지는 않은 리사나 대학생에 대한 한점 환상도 허락하지 않는 유화 언니와 삼우씨도, 잠은 다른 데서 자지만 어쩌면 딩 아주머니도. 섬에서 서울로 올라오니 확실히 가족의 수가 불어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순간 마음이 편안해졌고 하수구 냄새를 품은 불쾌하고 텁텁한 밤공기나 우웅우웅 하는 정체불명의 도시 소음들이 더이상 싫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첫 밤을 마친 나는 되도록 천천히 낙원하숙으로 돌아갔다.

 

얼마 안 가 밤 열시쯤 시장을 가겠다고 했다. 그때쯤이면 마수걸이를 핑계로 돈을 안 내놓는 상인들이 적을 것 같아서였다. 할머니는 너무 늦은 시간이라 안 된다고 딱 잘랐다. 그 시간에 혼자 도시를 떠도는 아이들은 부모 없는 아이들뿐이라고.

“내가 같이 가줄까?” 삼우씨가 국을 떠먹다가 물었다. 같이 갈 사람이 있다고 거절하자 다시 고개를 숙이고 우거지를 건져 우적우적 씹었다.

“누구랑 같이 가려고?”

할머니가 물었을 때 답한 사람은 리사였다.

“왜 걔 있잖아요. 여기 뒷집에 사는 공고생, 자기 아빠랑 같이 우리 집 수도도 한번 고치러 왔었잖아요.”

“순신이?” 할머니는 이름을 알고 있었다. 시간을 내서 순신이 같이 가주겠다 했다고 내가 설명하자 할머니는 행주를 접어 서랍에 넣으며 곰곰이 생각한 뒤 허락했다. 어차피 열흘이면 깁스를 푸니까, 그때까지만 부탁한다고. 할머니에게는 버스를 타고 간다고 했지만 나는 그 길을 순신과 자전거를 타고 갔다. 나를 태우고도 순신은 별로 힘들어하지 않고 도로를 달렸다. 노란 보안등이 켜진 율곡터널과 긴 담장의 종묘와 탑골공원과 종로를 일주하는 내내 우리만의 거리가 이어졌다. 신호대기에 걸려 자전거를 멈춰 세웠을 때만 대화를 나누는 조용한 드라이브였지만, 그 틈을 어떤 말로 채워넣어야 한다는 조급함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가만히 침묵할 때 오히려 뭔가가 더 힘있고 따뜻하게 부풀어 올랐다.

나는 폐점시간이 되어 문이 다 닫힌 종로의 귀금속 가게 앞을 지나다 “나 너 사랑해!” 하고 말했다. 놀란 건 내가 아니라 순신이었다. 걔는 자전거를 세우고 뒤를 돌아보지 못한 채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야?” 하고 물었다. 마치 그런 괴상한 말은 처음 들어본다는 투였다.

“사랑한다고.”

“뭐라고?”

나는 얘가 귓구멍이 막혔나 싶어서 어깨에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대고 “사랑한다고, 안 들려?” 하고 외쳤다. 순신은 양쪽 다리로 자전거를 지탱하더니 핸들바를 놓고 뒤돌아 나를 꽉 안았다. 나는 좋은 부분을 오려내 남기지 못하고 어떤 시절을 통째로 버리고 싶어하는 마음들을 이해한다. 소중한 시절을 불행에게 다 내주고 그 시절을 연상시키는 그리움과 죽도록 싸워야 하는 사람들을. 매일 아침 눈을 딱 뜨면 그 텅 빈 무력감과 섀도우복싱해야 하는 이들을. 마치 생명이 있는 어떤 것의 목을 조르듯 내 마음이라는 것, 사랑이라는 것을 천천히 죽이며 진행되는 상실을, 걔를 사랑하고 이별하는 과정이 가르쳐주었다. 물론 동대문시장까지 밤의 자전거를 타고 오가던 계절에는 알지 못했던 일이었다.

시간을 늦춰 간 덕분인지 남자애가 따라와서인지 일수는 전보다 수월하게 걷혔다. 나 혼자 왔을 때는 요즘도 할머니가 일본식 가마솥 욕조에서 목욕을 하곤 하냐며 기분 나쁘게 묻던 올림픽유니폼 사장도 별말 없이 돈을 내주었다. 하숙집으로 돌아가던 어느 밤, 나는 가회동성당 앞에 잠깐 서자고 했다. 외할머니가 살아 계실 때는 마지못해 끌려갔다가 지금은 다니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지만 그날은 닫힌 성당 문이라도 보고 싶었다. 내가 성호를 그으며 기도하는 모습을 신기하게 보고 있던 순신이 “너 성당 다니는 애였어?” 하고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하자 거기서 뭘 배우냐고 다시 물었다.

“구원에 대해 배워.” 나는 성당에서 늘 들었던 단어를 답했다.

“구원이 뭔데?”

어려운 질문이었다. 누가 그것에 답을 할 수 있을까.

“그건 수난이 그치는 거야.”

그러자 당연한 수순처럼 순신이 수난이 뭐냐고 물었다. 나는 순신에게 손바닥을 펼쳐보라고 했다. 그리고 거기에 얼음조각이 놓여 있다 상상해보라고. 그러면 어떻겠어? 하고 물었다. 순신은 아주 시원할 것 같다고 해서 내 김을 빼놓았다. 나는 지금이 겨울이라 생각해보라고 다시 조건을 달았다. 이제 더이상 매미도 울지 않고 나뭇잎도 일렁이지 않는다고, 길이 얼어 자전거를 탈 수도 없고 옷 밖으로 몸을 내놓으면 아플 정도로 바람이 차고. 그런 겨울에 손바닥에 얼음이 있으면 손이 얼겠지, 아프고 따갑고 시렵겠지, 그런데 그 얼음을 내던져버릴 수는 없고 가만히 녹여야만 한다고 생각해봐. 그 시간이 너무 길고 험난하게 생각되겠지, 그런 게 수난이고 그럴 때 하는 게 기도야.

“그 얼음 나중에 녹아 없어지기는 하는 거지?” 순신이 제법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당연하지.”

나는 녹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답을 들을 사람이 순신이라서 힘주어 말했다.

“다행이다.”

이후 원서동을 떠나오고 나서도 그 대화만은 잊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 우리가 주고받은 당연하고 다행인 구원에 대해서만은.

 

*

 

지표투과 레이더 분석결과서를 여러번 요청했지만 은세창은 ‘준비 미흡 양해 요망’이라는 문어투 메시지만 회신하고는 응답이 없었다. 누구를 만나러 다니는지 사무실에 붙어 있지 않았고 소장과 독대하며 오랫동안 회의했다. 계약직으로 몇군데 회사를 돌면서 익힌 처세법 중 하나는 알려주기 전까지 너무 알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의욕으로 봐주다가도 상황이 안 맞으면 바로 불편한 오해로 넘어가버리기 일쑤였으니까. 지금 사무실은 각자 업무가 완전히 달랐기 때문에 우호적인 분위기였지만 만약 모호하게 걸쳐 있다면 원하지 않은 신경전을 벌여야 할 수가 있었다. 나는 더는 묻지도 재촉하지도 않았다.

그 문제가 아니라도 할 일은 쌓여 있었다. 시굴 조사 허가를 받아 대온실 바닥을 파보니 일제강점기 타일들이 발견된 것이었다. 동궐관리청 쪽에서도 반색했고 작업장 분위기가 금세 좋아졌다. 사실 실측에서 시굴 작업을 허락받는 건 흔하지 않은 일이라고 했다. 공사의 뼈대를 짜는 중요한 단계였지만 건물 속을 들여다볼 수는 없다는 게 수리 설계의 난점이었다. 경험과 데이터 그리고 아주 중요하게는 상상으로 계획을 세워야 했고 따지고 보면 그건 영화나 소설의 스토리보드를 쓰는 일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현재 타일이 설립 당시와 다르리라는 가설 아래 우선 네이브 한쪽을 파보자고 제안했고 다행히 뭔가가 나오긴 나온 것이었다.

“팠는데 안 나오면 어떻게 되는데요?”

대온실의 커다란 야자나무 아래에서 내가 물었을 때 제갈도희는 미안하게 됐습니다, 하는 거죠 뭘, 하고 농담했지만 다른 직원은 예산 허투루 썼다고 문책당할 수도 있어요, 하고 진지하게 답했다. 드릴로 파보니 지금의 황토색 타일 밑은 콘크리트로 타설되어 있고 그 아래 또다른 타일이 있었다. 아마 대온실이 만들어졌을 20세기 초에는 손으로 일일이 유약을 바른 고급 타일이었을 거라고 소목이 말했다. 복원한다면 그렇게 되살렸으면 좋겠다고. 나는 소목의 말을 메모해두었다. 직원들은 다 부수어진 타일 더미를 사무실로 옮긴 다음 분류를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모양과 색이 다른 것들을 모으는 작업이었다.

그러다 어느 오전 제갈도희가 사무실까지 뛰어올라와 검지손가락만 한 타일조각을 보여주었다. 나로서는 어떤 점에서 그렇게 의미있는지 언뜻 알기는 어려웠다. 제갈도희가 조각에 희미하게 걸쳐 있는 선을 가리키며 백년도 더 된 타일의 무늬를 찾았다고 흥분했다. 원래는 지금처럼 민무늬가 아니었던 거라고.

“그 시절 사진이 있으면 더 정확하겠네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곤줄박이는 “그러면 너무 좋죠” 하고 눈을 반짝였다. 동궐관리청 자료가 필요했지만 이번에는 공문을 쓰지 않고 아랑씨에게 직접 연락했다. 대온실이 완공된 이후 순종을 비롯한 왕족들은 그곳에서 산책을 하거나 외국 대신을 맞이하기도 했는데, 그런 사진이 참고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랑씨는 그날 밤 바로 이메일을 보내왔다. 식물원 안에서 촬영된 사진에는 백이십여년 전 대온실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 있었다. 유리창이 열려 있고 천장에 대나무발이 쳐져 있는 걸 보면 여름이었다. 그렇게 해서 하절기 온실 온도를 조절했기 때문이다. 일본식 제복과 구두를 신고 검을 바닥으로 향하게 잡고 있는 어린 소년은 후에 영친왕이 되는 이은이었다. 경비대로 보이는 군복 차림의 한 남자 외에 어른 여덟명은 연미복에 톱해트를 쓰고 있었다. 관리들이었다. 이은을 앞세우고 모두가 배경이 되어 서 있지만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보는 이들은 어른들이었고, 소년은 앵글의 초점에서 벗어나 커다란 바나나나무 잎을 응시하고 있었다. 제갈도희의 예상대로 그들은 네 타일이 맞춰져 가운데에 검은 마름모를 이루는 무늬타일을 밟고 서있었다. 이메일로 그 사진을 제갈도희에게 보내놓고 퇴근 준비를 하는데 소장이 들어왔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지 나를 보자마자 “아, 깜짝이야” 하고 놀랐다.

“죄송합니다.”

“죄송하기는. 영두씨가 그럴 건 없지. 너무 사과 많이 하지 마, 그러면 자꾸 미안해하는 역할만 맡게 된다.”

소장은 왜 혼자 야근까지 하느냐고 물었고 그 시대 타일 자료를 찾았다고 하자 잘됐다며 잠깐 얼굴을 폈다. 오늘도 공사업자가 대금만 받고 날라버렸나, 기분이 가라앉아 보였다.

“지난주인가? 내가 전달한 이메일 받았죠? 영국에서 온 것.”

“네, 받았습니다.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떤 점이?”

소장은 자기 방문을 열려다 말고 뒤돌아서 물었다. 나는 순간 당황했는데, 소장이 이렇게 관심을 보일 만한 말이었나 싶어서였다.

“큐가든에서도 철목재 혼합으로 온실을 지었다는 답메일인데 자기가 인상적이었다고 하니까 나도 인상적이라서 궁금하네. 소목이 영두씨는 우리랑 많이 다른 사람이라고 그랬거든. 시간이든 생각이든 한번 하고 버리는 게 아니라 남겨두었다가 거기에 다시 시간과 생각을 덧대 뭔가 큰 걸 만들어가는 사람 같다고.”

소장은 약간 취해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거의 매번 술기운을 띠고 있기는 했다.

“약간 마음에 남더라고요. 그건 그 시대 많은 건물들의 한계다, ‘푸어’한 설계능력과 푸어한 노동력, 푸어한 목재와 푸어한 기술의 시대가 남긴 문제라는 데 동의하면서도 뭐랄까, 그뿐이야? 하는 미진함이 남았어요.”

“영두씨 되게 섬세한 사람이구나, 유리처럼.”

나는 뭐 그렇지는 않다고 손을 내저었다. 그냥 반복되는 ‘푸어’라는 단어에 어떤 반감을 느꼈을 뿐이라고.

“그러면 영두씨,” 소장은 말을 꺼냈다가 아니다, 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고는 유리도 물리적으로나 온도로나 종류별로 다 다른데 이번 수리에서는 어떤 유리로 바꾸려나, 혼잣말하더니 방으로 들어갔다. 안전운전하라는, 이제 슬슬 자유로의 밤안개를 걱정해야 하는 계절이 왔다는 당부와 함께.

다음 날 점심시간이 되자 제갈도희가 능이삼계탕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그리고 샌드위치로 점심을 해결하겠다는 은세창을 우격다짐으로 내 차에 태워 출판단지 밖으로 벗어났다. 시골길 흥취가 가득한 둑길을 달려 삼계탕집에 도착하자 사장님이 오셨어? 하고 알은체를 했다. 미리 예약해놓은 능이삼계탕 솥이 가스버너 위로 올라왔고 보글보글 끓는 국물을 셋 다 말없이 지켜보았다. 이윽고 제갈도희가 답답해 죽겠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뭔데 그렇게 엄근진하게 말을 안 해요? 선배답지 않게. 한 팀이라면서, 우리 한 팀인데 왜 비밀을 만드냐고요?”

“도희씨, 내가 뭘 숨겼어? 그런 거 없다. 영두님, 제가 그래요?” 은세창이 뭔가를 고심하고 있다는 건 나도 느꼈기 때문에 별수 없이 “엄청 티가 납니다”라고 답했다.

“티가 나는 정도가 아니야. 출근해보면 선배 자리만 장마예요, 그쪽만 우르르쾅쾅이라니까요.”

은세창은 명이절임을 집어 먹으며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답답하네. 뭐야, 거기서 시체라도 나왔어요?”

나는 그 말이 재밌어서 웃었는데 은세창이 자포자기한 투로 맞아,라고 말했다. 조용한 테이블 위에 주인아주머니가 앞접시 세개를 탁탁탁 놓고 갔다.

“말하기 싫으면 싫다고 하면 되지, 왜 그런 쌔한 농담을 해요?”

제갈도희가 설마 하는 표정으로 겨우 침묵을 깼다. 은세창이 국자로 우리 앞에 삼계탕 고기를 한덩이씩 놔주면서 감당도 못할 거면서 왜 캐묻니, 하고 탓했다. 사람이 말을 안 하고 있으면 다 깊은 뜻이 있는 거지, 업무 부담을 팀원과 나누지 않고 홀로 수난을 감당하려는 자신의 깊은 뜻을 왜 모르느냐고.

“진짜 결과가 그렇다면 보고서에도 상세히 넣어야겠네요.”

은세창은 데이터상으로 꽤 많은 이상대가 잡혔다고 했다. 공동(空洞)은 물론이고 파이프라인으로 보이는 구조물, 더 조사해봐야 할 다양한 모양의 부정형 반응물. 기껏해야 무너진 지하실 정도겠지 생각했던 은세창은 판도라의 상자를 연 기분이라고 했다.

“전파를 쏘면 전하량에 따라 반응이 다르고 그 신호를 프로그램으로 처리하면 어떤 이질적인 것들이 매장되어 있는가 등등을 알아볼 수 있거든요. 보유하고 있는 수분량으로 유전상수라는 걸 구해 매질 종류를 분석하는 게 대표적인데 진공일 때를 유전상수 1이라고 하면 아스팔트는 6이고 종이는 3이고 유리는 5, 6, 같은 모래라도 젖은 모래랑 마른 모래랑 또 다르고요.”

“제가 제물포여서 그런데 그런 거 다 부도체 아니에요?”

시체라는 말에 놀라서 말을 않던 제갈도희가 불쑥 물었다.

“제물포?”

“‘제갈도희는 물리 포기’의 준말이에요. 제 학창 시절 별명.”

“그런데 어떻게 건축학과에 들어왔어?” 은세창이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다.

“그게 인생의 신비죠.”

은세창은 그런 물질이라도 전기장 안에서는 양전하, 음전하 같은 극성으로 분리된다고 설명했다. 심지어 얼음조차 그렇다고. 데이터를 분석해보니 지하 벽면과 계단 같은 건물지 잔족 흔적들이 발견됐고 보일러실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넓었다. 도기, 나무, 철제, 특히 유리 반응이 많아 아무래도 배양실로 보아야 더 합리적일 것 같은데, 반응 모양이 두개골 같은 뼈들로 추측되는 데이터가 나온 거였다. 제갈도희와 나는 삼계탕 고기를 뒤적이다가 젓가락을 천천히 내렸다.

“발주처에는 알렸어요?”

“소장님이 장과장을 만난 걸로 아는데 용건이 뭐였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런 건은 공문 안 내도 잘 만나주더라고요. 골치 아플 것 같았는지.”

“선택적 공문성애자였네, 보신주의 끝판왕이네.”

제갈도희가 화난다는 듯 한마디 했다.

“영두님, 지하 배양실은 뭐 어떤 곳이었어요?”

나는 그 시절 배양실은 아무나 출입할 수 없는 곳이었다고 말해주었다. 외국에서 들여온 값비싼 기구와 식물들이 있는 공간이니까 주로 일본인 관리들이 드나들었다. 그런 지하 배양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이유를 나는 후꾸바 하야또의 당시 행적과 관련해 추측해보고 있었다. 대온실이 완성된 이후 후꾸바가 통감부 관리들과 크게 싸워 온실 관리에서 손을 떼버렸기 때문이었다. 후꾸바의 불화력은 대한제국 대온실에서도 여전했고 사직 이유도 후꾸바식으로 일관됐다. 식물원은 식물을 보는 곳이며 그런 점에서 미술관에 비견될 수 있는데도 관리들이 겉으로 보이는 건물 모습에만 신경 쓰는 것을 통탄했다. 그들은 어차피 조선인들이야 무슨 식물이 있든 꽃만 피어 있으면 족하다며 후꾸바가 생각하는 식물원의 미적, 교육적 가치를 무시했다. 후꾸바는 조선인들을 배척하고 욕하며 망령되이 굴지 말고 계몽의지를 가지고 교육에 나서라며 비판하고는 내원국장직을 사임했다.

순종이 창덕궁과 창경궁에 박물관과 식물원 그리고 동물원을 만드는 데 동조한 것도 교육을 위해서였다. 순종은 어찌 되었든 왕궁 문을 직접 열어 근대 문물 수용에 앞장서는 행동을 취했다. 유서 깊은 궁에 백성들의 흙발이 들어서는 일은 참을 수 없다며 대신들이 들고 일어서자 고례를 따르더라도 명군은 백성과 함께 즐긴다며 무릇 ‘해락(偕樂)’이라는 글자를 잘 새기라고 물리쳤다.

물론 기록 그대로를 믿을 수는 없었다. 모든 일에는 정황이 중요하고 특히 식민지 초입이란 여러 이해와 계산이 얽혀 진실의 행방이 더 묘연해지니까. 후꾸바가 일본 한 자작의 저택에서 이또오 히로부미와 조선 황족 이준용, 궁내부 대신 민병상, 송병준으로부터 식물원 건립에 대해 들었을 때 그 목적은 병약한 순종을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그 대화에서 순종은 황제로서나 인간 자체로서나 쇠진해버린, 휴식과 안락이 필요한 나약한 존재로 다루어지고 후꾸바 역시 그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하지만 황제는 궁내부에 명을 내려 박물관 등으로 변한 동궐의 학생 관람을 적극적으로 유치했고 대신들에게는 아직도 꿈에서 깨지 못하는가,라고 호통쳤다.

해방 이후에도 오랫동안, 장과장이 말한 것처럼 케이블카 같은 유흥시설을 확충해가면서 유원지로서 사람들이 즐겼다는 점은 또다른 상징성을 생각하게 했다. 해방 이후 황실 재산을 관리했던 구황실재산사무총국은 창경원 경내 전역에 전등을 가설하고 심지어 무대를 만들어 공연과 문화영화 등을 올렸다. 밤벚꽃놀이, 야앵은 그렇게 흥행해 한국전쟁이 채 끝나지도 않은 1952년과 이듬해에도 행해졌고 참여객은 날이 갈수록 늘어 1974년에는 2백여만명이 봄소풍을 즐겼다.

아랑씨가 준 사진 중에는 1926년 순종 승하 당시 홍화문 앞 전경을 찍은 것도 있었다. 이 시기 창경원은 두달간 문을 닫았고 해방 후 재정비한 뒤 다시 개방되었다가 1950년 5월 12일 대통령 이승만의 지시로 또 한번 폐쇄된다. 그는 미국과 일본의 사례를 들며 어느 나라에나 신역이 있다고 했다. 패전국임에도 일본이 천황의 궁성을 개방하지 않듯 창경궁, 창덕궁의 문도 도로 닫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폐쇄는 훼손을 복원하려는 의지였다기보다는 자기 입지를 위한 것이었다. 구황실 재산을 어떻게 처리할지 논하던 때였고 스스로를 이왕가의 후손이라 여긴 그의 이름으로 동상이 서고 있었다. 그러나 궁을 다시 열라는 대중의 요구는 사그라들지 않았고 야앵은 재개됐다.

수은등을 달아 밤의 운치를 더하고 고목들을 뽑아낸 뒤 건장한 벚나무 6백그루를 옮겨 심어 더욱 화려한 상춘의 밤을 만들게 한 대중의 갈망을 상상하다보면 세찬 바람이 만들어내는, 너울거리는 물결에 비친 너무 많은 얼굴들과 맞닥뜨린 기분이었다. 복원과 수리를 통해 어떤 얼굴들을 그 물결에서 건져내게 될까 아직은 모호했다.

“제가 배양실 상상도랑 해서 페이퍼 보내드릴게요.”

“페이퍼까지요? 그렇게까지 해주시면 감사합니다.”

은세창이 삼계탕 냄비에 누룽지를 넣으며 이거라도 다 먹고 일어서자고 했다.

“근데 동물일 수도 있잖아요? 동물원이 있었으니까.”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내가 말했다.

“맞아요, 그러면 그게 뭐 큰일이에요? 동물원에 동물 뼈 있는 게.” 제갈도희가 맞장구쳤다.

“근데 동물들이 왜 굳이 지하실 계단까지 내려와서 죽었을까?” 은세창이 누룽지를 우물우물 삼키며 물었다.

“누가 복날이라 잡아먹었나보죠.”

그 말은 가뜩이나 없어진 입맛을 뚝 떨어뜨렸고, 오늘 점심 메뉴 완전 실수였다고 제갈도희가 시무룩하게 말을 맺었다.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간 나는 급한 빨래와 청소부터 했다. 치우는데 안방 문이 꽝 닫혀서 나도 모르게 “아, 뭐라도 받쳐놓지” 하고 허공에 소리쳤다. 아무도 없는데도. 아빠가 있을 때의 습관은 늘 불쑥 튀어나왔다. 동네 어귀에서 트럭 소리가 나면 아빠가 오나 했다가 맞아, 아빠는 죽었지,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성당에 다니면서도 그 표현은 하늘나라에 갔지,라든가 천국에 있지,라고 나오지 않았다. 죽었지,라고 마음속으로 말했고 그게 더 진실에 가까운 듯 느껴졌다. 나처럼 신심이 모자란 신자에게 아빠의 죽음은 그냥 손쓸 수 없는 종료로만 남아버렸기 때문이다. 다 돌아간 세탁기에서는 얼룩이 그대로 남은 흰 티셔츠들이 나왔다. 하는 수 없이 따로 골라냈다.

낙원하숙 시절 문자 할머니는 당신 방 청소와 빨래는 딩 아주머니에게 맡기지 않고 스스로 해결했다. 속옷뿐 아니라 거의 모든 옷을 삶아 입었기 때문에 아주머니에게 맡길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가는 “형님 나 무럽 다 나가요, 무럽” 하며 울상을 지었을 테니까. 나는 딩 아주머니의 찡그린 표정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할머니는 평소 흰옷을 즐겨 입었고 옛날 방식대로 잿물을 이용해 빨래를 삶았다. 마당 한구석에 버너와 들통이 나와 있는 풍경은 일상이었다. 비가 오면 재가 든 시루를 빗물 홈통 밑에 두어 잿물을 만들었다. 빗물은 약산성이라 자연스레 산화가 일어난다고 했다.

“할머니 학교 과학시간에 그런 걸 배웠어요?”

할머니는 공부를 많이 했다고, 그러니 그분 말을 잘 들어야 한다던 아빠의 당부가 생각났다.

“아니, 학교에서는 배우지 않았고…… 아버지가 가르쳐줬지.”

나는 리사에게 들은 얘기 때문에 그 아버지가 친아버지인지 양아버지인지 순간 궁금했지만 그렇게 물을 정도로 철이 없지는 않았다. 빨래를 삶는 날에는 집 전체에 비릿한 냄새가 풍겼다. 악취에 가까운 그 냄새로 흰 것은 가장 희게 되고 깨끗한 것은 가장 깨끗하게 된다는 사실이 잘 믿기지 않았다.

여기저기 던져놓은 책을 정리하고 창문을 열었더니 종이모빌이 바람에 흔들렸다. 추석을 앞두고 공기는 청명한 찬 기운을 품고 있었다. 나는 책상에 앉았다. 어린이놀이터 옆에도 배양실이라는 이름으로 노지 재배실이 있었고 그에 관한 기록은 드문드문 남아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된 부속사 지하 배양실에 관해 말해주는 건 적어도 지금은 키노시따 코쭈우의 기록뿐이었다.

키노시따는 글을 적는 1943년 현재 온실은 여전히 개화되고 과학화된 시설을 갖추고 있다고 썼다. 일본 유학 시절 신주꾸교엔과 농업시험장 등지에서 본 것에 뒤지지 않는다고. 구조는 이랬다. 목재계단을 내려가면 전실이 있고 개량된 식물들을 순화시키기 위한 지하 온실로 이어졌다. 온실에는 2척 폭의 통로가 있고 식물들이 길이 8척짜리 판상 양쪽에 놓였다. 온실 끝에는 나무문이 있었고 통과하면 기구를 세척, 건조하는 준비실과 배양실험실이었다. 그리고 또 이어지는 가장 안쪽이 영국제 보일러가 온수를 공급하는 보일러실이었다.

지하 온실은 대온실처럼 유리지붕을 한 작은 규모의 방이었고 온수배관이 설치돼 한겨울에도 18도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다. 그가 소년 시절부터 지켜본 대로 온실에는 상당한 종류의 식물이 관리되고 있었지만 글 쓸 당시는 태평양전쟁 중이라 수는 줄어 있었다. 키노시따 코쭈우는 축소된 시설 운영 예산을 우려했다. 동물원 동물들을 위한 옥수수콩이나 아주까리도 심고 있다고 적었다.

유학을 가기 전 그가 잡부로 일할 때까지만 해도 진귀하고 아름다운 난과 분재, 국화와 달리아 같은 다양한 식물이 쉴 틈 없이 자라고 바나나와 파파야, 멜론까지 열매를 맺었다. 청소를 위해 드나들기만 해도 문명 지식이 머리에 저절로 담길 정도였다고 표현했다. 스포이트, 비커, 삼각플라스크, 알코올램프, 샬레, 건습계, 메스 등이 있는 신세계였고 다양한 화학혼합물이 수돗물처럼 쏟아지는 밸브였다. (그는 수도도 궁에서 처음 보았다고 했다.) 실험실에는 과인산석회, 유산암모늄, 탄산칼슘처럼 그 당시 금비(金肥)라 불리던 비료와, 삽수를 소독하고 발근시키기 위한 과망간산칼륨액, 양의 지방에서 얻어 서로 다른 줄기와 뿌리를 접목시킬 때 썼던 라놀린, 개량된 식물을 활착시키기 위한 자당액 같은 신기한 질료들이 서랍장에 꽉 들어차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곳에서 소년 키노시따에게 특별한 일이 일어났다. 실험하고 남은 오수를 모으러 들어가자 카마야마 마사시(釜山昌)라는 원정이 소년을 부른 것이다. 나는 눈에 익다고 생각하며 이름 밑에 줄을 그었다. 카마야마는 대나무 대에 시옷자 모양으로 자른 면도칼을 끼워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키노시따, 이리 와봐.”

그는 소년을 부르더니 펜치를 들려주며 면도칼을 모양대로 잘라보라고 했다. 소년이 본 대로 정확히 만들어내자 “보기보다 머리가 도는 녀석이군” 했다. 그리고 뭐 하는 기구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물론 소년은 알았다. 관리들이 짐작도 못할 정도로 이미 소년은 많은 지식을 획득해놓고 있었다.

“눈따기용 메스입니다.”

“눈따기가 뭐지?”

“식물의 싹을 일부 제거해 다른 싹의 생장을 왕성하게 하고 꽃눈이 분화하게 하는 전지의 일종입니다.”

그러자 카마야마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너희 집은 뭐 하는 집이었나?”

“강화에서 논농사를 짓습니다.”

“집에선 호미질만 했겠군. 조선인들은 말이야, 제초기를 나눠줘도 쓰지를 않고 호미만 써서 풀을 뽑는다니까. 농예의 세밀함이 부족하다고.”

카마야마는 그렇게 말하더니 약간 창백하게 웃었다. 기계를 쓰지 않고 조선식대로 두레가 마을을 돌며 제초하는 건 사실 효과가 크기 때문이었다. 그런 두레 논매기를 해야 호미가 땅을 뒤집어 풀을 뽑는 동시에 흙에 공기도 넣어줄 수 있었다. 하지만 소년은 그 당시에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완전한 일본어를 구사하지는 못했겠지만 어조나 억양 같은 것으로 안전한 사람과 안전하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고 있지 않았을까.

“키노시따, 너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냐?”

회상은 계속됐다.

“나는 어려서 오니 아이라고 불렸다. 부모랑 전혀 안 닮은 애들을 내지에서는 그렇게 부르거든.”

하지만 호리호리하게 마르고 수염 없이 매끈한 턱을 지닌 그는 오니, 곧 도깨비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카마야마의 목소리는 높고 가늘었으며 공무에 열심이었기에 만성적인 비염을 앓고 있었다. 다른 원정들은 카마야마가 ‘키네마’에 빠져 있어서 그렇다고 농담했다. 간드러지는 변사 목소리를 복사해버렸다는 거였다. 눈에 항상 핏발이 서 있는 것도 희락관과 중앙관 같은 극장이 있는 혼마찌를 밤새 들락거려 그렇다고. 내지인 전용 영화관뿐 아니라 조선인 극장까지 드나들 정도로 내선 구분이 없는 분이라고 키노시따는 소개했다. 그리고 현재 카마야마는 동식물원부 부장 겸 이왕직 촉탁사무관으로 승진했으며 기발한 질문을 즐기던 쾌락성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키노시따가 정말 그를 믿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7년 뒤인 1931년 카마야마의 추천으로 일본에 건너가 식물학자 나까이 타께노신(中井猛之進)의 조수로 일하며 야간고등학교를 졸업한다. 연구실에서는 조선어 번역과 자료조사를 맡았다. 나까이의 후학들이 보내는 한반도 식물들을 모아 학계 보고를 위한 준비를 했다.

조선에서는 매일같이 표본들이 도착했다. 3천여종에 달하는 조선의 신종과 신속이 나까이 이름으로 등록되었고 고유종 수백종에는 나까이 본인 이름이 붙기도 했다. 그런 집념의 인종(忍從) 끝에 조선 식물들이 학명을 얻고 개척되었다며 키노시따는 나까이를 추켜올린다. 현재 토오꾜오대에 보관된 수만점의 식물표본 역시 나까이의 명명을 기다리고 있다고. 나는 잡지 편집자가 달아놓은 부기를 확인했다. 식물표본 수집에는 모리 타메조오, 도이 히로노부 같은 다른 일본인 식물학자와 조선인 식물학자들도 기여했다고 덧붙여져 있었다.

“이모, 안에 있어요?”

창문을 열어보니 산아가 자전거를 끌고 마당에 들어와 있었다. 집에서 자전거를 타고 와도 삼십분은 걸리는 거리였다. 열한시가 다 된 시각에, 말도 없이 왜 왔나 싶어 얼른 들어오라고 했는데 산아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우리 바다 보러 가요.”

석모도 사람이 바다가 보고 싶다는 건 뭔가 마음 답답한 일이 있다는 거였다. 어려서 다리가 생기기 전에도 부부싸움을 한 이웃 아줌마들이 휭하니 집을 나가 부두에 서 있는 광경을 종종 보곤 했다. 건널 수 없다는 사실이 위로가 되었던 걸까, 아니면 거기에 육지가 있기에 언제든 건널 수 있다는 확인이 위로가 되었던 걸까. 나는 하던 일을 접고 산아를 차에 태워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산아는 어디 여행을 가는 사람처럼 백팩까지 메고 있었다.

아이 때는 다리가 있으나 없으나 어디를 갈 수 없는 건 매한가지다. 어른이라는 벽이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곁에 균열이 나지 않은 어른들은 없었다. 그러니 불안하지 않은 아이들도 없었다. 지금 목격하는 저 삶의 풍랑이 내 것이 될까 긴장했고 그러면서도 결국 양육자들이 이기지 못해 사라질까봐 두려웠다. 마구 달려서 자기 마음에서 눈 돌리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순간이 아닐까. 나는 아마 산아도 그래서 자전거를 타고 달려오지 않았을까 짐작했다.

해수욕장에는 텐트 두동이 세워져 있고 방금 캠프파이어가 끝났는지 잔불의 재가 바람을 따라 자그맣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바닷물은 갯벌 끝에 쳐진 그물과 부표를 흔들며 우리 쪽으로 밀려왔다. 바다를 향해 있는 갈매기들의 부리가 어둠 속에서 노랗게 빛났다.

“산아 속상한 일 있어?”

“속상해요.”

이럴 때 왜냐고 물으면 오히려 입을 닫지 않을까. 내가 모래밭에 퍼질러 앉자 산아도 그 옆에 따라 앉았다.

“난 갈매기가 싫어.”

“그렇겠지.”

“이모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산아는 나한테도 화풀이를 하고 싶은지 퉁퉁 부은 목소리로 물었다.

“사람들은 자주 보는 건 다 싫어해. 마음이 닳아버리나봐.”

“건전지예요? 닳게?”

“많이 쓰면 닳지, 닳아서 아예 움직이지 않기도 하는걸.”

산아는 아무 말 없이 모래를 퍼내기 시작했다. 얕은 모래 둔덕을 세우더니 두 손으로 두드려 단단하게 만들었다. 토끼 키링을 빼서 상자처럼 틀이 잡힌 모래밭에 넣었고 근처에서 조개껍데기를 모아 다리도 놓았다. 그러다 무언가 모자랐는지 일어나 어슬렁거렸고 누군가 잃어버리고 간 주사위를 가져와 그 안으로 던졌다.

“도둑질이 멈추지를 않아.”

전학 온 애를 말하는구나 나는 생각했다. 정신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애들에게 도벽은 흔한 증상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다고 산아의 기분이 나아질 것 같지는 않았다.

“김스미 바보 멍충이 같애. 왜 갖고 싶지도 않은 물건을 훔치는 건지 모르겠어. 차라리 돈을 훔쳐, 이 멍청아.”

산아는 물웅덩이 쪽을 향해 가더니 플라스틱 생수병을 주워 바닷물을 담아 왔다. 지나치게 바빠서 지금 내뱉는 말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굴었다. 도와주고 싶지만 바닥을 구르는 주사위의 결과처럼 통 알 수 없는 마음을 가진 애를, 서울 어딘가의 벌집 아래에서 흘러들어온 가엾은 애를 탓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모래장난을 하고 싶을 뿐이라는 듯이.

“훔치고는 기억 안 난다고 거짓말까지 해.”

“거짓말이 아닐 거야.”

나는 바짓단을 털어주며 말했다. 산아는 아주 어렵게 세상에 나왔다. 팔개월 만에 미숙아로 태어난 것이다. 출산한 은혜를 보러 갔을 때 너무 작고 발갛던 산아가 생각났다. 그때 이미 남편과 시댁에게서 마음이 떠나 있던 은혜는 달이 안 찬 아기라고 안아보지도 않고, 휭하니 병원을 나가던 남편을 욕할 의욕도 잃은 상황이었다. 그런 산아에게 바다처럼 큰마음이 생겨나고 있었다. 고여 있는 물웅덩이가 아니라 더 많은 것들이 생생히 사는 마음이.

“정말 기억이 안 날 수 있어. 트라우마가 깊으면 그래.”

“거짓말이 아니라고요?”

“거짓말이 아닐 거야, 이모는 한번도 스미를 못 봤지만 네 이야기만으로도 알 수 있을 것 같아.”

산아는 주사위를 들어 만지작거렸다. 손가락으로 움켜쥐었다가 엄지로 밀며 겉면을 느껴보다가 공중으로 살짝 던졌다가.

“이모가 책에서 봤는데, 이런 방법이 있어. 스미가 학교에 오면 같이 가방에 뭐가 있는지 수첩에 적는 거야. 필통 안에 연필은 몇개나 있는지, 소지품은 뭐가 있는지.”

“유튜브에서 봤어요. 왓츠 인 마이 백 같은 거.”

나는 산아 기분이 좀 풀렸구나 싶어서 약간 웃었다.

“맞아. 그리고 그다음이 중요한데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다시 적는 거야, 아침에 적은 것만 스미 가방에 있는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렇지 않다면?”

산아는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때는 주인을 찾아 돌려주면 된다고 했다. 그러면 잠깐 물건을 가져 간 것이지 영영 갖기 위해 훔친 것은 아니게 되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스미가 아프다는 것을 누구나 알게 된다. 숨길 수 없이 아프다는 것을. 해볼 만한 방법이다 싶었는지 산아가 드디어 태블릿 피씨를 꺼내 메모했다. 내 긴장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바닷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고 우리는 앞머리가 사라진 서로의 이마가 웃기다며 놀렸다. 풀어진 산아를 보며 은혜에게 곧 돌아간다고 문자메시지로 연락했다. 은혜는 걱정도 안 된다며 아주 혼을 내주지 그랬느냐고 답했다. 차갑기가 쏜물 같네, 하며 내가 농담하자 그 딸에 그 엄마지, 하는 진심이 아닌 말이 돌아왔다.

“산아야, 이모가 업어줄까?”

“나 같은 청소년을 왜 업어요?”

그러면서도 산아는 등을 내미는 내게 업혔다. 주차장까지만 업고 갈 생각이었는데 그쪽으로 안 가고 자꾸 해변의 둥근 호를 따라 걷게 됐다.

“이모, 보고서는 잘 쓰고 있어요?”

“그냥 뭐 대충 쓰고 있어.”

엉덩이를 받치고 있는 손이 밤바람 속에서도 따뜻해졌다.

“이모 얘기 들으니까 나 다 고치고 나면 창경궁 가보고 싶어졌어.”

“산아야, 만약에 거기에 무슨 비밀이 있다고 하자. 대온실 밑에 뭔가가 묻혀 있는 거야. 예상 못했던 뭔가가. 그래도 가보고 싶을까, 우리 산아는?”

“뭔데요? 유전?”

“아니.”

“그럼 온천? 난리였잖아요. 온천 나와서 땅값 올라서 아저씨들 막 신나고.”

“뭔지는 아직 모르는데 시체면 어때?”

“그럼 안 가고 싶을 것 같아. 근데 왠지 포도 과학자는 그런 거 좋아할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해?”

“응, 뭔가 차가운 피를 가졌을 것 같아.”

“그랬을까?”

우리는 해변 끝까지 갔다가 달리기를 해서 주차장까지 돌아왔다. 우리의 그런 소란스러움이 귀찮은지 갈매기 무리가 바위 쪽으로 느릿느릿 옮겨갔다. 시선은 먼바다로 뻗어 있었다. 아주 또렷한 응시였다.

 

 

4. 타오르는 소용돌이

 

회고록만 봐도 후꾸바는 여행을 좋아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일생 유럽뿐 아니라 마닐라, 대만, 러시아의 쌍뜨뻬쩨르부르그까지 오갔는데도 여정의 감흥에 대해서는 많은 분량을 할애하지 않았다. 산아 말대로 그는 콜드블러드, 차가운 목적 지향적 인간인 걸까. 하지만 대체로 여행이라는 것이 그렇듯 그의 여정 또한 예상대로만 흐르지는 않았다. 감정의 한계를 시험하는 특별 구간이 있었다. 신대륙 미국을 방문했을 때였다.

유럽에서 2년을 보내고 자비로 유학을 1년 연장했던 후꾸바는 일본정부로부터 미합중국의 직물업을 시찰하라는 청천벽력 같은 지시를 듣는다. 그는 유럽에서 지식순례자로 더 머물 작정이었다. 프랑스 조경학자 마르띠네(Henri Martinet)를 만나 교류하고, 곧 열릴 빠리박람회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마르띠네는 훗날 후꾸바의 의뢰로 신주꾸교엔 대온실을 설계해 창경궁 대온실과도 관련성이 논의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정부는 완강했고 후꾸바는 하는 수 없이 뉴욕으로 향하는 배에 승선한다.

원하지도 않았던 미국 방문객이 되어 대서양을 건널 때 그는 자기 의지대로 할 수 없는 데서 오는 무기력을 느꼈다고 적었다. 그리고 이렇듯 단단히 낙담한 동양인을 악명 높은 뉴욕의 입국심사관들이 맞았다. 신대륙으로 몰려드는 입국자들을 외계 곰팡이라 부르는 일이 지식인들 사이에서조차 통용되던 시절이었다. 항구에는 중국, 일본, 인도, 터키, 세르비아, 러시아, 자메이카, 유럽 각지와 카리브해에서 몰려든 수많은 인종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그 안에서 신대륙에 해를 끼칠 해충 같은 미적격자들을 골라내는 것이 입국심사관의 임무였다. 때론 배에서 수두에 걸린 사람이 발견되어 모든 승객이 내리지 못하기도 했다. 대변에서 십이지장충이 발견된 입국대기자는 즉각 추방되었다.

백인들에게는 본인들이 신세계로 나아가는 것과, 누군가가 자신들의 신대륙에 발을 내딛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무엇보다 위생의 차원에서 그랬다. 자신들이 퍼뜨린 천연두, 결핵, 디프테리아 등으로 아메리카 원주민의 90퍼센트가 죽는 일을 경험한 그들에게 이민자 한명 한명의 몸속에 있을 세균은 아주 타당한 위협이었다. 인간 자체를 쓸어내고 박멸해야 하는 공인된 이유처럼 느끼게도 했다. 물론 후꾸바 일행은 이민자들이 아니었고 초청장을 가지고 있었으며 변발을 하거나 일본식 머리띠인 하찌마끼를 매고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입국심사관 눈에는 그저 동양인이었고 환대나 환영의 대상은 아니었다. 후꾸바는 거칠게 짐 수색을 당하는 것부터가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고 회고했다. 입국자 후꾸바에게도 방문 국가에 대한 존경이나 경탄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뉴욕에 도착한 순간부터 하나부터 열까지 불만족”이었다고 회고록에 적었다. 미국에서는 철저히 관광객으로서만 돌아다녔다고 얘기하면서도 정작 뭘 봤는지는 적지 않았고 뉴욕의 입항자라면 볼 수밖에 없는 자유의 여신상에 관한 일말의 감상조차 없었다. 영국의 하이드파크, 큐가든, 프랑스의 베르사유정원 등지를 돌며 거기 심긴 장미와 인도철쭉까지 소중히 기록했던 그이지만 센트럴파크의 나뭇잎 한장 기록하지 않았다. 마치 미국의 어떤 것이 옮겨올까 저어하는 결벽주의자처럼 대부분의 여정을 기록에서 건너뛰었다.

후꾸바는 얼른 미국 여정을 끝내고 싶었지만 대륙이 넓은 만큼 봐야 할 것들이 지겹게도 많았다. 이 과정에서 후꾸바는 지난 3년 동안 유럽에서 익혔던 예절과 문화가 미국에서는 전혀 먹혀들지 않는 것을 느꼈는데, 여기에 관해서는 같은 세기 일본이 파견한 이와꾸라(岩倉)사절단의 기록을 참고해볼 수 있을 것 같다.

훗날 조선총독부 통감이 되는 이또오 히로부미를 포함해 백여명으로 구성된 이와꾸라사절단은 개항 시절 불리하게 맺은 조약을 수정하려는 목적으로 미국을 찾았지만 초반에 거절당하고, 사찰단으로서 보고 들은 것을 투철하게 기록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그들은 뉴욕이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잡다하게 섞여 생활이 거칠며 미국인은 처음 만날 때 우호적이고 만나는 사람 모두를 이미 알고 지낸 듯 행동하지만 교제가 길어지면 서로를 지겨워한다는 평을 남겼다. 그리고 돈을 벌기로 작정하고 앞다투어 신대륙으로 와놓고는 정작 원주민들을 능멸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영혼 없이 미국을 돌던 여행자 후꾸바는 다행히 캘리포니아에 도착하면서 활기를 잠시 되찾는다. 캘리포니아는 도시 하나가 유럽의 웬만한 나라에 맞먹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포도를 생산하고 있는 신흥 포도 재배지였기 때문이다. 흥분한 이 포도 과학자는 그 경험이야말로 미국 대륙에서 얻은 귀국 선물이자 큰 감격이었다고 회고록에 적어놓았다. 그야말로 포도로 시작해 여러 사정을 거쳐 어떻든 포도로 마치게 된 여정이었다. 하지만 모든 여행이 그렇듯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었다.

후꾸바가 3년간의 주유를 마치기 위해 귀국선을 탔던 샌프란시스코항은 세계 각지의 물류를 빨아들이는 거대한 흡입구였다. 러시아에서는 바다표범 모피가 도착했고 여러 국적의 포경업자들이 신선한 고래고기를 이 항구에 비축했다. 태평양을 횡단하는 증기선의 종착지이기에 한편에서는 각지의 아시아인들이 실려와 입국절차를 밟았다. 이들은 해안가 부두 끝에 위치한 허름한 2층 목조창고에 수용됐고, 이름마저 ‘창고’(The shed)였다. “죽음의 덫”이라 불릴 만큼 “혼잡하고 비위생적인” 백 피트의 정사각형 건물에서 아시아인들은 최대 2년까지 수용된 채 자신이 대륙을 오염시키지 않을 무균인간임을 증명해내야 했다. 그런 항구에서 후꾸바는 마침내 갤릭호에 승선해 미국을 떠날 수 있었다.

그러나 선상은 항구의 연장이었다. 선상 노동자로 일하는 일본인을 괴롭히는 미국인들의 행위가 그냥 지나쳐지지가 않았다.

그 당시 증기선에는 언제나 동양인 노동자들이 있었다. 한 배에 적어도 백명 가까운 수였다. 선원, 잡역부, 요리사, 선실 보이, 청소원, 뱃사공, 소방관, 석탄운반원 모두가 동양인이었다. 그들이 증기기관에 석탄을 넣는 힘으로 붉은 불씨들이 타올랐고 4천 톤급 증기선은 태평양을 건너갔다.

귀국길에는 폭풍우가 일었고 후꾸바가 머무는 선실에도 밤낮으로 파도가 넘쳐 들어왔다. 며칠간 계속되는 높은 파고를 견뎌야 했는데 그 여파는 몸 안팎으로 일었다. 배가 흔들려도 동행자와 담소나 나누며 고요하게 보냈다고 적고 있지만 그렇듯 담담한 귀국길이었다면 배에서 일본인들이 당하고 있는 학대에 대한 기록을 남겨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중심이 흔들리는 배 안에서 이 근대주의자에게 무언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3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가 개혁을 펼치려는 포부이기도 했을 것이다. 혹은 배의 화물창고에 실려 일본으로 들어오는 수입품들—밀가루, 옥수수, 콩, 돼지고기, 소고기, 와인, 위스키, 은화, 수은, 가죽—에서 발생할지도 모를 미상의 오염에 대한 공포일 수도 있었다. 자기 자신만은 그 매개가 아니라고 어떻게 부정할 수 있을까. 어쨌든 그는 소원하던 대로 모든 것을 ‘체험’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예정보다 늦어진 1889년 10월 22일이었다.

 

동궐관리청으로 향하는 지하철에서 삼우씨의 이메일을 확인했다. “며칠 전 너와 함께 일하는 갈도희씨 전화를 받고 네 생각이 났어”라고 첫머리에 쓰여 있었다. 성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게 너무 삼우씨다워서 나는 당황한 가운데서도 피식 웃었다. 제갈도희는 낙원하숙이 왜 매매로 나왔는지 가격은 얼마인지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삼우씨와 통화가 이루어졌고 대화 중에 회사 동료인 내 이름이 나왔다고 했다. 삼우씨는 인터넷에서 나를 검색해 흰죽지수리 이야기를 기고한 지방 신문의 칼럼을 읽었다. 그리고 거기서 이메일 주소를 알게 되었다.

삼우씨는 미국에 사는 리사가 그 집의 매매를 자신에게 의뢰했다고 말했다. 내가 페이스북에서 마지막으로 확인했듯 리사는 미국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아예 거기서 자리를 잡은 모양이었다. 그것은 짐작했던 일이기에 아무런 감정도 일으키지 않았다. 내가 놀라서 동작을 멈춘 건 문자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내 얘기를 했다는 대목이었다. 삼우씨는 낙원하숙이 문을 닫을 때까지, 그러니까 할머니가 더는 하숙집을 운영하지 못하고 양로원에 들어갈 때까지 거기서 살았다고 했다.

“너도 예상했겠지만 나는 변호사는 못 됐고 그 비슷한 법무사가 되어서 지금은 천안에 있어. 낙원하숙 보러 서울도 정기적으로 가. 지금은 하숙집이 아니라 빈집일 뿐이지만.”

삼우씨는 연락처를 남겨놓았고 꼭 한번 만나고 싶다고 했다. 아무래도 문자 할머니가 너랑 연락이 닿게 해준 것 같다고 적었다. 상황을 옅은 흥분감으로 전달하는 버릇은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만날 수 있을까?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미 정리한 과거의 방에 누군가를 다시 들이기 싫었다.

하지만 만나고 싶은가?라고 물었을 때는 의외로 그렇다는 확실한 마음이 들었다. 만나고 싶었다. 낙원하숙 시절 얘기도 하고 기억 속 일들을 울지 않고 웃으며, 공유하고 있는 추억을 아무렇게나 펼쳐 남들처럼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러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면서는 이제 내가 그 일을 웃으며 이야기하네, 시간이 이렇게 지났네, 덤덤해하고 싶었다. 미풍이 부는 바다처럼 고요하게. 하지만 과연 그럴 수 있을지 몰라 망설이다 나는 휴대전화 창을 닫았다.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은 생각해보면 아주 작은 것에서 출발했다. 이를 테면 누구나 흔히 쓰는 폭 5밀리미터의 수정테이프 같은 것. 2학기 중간고사가 끝나고 학교 교사의 비위행위가 신문에 보도되었을 때만 해도 나는 별 관심이 없었다. 중간고사 문제지가 사설학원에 유출된 큰 사건인데도 그랬다. 제보자는 알 수 없었는데, 기자 아빠를 둔 애가 알렸다는 얘기도 있고 다른 선생님이 언론사에 양심선언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어찌 되었든 그런 일조차 그들만의 소동처럼 느껴졌다. 나는 사랑에 빠져 있었으니까.

순신과 나는 거의 매일 만나 시간을 보냈다. 곁에 설 때마다 순신에게서는 일종의 서울 냄새가 났다. 내가 그렇게 말하면 ‘동물스럽다’며 질색했지만 나는 우리도 결국 동물일 뿐이라고 더 짓궂게 응수했다.

순신은 원서동에서 가장 먼저 반팔 티셔츠를 입었고 가장 자주 삼선슬리퍼를 신었으며 가을이 다 갈 때까지 반바지 차림인 애였다. 그렇게 가볍게 동네를 누비는 몸에서는 이제 더이상 나를 쓸쓸하게 만들지 않는 한강의 아침 냄새가 났다. 지난 밤 도시의 잔유물을 모두 품고 가볍게 흘러가는 청량한 낙관의 향 같은 것. 성큼성큼 걷다가 내 말을 자세히 듣기 위해 고개를 숙이면 목덜미에서는 젖은 보도블록에서 나는 차분한 흙냄새가 맡아졌다. 그러면 나는 손을 거기에 대고 일정한 간격으로 뛰는 맥박을 느껴보곤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엄마처럼 죽지 않고 이렇게 특별한 자기 냄새를 내며 내 옆에 살아 있는 게 좋았다.

순신은 늘 겅중겅중 뛰면서 내게 왔고 일단 손부터 잡은 다음 왜 그런지 내 코를 한번 비틀며 오늘도 공부 열심히 했지? 하고 물었다. 한창 먹을 때인 우리는 주로 뷔페를 들락거렸는데, 서울에는 대식가들을 위한 다양한 뷔페들이 차고 넘쳤다. 소고기뷔페, 피자뷔페, 샐러드뷔페, 초밥뷔페, 떡볶이뷔페, 연어뷔페, 샤브샤브뷔페, 9900원 뷔페…… 하숙집에서 아침과 점심을 거르며 벼르다가 순신과 함께 그런 음식들 앞에 서면 먹기도 전에 포만감이 들곤 했다. 내게는 그 사람이 원서동에서 일군 가장 특별한 성취처럼 느껴졌다.

먹성 좋은 순신도 단무지만은 절대 먹지 않았다. 어려서 엄마가 식당 할 때 재사용하는 걸 많이 봐서 그렇다고 했다. 남은 반찬은 다 버리는 정직한 식당이라고 쓰여 있는 가게에서도 절대 먹지 않았다.

“대체 단무지 없이 어떻게 짜장면을 먹는 거야?”

내가 물으면 순신은 짜장면을 입안으로 욱여넣으며 “상관없어”라고 당당히 말했다.

“내가 만약에 네 앞에서 단무지를 먹으면 헤어지자는 신호인 줄 알어. 난 그만큼 그게 싫으니까.”

“괜찮네, 서로 예의도 지킬 수 있고.”

나는 일부러 단무지를 두개씩 집어 먹으면서 답했다.

“너는 어떻게 할 건데?”

헤어진다는 상상만으로도 두려움이 몰려왔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나약함을 감추는 건 내 마음과 몸에 습관처럼 배어 있었다. 순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최종의 마음까지는 내보이지 않았다. 그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방법을 몰랐던 데 가까울 것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그런 것이 너무 어려웠다. 슬프면 슬프다고 상처가 있으면 상처가 있다고 떠날까봐 두려우면 두렵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나는 고전적으로 머리를 자를게.”

“와, 정말 신선하다.” 순신이 장난스럽게 놀렸다.

헤어질 때마다 우리는 동네 느릅나무 밑에서 최대한 오래 포옹했다. 그러고 나서야 나는 낙원하숙으로, 순신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헤어졌어도 완전히 떨어져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바람이 크게 불어 동네 어딘가에서 쓰레기통 같은 것이 구르면, 어느 성질 나쁜 운전자가 이 적막한 고궁 앞에서 경적을 울려대면, 창덕궁 솔부엉이가 밤의 담장에서 가까이 울거나 누군가가 큰 소리로 전화통화하며 골목을 걸어가면 순신도 이 소리를 듣겠구나 싶었다. 그러면 우리는 떨어졌다가도 소리의 파장으로 다시 이어지는 셈이었다.

며칠 지나자 중간고사 문제지를 빼돌린 교사가 누구인지 알려졌다. 좀 충격적이기는 했는데, 아이들이 ‘푸토벤’이라 부르며 따랐던 수학교사였기 때문이었다. 반백의 곱슬머리를 한 얼굴이 푸들과 베토벤을 닮았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었다. 20년을 근속해 학교 터줏대감이었던 그는 농담을 잘했고 수업시간이면 오케스트라를 통솔하는 지휘자처럼 아이들을 휘젓고 다녔다. 어려운 공식이 나올 때마다 ‘오, 마이 갓’ 하고 다 함께 외치자고 했다. 우주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수학공식들은 인간이 발견한 것이 아니라 신의 선물이고 그러니 인간이 아무리 어려운 문제를 내도 결국 풀리게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궤변이지만 애들은 재미있어했다.

즐겨 입었던 체크무늬 폴로셔츠, 유선노트에 쓰듯 기울어짐 하나 없이 줄이 맞던 칠판의 숫자들, x와 y 같은 미지수들. 개중에는 판서가 멋져서 푸토벤을 좋아한다는 애들도 있었다. 나 역시 좋은 수학선생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학원을 다닐 수 없는 나에게는 교사 한명 한명이 너무 중요했으니까. 이미 선행학습을 해서 정작 수업시간에는 잠을 자두는 애들과는 전혀 다른 조건이었다.

“나 사실 엄마한테 들은 적 있어.”

안나가 점심을 먹으면서 소곤댔다.

“푸토벤이랑 학원이랑 연관있다고. 그래서 그렇게 들어가기가 힘들었던 거야. 학원비도 비싸고. 심지어 성적도 고쳐준다는 말이 있어.”

“컴퓨터로 채점하는 성적을 어떻게 고쳐. 말도 안 된다.”

나는 안나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면서 순신과 문자를 주고받았다. 그날이 내 생일이라 홍대에 있는 초밥뷔페를 갈 생각이었다. 안나에게도 생일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는데, 그렇게 생일을 챙겨주자면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돈을 써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외국산 화장품이나 티셔츠를 선물로 주고받았고 때마다 유행하는 브랜드도 자주 바뀌었다. 그걸 좇아가느니 나는 생일 같은 건 챙기지 않는다고 시크하게 말하는 편을 택했다.

“누굴까?”

안나가 눈을 반짝였다. 금세 미간에 주름이 잡히고 한쪽 뺨이 미세하게 실룩였다.

“뭐가?”

“답안지까지 고쳐줄 만큼 각별했던 애들. 대체 돈을 얼마나 받았기에 푸토벤이 그렇게 충성한 거냐고. 차 한대 값이라도 받았나?”

그날은 학교가 어수선해 그런지 종례가 생략되었고 나는 얼른 가방을 메고 교실을 뛰쳐나왔다. 운동장을 가로지르는데 웬일인지 종이 치자마자 빠져나와 같이 걷고 있는 빽과 리사가 보였다. 마음이 급해 앞지르는 순간 빽이 “쟤, 너랑 같이 사는 촌애 아니니?” 하고 들으라는 듯 한마디 했다. 나더러는 그렇게 주의를 주더니 말하고 다닌 거야 싶어 어이가 없었지만 당장은 따질 시간이 없었다. 홍대입구까지 가자면 한시간은 걸리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교문을 나오자마자 나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버렸는데 장미다발을 든 순신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색하게 손을 흔들며 웃고 있어서 이런 마중이 걔가 준비한 생일 이벤트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황스러운 건 내 마음이었다. 나에게는 심한 거부감, 당혹감 같은 것이 들었다. 그게 수업이 끝나자마자 오느라 순신이 입고 있는, 학교 이름이 또렷하게 박힌 교복 때문이었다는 것을 지금도 아프게 기억한다. 그래서 웃으며 반겨주지 못했다는 것을. 미소가 서서히 가시며 순신은 내 표정을 살폈다. 지금도 가끔 기억 속으로라도 손을 내밀어 안쓰럽게 어루만져주고 싶은 얼굴이었다.

“촌애라 공돌이랑 연애하네.”

빽이 큰 소리로 말하며 지났고 나는 손을 뻗어 걔의 가방 손잡이를 확 잡았다. 빽은 뒤가 들린 채 어어, 하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리사는 가만히 서서 사태를 지켜볼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씨발년아, 말 곱게 해라.”

그렇게 한마디 하고 돌아서자 당황한 순신이 이름을 부르며 나를 쫓아왔다.

초밥뷔페는 우리가 가본 어떤 뷔페보다 근사하고 비쌌지만 우리 둘 다 몇접시 먹지 못했다. 나는 하얀 레이스종이에 포장된 장미를 그때서야 전해 받았다. 꽃의 개수는 내 나이만큼이었는데, 절반쯤은 시든 채였다.

“미안해.”

“뭐가?”

나는 꽃송이를 손으로 계속 일으키며 물었다.

“네 표정이 어둡잖아.”

자기 옷에 먹물 한방울 튀는 것도 부모에게 일러바쳐 못살게 구는 애가 자빠지기까지 했으니 나를 어떻게 할까 걱정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순신에게 그런 말을 구구절절 하고 싶지는 않았다.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순신은 자기 마음을 전하기 위해 어느 때보다 고심했다. 긴장했는지 젓가락을 꽉 잡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냥 내가 나인 게 미안하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한점 남은 연어롤을 보다가 팔짱을 끼고 정작 마음과는 다른 말을 꺼냈다.

“대학은 안 가? 공부하면 되잖아.”

순신은 손을 풀어 무릎 위에 올려놓고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누구나 그럴 수 있는 건 아니야.”

“노력하지 않는 거지. 노력하면 왜 안 돼, 변명이지.”

“운 좋은 사람들은 꼭 그렇게 말하더라.”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비꼈다. 계산을 하고 식당을 나왔고 안국역 출구로 나오자마자 인사도 없이 헤어졌다. 우리가 만난 이래 가장 냉랭한 밤이었다.

그날 이후의 기억은 어떤 것은 상세하고 어떤 것은 듬성듬성 잘려 있다. 심리상담사는 방어기제가 작동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트라우마가 사라진 건 아니라서 말로 꺼내 질서화하지 않는 한 반복적으로 문제가 되리라고. 슬픔을 어떻게 질서화할까. 나이가 훨씬 들고 나서도 나는 그 부분에서는 자신이 없었다. 슬픔은 안개 같은 것이라서 서 있으면 스스로의 숨결조차 불확실해지는데.

며칠간 나는 빽이 앙갚음을 하리라는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문자 할머니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먼저 물을 정도로 태가 났다. 우리는 화단 앞에 쪼그리고 앉아 대화했다. 마당 구석에는 빨래가 끓고 개망초가 비스듬히 쓰러진 채로 노란 잎을 방긋 내고 있었다. 리사가 관련되어 있는 일이기에 솔직히 얘기할 수는 없었다. 할머니는 어쨌든 리사의 할머니이고 그러면 가족 편을 들 테니까. 나는 그냥 공부가 힘들고 강화가 그립다고만 말했다. 그러자 할머니는 편지를 써보라고 했다. 할머니도 토오꾜오가 그리울 때 그랬다고. 마음만 내키면 메신저나 문자메시지로 얼마든지 용건을 전할 수 있는데 편지라니.

“답장은 왔어요?”

“전쟁 전에는 왔고 전쟁 후에는 받지 못했지.”

그렇다면 은혜에게 편지를 써야 하나, 하지만 뭐라고 쓰나. 절교까지 하고 와서 서울 유학을 해보니 이따금 출몰하는 강화 바다의 해파리들처럼 독을 품은 애들이 천지야, 아니 그렇게 구체적으로 적시하기도 힘든 마냥 나쁜 것들이 너울대, 네가 괴로워야 내가 산다는 막무가내의 악의들이 말이야. 끓는 물이 넘치는 소리가 났고 할머니는 긴 집게를 들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빨래를 뒤집으러 갔다.

 

푸토벤이 빼돌린 중간고사 시험지를 미리 본 사람은 스무명 정도였고 거기에는 내 이름도 들어가 있었다. 과학실 청소를 다녀오다가 학년주임에게 불려가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나 따위가 이름만 들었을 뿐 근처도 가보지 못한 학원에서 어떻게 그런 정보를 얻었다는 말일까?

“리사가 보여줬다고 얘기하던데 뭘. 둘이 같이 산다며?”

“네, 아니요, 아니, 아닌데요.”

나는 너무 놀라 뭐가 아닌지 맞는지도 구분해 답할 수 없었다. 충격으로 혓바닥이 딱딱하게 굳는 느낌이었다.

“뭐가 아니야? 같이 안 살아?”

“아니, 같이 살아요. 근데 아니에요. 저는 안 봤어요.”

그러자 학년주임은 짜증스럽게 볼펜을 내던졌다.

“나도 니들 데리고 이런 거 하기 싫어 죽겠다. 우리 사학이랑 웬수가 졌는지 그놈의 신문사가 애들 시험지 하나 때문에 난리를 치고. 수습은 될 테니까 그냥 여기 사인하고 기다려.”

나는 사인하지 않겠다고 했다. 학년주임은 얼굴을 굳히고는 이 사태가 빨리 진정되어야 연합고사 준비도 할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놨다. 관련된 애들뿐 아니라 다른 애들까지 피해 보고 있다고, 자기가 너무 골치가 아프다고.

“근데 저는 진짜 본 게 없어요. 아무것도 본 적이 없어요.”

“리사가 전달해줬다는데 너 왜 씨알도 안 먹힐 거짓말을 해. 경찰에 넘겨야 정신 차리겠어?”

그래도 계속 도리질 치자 학년주임은 내일 다시 얘기하자고 했다. 나는 복도를 내달려 수업 중인 리사네 반 문을 열었고 빽과 나란히 앉아 있는 리사와 눈이 마주쳤다. 리사는 무표정했고 빽은 입을 약간 씰룩였다. 다시 문을 닫은 나는 교실로 돌아와 교과서를 펴는 것도 잊은 채 책상만 내려다보았다. 급식시간에도 밥을 먹지 않고 엎드려 있다가 낙원하숙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리사가 학교에서 오기를 기다렸다. 해가 지고 나서도 형광등은 켜지 않았다. 시간은 길고도 길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리사는 가방을 내려놓고 욕실에 가서 씻은 다음 들어와 책을 폈다. 그 태연함이 나를 질리게 했다.

“왜 그런 거야?” 나는 곧장 물었다.

“뭘?”

리사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뒷모습으로만 내게 말했다.

“왜 내가 시험지를 미리 봤다고 학교에 말한 거야?”

“봤잖아.”

리사의 뒷모습은 흔들림 없이 당당했다.

“내가 언제?”

“네가 수학과목 걱정을 너무 많이 해서 내가 보여줬잖아.”

리사와 나 둘 중 누가 정신이 나간 건지 순간 헷갈렸다. 방에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2층 삼우씨가 쿵쿵거리며 돌아다니는 소음이 들렸다.

“중간고사 시험지가 유출된 거 아니구 학원자료 백 문제 중에 중간고사랑 같은 문제가 있었던 거라 별일은 없을 거래. 유민이가 그래.”

유민이는 빽의 이름이었고 나는 그때서야 교문 앞에서 있었던 일과 지금을 이어서 생각할 수 있었다.

“빽이 시켰어? 나까지 물고 들어가라고?”

리사는 책꽂이에서 문제집을 꺼냈고 손톱 거스러미를 떼내며 들춰보기 시작했다. 그러고 있는 리사의 뒷모습을 나는 한시간은 바라본 것 같다. 그 밤 내내 바라본 것 같다. 응시가 끝난 시점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랜 세월 동안 그렇게 한 것 같다. 실제로는 몇분이었겠지만.

“너 사과 잘하니?”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리사는 그렇게 말했다.

“가서 사과해. 미안해, 한마디면 된다더라.”

 

나는 안국역에서 내려 정오 햇살을 맞으며 걸었다. 여름과 가을의 햇살은 몸으로 떨어지는 각도가 미세하게 달랐다. 여름은 정수리 위에서 머물렀고 가을은 눈가에 걸쳐졌다. 그러면 사물이 또렷해지고 풍경은 짙어졌다. 나는 창경궁 담장을 따라 걷다가 이메일에 적힌 번호로 삼우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종서의 「겨울비」가 통화연결음으로 들리더니 삼우씨가 전화를 받았다. “영두? 아니 영두씨?” 하며 되묻는 목소리에 반가움이 묻어났다. 삼우씨는 시간 될 때 되도록 빨리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나와 상의할 것이 있다고.

“저랑 상의를요? 그럴 게 뭐가 있어요?”

“낙원하숙 문젠데. 처분하려고 내놨지만 끝끝내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 뭐 별일은 아니야. 그냥 할머니 얘기도 하고. 부담은 갖지 마.”

“문자 할머니 잘 지내다 가셨죠?”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아파왔다. 떠난 나를 설득하기 위해 추운 겨울날 할머니가 직접 강화까지 찾아온 날이 생각났다. 그게 우리의 마지막이었다.

“응, 나중에는 잔류 일본인 양로원에 계셨다. 경주에 있는.”

잔류 일본인, 나는 할머니가 그렇게 불리는 것이 낯설었다. 삼우씨는 원서동에서 만나자며 열쇠를 가지고 가서 낙원하숙에 들어가보게 해주겠다고 했다. 리사 명의의 집인 게 마음에 걸려 거절하자 어차피 집 상태도 점검해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내놓기만 할 게 아니라 집수리도 좀 해야 하는데…… 오래된 집이라 무섭게 삭거든. 아무튼 보고 얘기하자.”

삼우씨 목소리에는 걱정과 함께 어떤 기대가 묻어 있었다.

 

아랑씨와 나는 동궐 내 까페에서 만나 점심을 함께 먹었다. 내가 부탁한 건 키노시따 코쭈우의 『경성 원예』 글에 나오는 인물들에 관한 일본 자료들이었다. 그렇게까지 파고들 일인가 싶었지만 서술에 빈 공간이 생겨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다행히 아랑씨는 그런 부탁을 잘 이해해주었다.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는 후배를 자료조사원으로 소개해주었고 보수도 자기 부서의 학예연구비에서 지출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내 일본어 실력으로는 사실 일본어로 된 옛 문서를 읽기가 쉽지 않았는데, 후배는 번역까지 해서 보내주었다. 나는 어딘가 모르게 용기가 났고 욕심 같은 것이 생겼다.

“좋네요.”

내 말을 들은 아랑씨는 떡 하나를 집으며 방긋 웃었다.

“우리가 사실 각자 자기 일 하는 것 같아도 옆 사람 힘 빌려서 하는 거거든요. 옆에서 에너지 안 내주면 영 기계적이 되고 그러잖아요.”

아랑씨는 지하 배양실에 대한 정보를 내게 물었다. 아랑씨가 보기에 장과장은 그냥 묻고 넘어가자인 것 같고 바위건축 쪽에서는 그럴 수 없다는 입장 같다고 했다. 나는 대온실 지하에 시체가 있으면 안 가고 싶을 것 같다는 산아 말이 생각났다. ‘있다’가 ‘있었다’로 바뀌어도 마찬가지라고 기관에서는 우려하는 모양이었다.

“관람객이 줄어드는 것도 문제이지만 이참에 밀어버리자는 말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예상하더라고요, 장과장님은. 그럴 때는 또 이 일에 진심이야.”

대온실 건물은 그동안 여러번 철거가 논의되어왔다. 식물원과 동물원이 과천으로 옮겨갈 때 겨우 살아남았고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근대 건물이 철거되거나 혹은 폭파될 때 늘 그 목록에 올랐다. 지금은 잔류하지만 앞으로는 또 어떻게 될지 사실상 모르는 상황이었다. 일본인 후꾸바 하야또가 설계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마르띠네의 영향을 받았으니 일본이 아니라 프랑스 건축물 아니냐는 주장도 있었다. 그렇게 하면 과연 뭔가가 달라지는 것처럼.

“그 지하에 사람이 있었을까요?”

나는 우려하던 것에 대해 물었다. 우리는 전쟁을 겪었으니까. 그 시기 곳곳에서 죽음이 비일비재했다는 사실을 많은 이들이 증언하고 있었다. 어떤 때는 총알이 아깝다며 우물에 사람을 몰아넣고 흙으로 메우기도 했다는 것을. 이웃, 친척, 친구, 선생님, 어르신, 우리 아가, 학생, 언니, 형님으로 서로를 부르던 사이들 간에 일어난 그 극복할 수 없는 잔인함. 우리가 우리에게 가한 그 두려운 폭력이야말로 내전이 남긴 슬픔의 본질이었다.

“당연히 사람이 있지 않았을까요.”

아랑씨는 내 질문에 가장 현명한 대답을 해주었다.

“어떤 경우이든 사람과 연관되지 않을 리는 없으니까요.”

가방 가득 자료를 넣고 집으로 돌아가다 춘당지의 벤치에 앉아보았다. 청둥오리들이 자맥질을 하며 가을의 윤슬을 타넘고 있었다. 장과장 말처럼 그냥 지나가도 좋을 것이다. 어차피 사람들이 원하는 건 사면이 유리로 된 온실의 아름다움이지 그 아래 무엇이 있었는가가 아닐 테니까. 땅 밑은 수리와 복원의 대상도 아니니까. 하지만 질서에는 어긋날 것이다. 그렇게 묻은 상태로는 전체를 알기란 어려울 것이다. 공동과 침하가 계속되겠지. 개인적 상처들이 그렇듯이. 언제든 무너질 듯 아슬아슬하다면 수리를 한 것이 아니지 않을까.

부정한 방법으로 점수를 올린 애들이 누군지는 며칠 사이 소문이 모두 퍼졌다. 아니라는 내 말에는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안나도 더이상 나와 급식을 먹지 않았다. 괴로운 날들이었다. 애들은 내가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보다 그런 무리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을 더 못 견뎌하는 것 같았다. 왜 그랬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를 더 수군거렸으니까. 순신에게도, 아빠에게도, 할머니에게도 그 얘기를 할 수가 없었다. 그냥 다 내가 못나서 일어난 일 같다는 위축감에 잠식되어갔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오후 교장실로 가보니 경찰이 와 있었다. 원래는 경찰서에 불러서 얘기해야 하지만 아직 미성년자라서 학교에 와 묻는 거라고 했다. 나는 내가 사인을 하지 않아 정말 경찰까지 왔구나 싶어 겁이 났다.

“강영두 학생 수학 답안지 맞지?”

소파에 앉으니 경찰은 긴장하지는 말고, 하며 서두를 꺼냈다. 그리고 내 앞에 OMR카드를 한장 내밀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경찰은 두장을 더 꺼내더니 패를 던지듯 테이블 위에 놓았다. 한장은 리사의 글씨체였다. 리사는 니은과 리을을 아주 흘려 썼기 때문에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경찰은 이 세장을 보면 뭔가 이상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한참을 내려다봐도 알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걸 맞혀야 내가 누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 7번, 8번 칸이 모두 수정테이프로 답이 고쳐져 있잖아. 세장 모두.”

누구나 그렇게 답안을 정정했다. 부정행위도 아니고 원칙에 따른 수정 방법이었다. 그런 생각이 든 순간 나는 리사가 고친 답안 중 두개는 리사 글씨체가 아니라는 걸 알아챘다.

“혹시 선생님이 섬에서 올라와 열심히 공부하는 제자가 안타까우셨나, 답안도 고쳐주고. 자기가 채점한 것보다 점수가 많이 나왔을 텐데 강영두 학생은 그냥 내가 잘해서 그런가보다 했나보네. 모르는 거 보니까.”

푸토벤이 평소 나를 알기나 했을까. 내가 아닌 다른 사람 입에서 전해지는 진실은 그냥 아주 먼 데서 들려오는 텔레비전 소리 같았다. 현실감이 없었다.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될까요?”

속이 메스꺼워진 나는 겨우 그렇게 물었다. 경찰이 고개를 끄덕였고 오늘은 이만 가봐도 좋다고 했다. 나는 화장실로 들어가 먹은 급식을 모두 게워냈다. 조퇴를 하고 낮의 한가한 전철을 타고 힘없이 낙원하숙으로 돌아갔다. 내가 걷는 것이 아니라 낚싯대 같은 것에 걸려서 그냥 어딘가로 끌려가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도착해서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고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잠을 잤다. 꿈에서 그 모든 어른들과 빽과 리사가 도깨비로 변해 자기들끼리 무언가를 잡아먹고 있었다. 뭔가를 손 바쁘게 집어 먹고 있어서 가까이 다가가보니 그건 본 적도 없는 밥통만 한 개 벤지였다.

소리를 지르며 침대에서 일어나자 딩 아주머니가 “우째 그래?” 하고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땀으로 범벅된 얼굴을 보더니 “니 독감 아이가? 할마니 나이도 많은데 옮기면 어쩔라고 몸 관리를 안 했나?” 하고 혼을 냈다. 딩 아주머니는 수건을 가져다 얼굴과 팔을 닦아주었고 약을 가져왔다.

“딩 아줌마, 나 아픈 거 감기 아니에요.”

나는 먹으라니까 먹으면서도 말했다.

“감기가 아니라 억울해서 그래요.”

“와? 리사가 또 어드렇게 했나? 그 기집애는 만날 괴기으르르해 사름 마음을 해친다.”

딩 아주머니는 억울한 일이 있으면 악착같이 대거리를 해야지 대낮부터 누워서 앓으면 어쩌느냐고 혼을 냈다. 그리고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나가서 체조를 하든 걷든 하라는 거였다. 아니면 궁에 가서 소리라도 지르고 오라고 했다. 딩 아주머니가 나가고 나는 침착하게 도와줄 사람을 찾자고 다짐했다. 유화 언니가 떠올랐다. 언니와 얘기하면 어떻게 답이 나올 것 같았다. 전화를 하자 언니는 소극장으로 오라고 했고, 나는 자전거 페달을 밟아 혜화동까지 갔다. 얼마나 발에 힘을 주었는지 나를 끌고 들어가려는 어떤 괴물을 짓밟는 기분이었다.

무대 리허설을 하던 유화 언니는 원숭이 분장 그대로 나와서 소극장 뒷마당에 쪼그리고 앉았다. 「빨간 피터의 고백」이라는 연극 제목이 현수막에 적혀 있었다.

“언니 주인공이에요?”

“아니, 피터가 밀림에서 잡혀올 때 잠깐 등장하는 배경이야. 그림자로 나와.”

언니는 얼굴에 붙인 털이 타지 않게 정말 원숭이처럼 입술을 쭉 내밀고 담배를 피웠다.

“그래도 얼굴 분장까지 다 했네요.”

“안 해준대서 내가 했어. 그림자라도 역할은 역할이니까.”

언니는 내 얘기를 조용히 들었다. 아주 못되게 걸렸네, 하더니 그런 애들이 있어, 하고 한숨을 쉬었다.

“자기가 너무 중요해서 뭐 하나라도 다 자기 마음대로 되어야 하는, 천년 굶은 아귀 같은 애들.”

그러더니 저번에 장구 배웠던 일을 상기시키며 어떤 도깨비가 쫓아와도 기운을 내야 한다고 위로했다.

“벌써 피죽도 못 먹은 애처럼 이렇게 다 죽어가면 아무것도 못한다.”

언니는 일단 삼우씨를 불렀다. 법에 관련한 일이니까 법대생이 그래도 좀 알리라는 논리였다. 삼우씨는 덜덜거리는 스즈끼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났다. 그러고는 소송을 하면 돈이 많이 들 거라고 덤덤하게 말했다.

“얼마나요?”

“천만원쯤은 들어야겠지.”

내 눈에 눈물이 어렸다. 그건 나에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삼우씨는 가방에서 지금 생각하면 왜 가져왔을까 싶을 민법, 형법 책을 꺼내 약간 들춰보다가 그런데 현실적으로 말하면 내가 굳이 뭘 할 필요는 없다는 맥 빠지는 결론을 내렸다.

“왜?”

유화 언니가 벌컥 화를 내며 물었다.

“그게 영두는 지금 촉법소년에 해당하거든.”

“권법소년도 아니고 그게 대체 뭔데?”

“만 10세 이상 14세 미만은 범법행위를 해도 형사책임 능력이 없다고 판단해 처벌 대상이 되지 않는 거지.”

언니는 그렇다고 누명을 쓰고도 참으라는 거냐며 삼우씨에게 따졌지만 슬프게도 그 말은 나를 꽤 진정시켰다. 죄를 뒤집어써도 처벌은 되지 않을 테니까 그냥 가만히 있으라는 말.

나는 고맙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삼우씨가 걱정이 되었는지 어디를 가느냐고 묻고 유화 언니가 연극 끝나고 같이 저녁을 먹자고 했지만 혼자 있고 싶어서 약속이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발길이 닿는 대로 걸으며 경우의 수를 생각했다. 아빠에게 사실대로 말한다, 아빠가 학교로 온다, 그리고 아빠는 싸운다, 누구랑? 나는 자꾸 발을 헛디뎠다. 거기에 보도블록이 없는데도 꼭 있는 것 같아서 발을 내밀면 아무것도 없는 공중이었다. 사람들은 대체 길을 어떻게 그렇게 잘 걷는 걸까. 다들 당당하게 걸어 어디를 가는 걸까. 엄마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나는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지만 엄마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훨씬 낫다는 사실만은 안다. 하지만 엄마는 없고 너는 리사와 빽이 파놓은 함정에 빠졌잖아. 너를 믿어줄 사람은 없고 도와줄 사람도 없잖아. 아마 내 마음이 병들기 시작했다면 그날의 그 산책으로부터였을 것이다. 그렇게 몇시간 걷는 동안 나는 불신과 고립과 경계와 냉소, 분노와 비루함 그리고 가장 나쁘게는 자포자기를 배웠다.

며칠 뒤 나는 리사에게 사과하겠다고 전했고 주일에 학교 근처 소공원에서 빽을 만났다. 빽은 한 손에 빵집 포장봉투를 든 채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왔어?”

빽은 의외로 편안한 얼굴로 날 맞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걔 옆에 앉았다.

“지금 몇시지?” 자기에게도 시계가 있으면서 빽은 물었다. 나는 네시 반이라고 대답했다.

“야, 너 운동화 예쁘다.”

빽이 뜬금없이 가리킨 손끝에는 아빠가 강화 시내에서 사준 내 운동화가 있었다. 국산브랜드의 그 운동화는 그런 칭찬을 받을 만큼 예쁠 것도 예쁘지 않을 것도 없는 것이었다.

“진짜야, 진짜 예뻐서 그래.”

나는 머리가 텅 울리는 것 같았지만 어금니를 물며 참았다.

“미안해, 그날 밀어서.”

“그래, 너가 나 밀었지? 아프더라. 뭘 해서 그렇게 힘이 센 거야?”

나는 참을 수 없어서 사과했으니까 됐지?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몇시지?”

빽이 다시 물었다. 네시 사십분이었다. 빽은 십분 만에 하는 사과는 사과가 아니라며 적어도 삼십분은 자기와 있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힘들게 여기까지 온 일이 수포로 돌아갈까봐 다시 앉았다. 그리고 얘기를 다 들었다. 빽이 하는 말은 심한 욕설이나 비속어도 아닌데 듣고 있기가 너무 어려웠다. 걔는 내 아주 근본적인 것들을 모욕했다. 출신이라든가 가정형편이라든가 차림새라든가 말투라든가.

“리사가 너 설명할 때 일종의 몽실 언니처럼 식모로 들어온 거라고 하던데, 내가 그런 얘기까지는 애들한테 안 할게.”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 하지 않자 빽은 “아, 너 그 책 못 읽었니?” 하며 내 뒤떨어진 교양을 지적했다. 마치 쥐가 된 것이 아닐까, 나는, 하고 생각했다. 고양이처럼 나를 가지고 놀고 있잖아.

“사과했으니까 나 그 일에서 빼줘.”

정확히 삼십분 후 일어서는 빽에게 부탁했다. 빽은 “무슨 일?” 하고 그 큰일을 벌써 까먹은 듯이 되물었다.

“뭐 신문에서 지랄한 거? 다 끝났어. 너 덕분에 끝나서 난 고마웠는데?”

어떤 시절은 그렇게 지나갔다. 상처받아 사람이 넘어져도 단풍은 지고 수업시간은 흘러가고 버스는 아침마다 제시간에 도착하고 누군가들을 실어 지하철역에 내려준다. 내 OMR카드는 정말 내 글씨와 내 수정테이프로 고쳐져 있었기에, 빽과 리사도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학원은 이름을 바꾸고 다른 상가건물로 이사했고 푸토벤은 같은 재단 고등학교로 옮겨갔다. 기말고사가 닥쳐오자 다시 교실에는 긴장이 돌았고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다들 자기 할 공부를 했다. 그런 평정을 다시 못 찾는 건 나뿐이었다. 나는 그럴 수 없었다. 혼자 길을 걷다가 문득 서서 “억울해!” 하고 소리 지르는 일도 있었다.

밤중에 일어나 자고 있는 리사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서 있는 날도 있었다. 잠이 긴장을 걷어간 덕분에 평소와 달리 여리고 여린 풀잎 같은 얼굴을 하며 자고 있는 리사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리사를 망치고 싶었다. 구길 수 있다면 구기고 싶었고 얼릴 수 있다면 그대로 얼려버리고 싶었다. 그런 내 마음을 눈치챈 날 나는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강화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리사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렇게 생성되는 악의에서 나 자신을 구하기 위해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내가 겨우 떠올릴 수 있는 살길이었다.

학교가 정리될 때까지 순신을 피해 다니다가 학기를 마칠 때쯤에야 깡통만두에서 약속을 잡았다. 가기 전에 나는 종로로 나가 머리를 잘랐다. 남자아이들 머리만큼 짧게 잘라달라고 했다. 미용사는 “너무 짧은 것도 학교에서 걸리지 않아?” 하고 확인했다.

“학교 안 다녀요.”

그러자 미용사는 투블럭에 가깝게 이발기로 머리를 밀어주었다. 한번도 짧은 머리를 해본 적이 없었던 나는 약속장소까지 다 가지도 못하고 모자를 샀다. 도저히 머리가 시려서 걸을 수가 없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종로의 풍경은 어느 때보다 따뜻했다. 작은 꼬마알전구들이 상점에 달렸고 캐럴이 흘러나왔다. 비로소 이렇게 근사해진 겨울 풍경을 즐기지 못하고 서울을 떠나게 된 것이 아쉬웠다. 인생에 브레이크를 걸어놓고도 어쩔 수 없는 아이였던 나는 그런 생각들에도 빠져들었다.

순신은 바람막이를 입고 만둣집에 먼저 와 있었다. 반가움에 손을 들었다가 시선이 내 머리에 가닿더니 차게 굳었다. 우리는 말없이 칼국수와 만두를 먹었다. 내가 연락을 피하는 동안 순신이 매일 낙원하숙 문 앞에 서 있다가 간다는 걸 나도 알고 있었다. 딩 아주머니가 전해주기도 했지만 그냥 느껴지기도 했다. 지금 나를 걱정하는 애가 문밖에서 창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이따금 눈덩이가 담장을 넘어와 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걔가 부르는 영두야, 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리사가 공부하고 있는 방에서 죽은 듯 누워 있는 나를 일으켜주지는 못했다. 나는 누구를 믿을 힘이 없었다. 살기 위해서 누군가를 믿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던 나는 이제 없었다.

“머리는 무슨 의미야?”

밥을 거의 다 먹어갈 즈음 순신이 숟가락질을 멈추지 않고 물었다. 최대한 무심한 체하고 싶은지 시선은 식당 안 작은 텔레비전에 두었다.

“아는 대로잖아.”

순신은 기가 막힌 것처럼 웃었다. 거기에는 내가 처음 보는 노여움이 깃들어 있었다.

“그럼 나도 이거 먹는다.”

순신이 단무지를 들더니 나와 눈을 마주치며 입에 넣고 씹었다. 사각사각 소리가 났다. 나는 순신이 단무지를 씹을 때면 이런 소리가 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사각사각 소리가 나는구나, 단무지를 씹을 때면 얘가 그런 소리를 내는구나, 싶어서 나는 그냥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이 순신을 더는 견딜 수 없는 분노로 몰아넣은 것 같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화를 내기 시작했다. 자기는 서울용 남친이고 강화 가면 강화용이 따로 있느냐고 자기도 믿지 않으면서 억지를 썼다. 만둣집을 나오고 나서도 그 상처는 멈출 리 없었고 나중에는 내 팔을 거칠게 붙잡았다.

“야, 너 성당 다니는 애가 어떻게 이럴 수 있니?”

도로 맞은편에는 그 여름 우리가 서 있었던 가회동성당이 눈에 덮여 있었다. 그 앞으로 수정테이프를 길게 그은 듯한 횡단보도의 흰 줄들이 나 있었다.

“성당 다닌다매, 구원이 있다매?”

순신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머리는 왜 자르고 나타났냐고 대체 왜 이러느냐고 자기가 뭘 잘못했느냐고. 그때 네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해주지 못한 것을 나는 오랫동안 후회했다.

 

방학식 전날 창밖을 보는데 운동장을 걸어오는 익숙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문자 할머니였다. 갑자기 왜 학교를 왔을까 싶었다가 리사 때문이겠지,라고 생각했다. 자퇴를 결정하고 수업에 점점 관심이 없어진 나는 책상에 엎드려 있거나 멍하니 창밖을 보는 날이 잦아졌다. 어떨 때는 아주 작은 상자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답답했고 그러다가도 갑자기 졸음이 쏟아져 병든 병아리처럼 내내 잤다. 쉬는 시간인지 수업시간인지도 모르고 자고 있는데, 반장이 나를 흔들어 깨우더니 상담실로 가보라고 했다. 학년주임이 찾는다고.

상담실에 가보니 리사와 할머니가 앉아 있고 학년주임이 예의 그 신경질적인 얼굴로 가운데 소파에 앉아 있었다. 학년주임은 나를 보더니 와서 앉으라고 했다.

“할머니가 손녀들한테 큰일이 일어난 걸 이제 아시고 걱정의 마음으로 걸음을 하셨는데, 다 해결됐다고, 이제 괜찮다고 너희가 분명하게 말씀드려라.”

나중에 알았지만 그 모든 얘기는 유화 언니가 할머니에게 전한 것이었다. 할머니는 베이지색 코트에 비로드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옷자락 끝이 눈 녹은 물에 젖어 있었다.

“해결은 억울한 애가 없어야 해결이지요. 영두는 그 시험지를 볼 애가 아니에요. 답안지에도 문제가 없다고 결론이 났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해결이 났잖아요. 그렇게 착한 애니까. 할머니 대체 왜 갑자기 이제 와서 억지를 써? 나 죽는 거 보고 싶어서 그래?”

리사가 화가 나서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할머니는 그런 리사의 말에는 아무 답도 하지 않고 학년주임을 향해 몸을 숙이며 부탁했다.

“다 우리 아이들입니다. 그러니 뭐가 어떻게 되더라도 진실은 밝혀줘야죠. 그게 어른이 할 일 아닙니까?”

학년주임은 또다시 문제가 시끄러워질까봐 잔뜩 경계하듯 손사래를 쳤다.

“다 잘 해결됐습니다. 애들 기록부에 뭐 하나 안 남았고 이제 조용해졌는데 어르신 왜 손녀를 곤란하게 만들려고 하세요? 혹시 신문사에 알리고 그러셨다가는 진짜 큰일 납니다. 손녀 앞길 막는 거예요.”

할머니는 내게 시선을 던졌다. 그 눈길을 받자 나는 내가 그토록 원하지 않던 용기가 나는 것을 느꼈다. 한번 싸워보고 싶은 용기, 그렇게 해서 억울함을 바로잡고 여기 남아서 내가 그토록 원했던 미래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와 욕심. 나는 미래가 욕심나는 것이 두려웠다. 이미 차가운 실망 속에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기 때문이었다.

“영두, 해결이 되었니?”

할머니는 물었다. 그때 내 답에 따라 상황이 달라졌을까. 내가 할머니를 믿고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다고 나는 아픈 사람이 되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면. 나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할머니를 보았고 리사를 보았고 낙엽을 다 떨어뜨리고 고요히 겨울을 받아들이고 있는 창밖의 나무를 바라보았다. 이미 내가 버리기로 한 것을 떠올렸고 떠나기로 결심한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돌아가기로 한 것을.

“할머니, 이제 그만해요.”

나는 손을 뻗어 할머니의 손끝을 건드렸다. 리사와 같은 말이었지만 같은 마음이 담기지는 않은 말이었다.

“다 해결되었어요.”

 

 

5. 당신은 배고픈 쿠마 센세이

 

아침 창경원으로 들어선 5척 6촌 장신의 나는 마리꼬 히메다. 빨간 등은 철제 철창이 듬성듬성 빠진 원숭이사에 있다.

“먹을 것 좀 있어?”

빨간 등이 묻는다.

“없어.”

“뭔가 있는 것 같은데?”

빨간 등은 속지 않고 코를 창살에 대고 애원한다. 주머니에 있는 것은 어린이들이 싫어하는 콩. 나 마리꼬 히메가 콩을 손바닥에 올리자 빨간 등이 가까이 온다. 다른 원숭이들도 우르르 몰려든다. 한마리가 아니다. 얼굴이 유마 아기 때 얼굴이랑 닮았다. 빨갛고 눈이 크고 못생겼다. 서로를 밀쳐가며 나도, 나도, 하고 모여드는 얼굴 모두가 아기 얼굴이다. 하나 둘 셋 넷…… 이제 스무마리 남았다. 나 마리꼬 히메는 아름다운 실크 크레이프 가운을 입고 금실로 장식한 머리끈을 하고 있다.

“어디 갔어?”

“누구?”

오물오물 콩을 씹으며 빨간 등이 답했다.

“꼬리감기 선수.”

“그 자식, 오줌을 제 손으로 어찌나 여기저기 바르던지.”

콩이 목에 걸렸는지 빨간 등이 켁켁 헛기침을 한다. 꼬리감기 선수는 꼬리 끝이 염색물에 담근 듯 짙었다. 한마리밖에 없어서 늘 눈을 동글동글 굴리며 눈치를 봤고 얌전했다.

“고무장화가 왔다 갔지?”

“맞아.”

빨간 등은 콩을 나눠준 일에는 그다지 고마워하지 않는다. 콩이 없으니 관심도 시들하다. 매미를 잡아먹으려는지 나무 위를 올려다본다.

“나도 죽을 뻔했어. 손을 할퀴고 공중 그물에 매달린 덕분에 살았지.”

나 마리꼬 히메는 놀라지만 빨간 등은 심드렁한 말투다. 무서워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는다.

“별일 아니야. 죽음이란 명예롭고 아름다운 거야.”

나 마리꼬 히메는 믿지 않는다. 그건 그냥 원숭이가 하는 말일 뿐이니까. 등을 돌리고 발걸음을 옮기는데 빨간 등이 부른다.

“마리꼬 히메, 다음번엔 과일을 갖다줘.”

“그런 건 없어.”

“없긴 왜 없어? 대온실에 가면 바나나가 있다고.”

빨간 등이 얼빠진 표정으로 침을 흘린다. 그 바나나는 마리꼬 히메조차 손댈 수 없다. 오니 아이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오니 아이는 식물원과 동물원의 대장이다. 진짜 대장은 조류 박사이지만 늘 표본실에 처박혀 있고 쩡쩡 울리도록 소리 지르는 건 오니 아이뿐. 오니 아이는 아이가 아니라 어른인데 마리꼬 히메의 외모에 빠져 있다. 언제든 자기 집에 와서 풍금을 치라고 열쇠를 주었지만 받았을 리 없다. 한심한 인간에게는 손 내밀지 않는 것이 마리꼬 히메의 지혜이니까.

마리꼬 히메는 양부와 살고 있다. 이것이 좀 슬픈 대목이다. 엄마는 일본에 있다. 치바현 이찌하라시, 유채꽃과 벚꽃나무가 많은 작은 마을에서 아픈 할머니를 보살핀다. 그래서 마리꼬 히메만 유마와 경성에 왔다. 유마는 마리꼬 히메의 진짜 동생이다. 엄마가 낳는 것을 보았으니까.

콩을 뺏기고 돌아선 마리꼬 히메는 텅 빈 담비 사육장으로 향한다. 창살이 다 뽑혔고 담비도 사라졌다. 지겨운 물자헌납 때문이다. 그렇다고 담비가 ‘반자이!’ 외치며 전쟁터로 간 건 아니고 독수리장에 던져졌다. 상한 생선 대가리나 먹으며 견디고 있던 대머리독수리에게.

이 모든 건 다 고무장화가 한 짓이다.

“고무장화는 나쁜 분이 아니야.”

양부는 고무장화가 명령에 따르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미국 비행기가 경성에 폭탄을 떨어뜨려 창경원 밖으로 동물들이 뛰쳐나오면 인간들을 다치게 할 수 있어.”

담비가? 토끼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따오기가? 쇠기러기가? 지빠귀가? 황새가? 왜가리가? 새장을 열어주면 모두 날개를 펴고 날아갈 텐데 왜 그러지 않고 육식동물 사육장으로 던져넣는 걸까? 나 마리꼬 히메는 명정전 옆 감자밭을 지나 쿠마 센세이를 만나러 간다. 식량증산이라는 푯말과 함께 감자가 자라고 있다.

“안녕하세요, 쿠마 센세이.”

나 마리꼬 히메는 빠르게 사육장 안을 살핀다. 고무장화가 왔다 갔나 살피는 것이다. 먹이가 바닥에 수북이 놓여 있으면 그날이 그날 되겠다. 어디서 났는지 옥수수며 고구마 따위를 놓고 “많이 먹어라, 저승밥 많이 먹어라” 하며 고무장화가 히잉 우는 날이 있다. 그러면 장화 속까지 물이 흘러 다 젖는다. 엉엉 울면 그 눈물이 춘당지 호수까지 흘러간다.

“쿠마 센세이, 오늘 날씨가 아주 좋지 않아요?”

나 마리꼬 히메는 벚나무의 울창한 초록빛을 가리킨다. 쿠마 센세이는 내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들고 지그시 눈을 감은 다음 킁킁 냄새를 맡는다. 관람객들 소리에 귀를 쫑긋거린다. 처음 만날 때는 달처럼 둥근 몸이었지만 지금은 갈비뼈가 코또(거문고)줄처럼 드러나 있다. 만지면 현을 따라 연주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배고파요? 콩을 가져왔는데 드실래요?”

쿠마 센세이는 창살 가까이 다가서는 나 마리꼬 히메를 가만히 바라본다.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고 바르게 앉아 있다. 발톱은 까맣고 털은 붉다. 코는 까맣고 눈은 반짝인다. 쿠마 센세이는 괜찮다며 사양한다. 그래도 예전에는 고무장화가 갖다주는 멀건 밀기울이나 콩깻묵이라도 먹었다. 나 마리꼬 히메가 엄마가 보고 싶어 울면 “늠름해져!”라고 격려했다. “마리꼬, 마리꼬 히메야. 눈이 내려 숲은 어둡고 언 물에는 차가운 별이 내려앉는데, 그만 울고 내 등에 타렴. 너를 엄마에게 데려다줄 테니” 노래도 불러주었다. 정말 창살이 없으면 나를 태우고 멀리 일본까지 가줄 것 같은 센세이였다.

하지만 바로 옆 동물사에서 라이온 상, 퓨마 상, 오오까미 상이 한날한시에 사라지자 사흘을 울었고 더이상 밥을 먹지 않았다. 밀기울 위에는 파리떼만 윙윙 춤을 추었다. 쿠마 센세이는 종이처럼 가벼워졌고 새벽처럼 고요해졌다. 이따금 입이 마른지 혓바닥으로 입술을 축일 때조차 거기에는 아주 적막한 죽음이 느껴졌다.

“배고프지 않아요? 센세이?”

“사무라이는 굶어도 먹은 체하고 이를 쑤신다잖니.”

“말도 안 돼요, 그리고 당신은 사무라이도 아니고 센세이잖아요.”

쿠마 센세이가 앙상한 팔을 들고 농담한다.

“그 둘에 차이가 있니?”

그때 인간들이 나타났고 마리꼬 히메는 얼른 휴게소 건물 쪽으로 숨었다. 지는 해를 등지고 관복을 입은 관리들이 서 있다.

“군에서 최후 알림을 했네. 아홉시에 보자고.”

고개를 내밀어 봤더니 조류 박사였다.

“아이고, 원장님.”

젖은 양말을 짜듯이 우는 건 고무장화 목소리였다.

“이 얘기는 가족한테도 하지 말라고 직원들 모두에게 일러두게.”

“150두를 한번에…… 이 죄를 어떻게 할까요.”

고무장화가 울상을 하며 어깨를 내려뜨렸다.

“그런 소리나 할 때가 아니야.”

험악하게 말하는 건 오니 아이였다.

“초산이 모자라면 식물원에 가서 잿물을 얻어 와.”

고무장화가 바들바들 떨면서 가는 꼴을 보자 쌤통이다 싶었다. 그런데 잿물이라니? 사람들이 가고 마리꼬 히메는 쿠마 센세이에게 얼른 도망가라고 했다. 센세이는 희미하게 웃으며 “드디어”라고 했을 뿐이었다. 마리꼬 히메는 고무장화보다 더 빨리 식물원으로 뛰어갔다. 창경원 안이라면 눈 감고도 어디에 뭐가 있는지 다 알았다. 대온실 뒤편만 가도 인부들이 모아놓은 호미나 가래 같은 농기구들이 수북하다.

“마리꼬 히메, 왜 그걸 가져가는 거야?”

귀찮은 양부가 물었다. 대답도 하지 않고 뛰어가자 감히 나 마리꼬 히메를 붙들어 앉혔다.

“어린애가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얼른 집에 가라, 유마가 기다리잖니.”

“유마는 죽지 않잖아!”

마리꼬 히메는 한 손에 호미를 들고 뛰었다. 여름 해도 다 졌으니 아홉시가 곧 다가올 것이었다. 쿠마 센세이를 끄집어내서 그 등을 타고 멀리멀리 가버릴 테다. 일단 우리 집에 가서 먹을 것을 주어야지. 쌀만두를 쪄서 같이 먹어야지. 마리꼬 히메가 호미로 자물쇠를 내리치자 동물사의 모든 동물들이 소리를 질러댔다.

“도망쳐!”

나 마리꼬 히메는 열심히 알렸다. 그 소리를 듣고 정작 갇힌 동물들은 도망치지 못하고 경비원에게 마리꼬 히메만 쫓겼다. 큰물새장 근처 수풀에 숨었다가 쿠마 센세이에게 갈 수 있는 때를 기다렸다. 모기떼가 감히 나 마리꼬 히메의 다리를 물어대는데도 기다렸다. 폐장한 창경원 안으로 총을 든 엽사들이 오가는데도 기다렸다.

이윽고 아홉시가 되었는지 고무장화를 비롯한 여러 그림자들이 돌아다니며 동물 우리 안으로 고구마를 던졌다. 얼마 지나자 그것을 먹은 들소가 캥거루가 하마가 멧돼지가 타조가 사지를 떨며 쓰러졌다. 고무장화는 왕의 마부였던 시절부터 길렀던 제주 말의 자손들을 죽이며 꺼이꺼이 울었다. 바로 죽지 않는 동물은 그림자들이 직접 들어가 해결했다.

“약이 모자란지 안 죽는데. 이봐, 창을 가져와. 내가 찔러볼 테니.”

쿠마 센세이 앞에서 오니 아이가 말했을 때 나 마리꼬 히메는 안 된다고 소리를 질러대다 누군가에게 얻어맞고 기절해버렸다.

 

아랑씨가 넘겨준 자료에는 흥미로운 것들이 많았다. 태평양전쟁 막바지인 1944년 조선에 살던 내지인 초등학생이 썼다는 작문도 그랬다. 「낙선재 마마님」 「배고픈 쿠마 센세이」라는 두편의 글은 그 당시 일본의 진보적 학생잡지 『주간소국민(週刊小国民)』에 발표된 것이었다. 시미즈 마리꼬(淸水眞理子)라는 이름의 학생 저자였다. 경성의 계동공립국민학교 4학년 6반 반장이라는 그는 내지 어린이들이 조선 생활을 진심으로 궁금해한다는 말을 어머니께 전해 듣고 글을 써보기로 결심했다고 첫머리에 설명했다. 세편을 쓰겠다고 포부를 밝혔지만 두편만 발표됐고 이후 잡지는 일본정부에 의해 강제폐간되었다.

「낙선재 마마님」은 전쟁 수탈기에 창경원 동물들이 굶는다는 얘기를 들은 ‘순종비 윤씨’가 자기 몫의 과일을 넘겨주었다는 내용이었다. 모두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마리꼬 히메, 즉 마리꼬 공주가 주인공이었다.

아랑씨는 만약 이런 글도 필요하다면 후배에게 번역을 맡겨주겠다고 했다. 어린아이의 글이었기에 번역하는 데 어렵지는 않았다. 아이는 관리의 자식으로 창경원을 자유로이 드나든 듯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읽어 내려가는데 나는 약간의 실망을 느꼈다. 실증담으로 이루어져 있으리라 기대했던 글은 동화였다. 「배고픈 쿠마 센세이」도 결말 부분에 가자 주인공이 여신의 도움을 받아 곰과 함께 바다용궁을 거쳐 일본으로 떠났다. 이를 의식했는지 문학교사가 해설을 달았는데, 수리 보고서에 쓴다면 그런 논평 정도일 것 같았다.

그는 어린아이답게 상상의 세계로 표현되어 있어도 상당 부분이 사실과 일치한다고 밝혀놓았다. 태평양전쟁으로 대량 처분된 동물들은 경성이나 토오꾜오나 마찬가지였다. 자기 손으로 애지중지 기르던 동물들을 죽여야 했던 사육사와 직원들의 비극은 짐작조차 어려운 것이었다. 150마리의 동물을 처리하는 데는 독살, 교살, 액살, 척살 등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었다. 결과적으로 해방이 될 때까지 경성에 미군 폭격이 없었던 점을 생각한다면 더 한스러운 참상이었다.

책상에서 빠져나와 마루에 누웠는데 발끝이 시렸다. 상상의 세계이고 마리꼬가 공주일 리 없더라도 창경원에서 일어난 그런 비극을 알게 된 것만은 현실일 것이다. 마음이 아파왔고 슬픔이 밤이슬처럼 내려앉았다. 그때 지하 배양실의 뼈들도 그런 과정에서 옮겨진 것들이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마리꼬의 글에 독약이 모자라면 식물원에 알아보라고 했다는 구체적인 정황이 있지 않은가. 죽은 동물들을 지하 배양실 근처에 묻었을 수도 있다. 시간이 지나 지하의 상황이 변하면서 뼈들이 그 위치로 옮겨졌겠지. 그러면 동궐관리청도 부담이 덜하지 않을까. 나는 덮어두었던 「배고픈 쿠마 센세이」를 꺼내 다시 차근차근 읽어보기 시작했다. 그때 알림 소리를 내며 문자메시지가 들어왔고 삼우씨가 다음주 약속을 상기시켰다.

(다음호에 계속)

 

* 이승만정권의 창경궁 폐쇄와 관련해서는 하시모토 세리 「한국 근대공원의 형성: 공공성의 관점에서 본 식민과 탈식민의 맥락」(성균관대 박사학위논문 2016)을 참고했으며, 주인공이 바닷가에서 산아에게 하는 충고는 구로카와 쇼코 『생일을 모르는 아이』(사계절 2022) 속 사례를 참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