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조명
포물선, 끝을 지나치는 사랑의 운동
장이지 張怡志
시인, 문학평론가. 시집 『안국동울음상점』 『레몬옐로』 『해저의 교실에서 소년은 흰 달을 본다』, 영화평론집 『극장전』 등이 있음.
poem-k@hanmail.net
‘포물선’의 이미지
시인 김소연이 등단 30주년을 맞았다. 여섯번째 시집 『촉진하는 밤』(문학과지성사 2023)이 기념비로 서 있는 느낌이다. 문득 첫 시집 『극에 달하다』(문학과지성사 1996)의 시대가 떠올랐다. 그녀는 그 시절의 자기를 ‘끝물’이라고 규정했다. “말하자면/기다림으로 독이 남는 자세./시효를 넘긴 고독. 일종의 모독./기다려온 우리는 치사량의 관성이 있을 뿐./부패 직전의 끝물이다.”(「끝물 과일 사러」)
1980년대에 습작을 했어요. 그때는 모든 학생이 제일 사랑하면서 읽었던 것이 창작과비평, 실천문학에서 나온 ‘민중시’였어요. 그런 시에서 시대의식이나 현실감각을 배우면서 시를 썼죠. 한편 제가 등단할 무렵부터 각종 문예지에 ‘시의 종말’ 특집이 꾸려지고 잊을 만하면 재론되곤 해서, 시가 정말 사라질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을 느꼈어요. ‘막차’를 탄 느낌이었고, 그때는 단지 내가 여기에 살아 있다고 외치고만 싶었어요.
1990년대의 김소연은 그 이후의 그녀보다 강렬한 페이소스의 언어를 구사했다. ‘시의 종말’이라는 유행어는 그녀에게 “눈앞에 보이는 이 불안”(「시인」)으로, 즉 가시적이고 실존적인 그 무엇으로 다가왔다. 현실사회주의 몰락 이후 거대서사가 붕괴한 지점의 공허를 시인은 “명쾌히 찍혀나온 임금”(「누구나 그렇다는」)으로써, 그래서 문득 청춘이 싫어졌다고 하는 실존적 감각으로써 확인하고 있었다. “세상에 대해 나는 당신들의 바깥에 있다”(「1995년, 개인적인 봄」)는 대결의식, 중심에 대한 적대감이 시 쓰기의 동력이 되었는데, 한사코 그녀는 그 소외의 “가장자리”(「바로 그때입니다」), ‘우리’ 바깥의 ‘개인’의 위치를 강조함으로써 1980년대 리얼리즘 시의 현실비판 의식을 공유하면서도 또 차별화한 자기만의 영역을 만들게 된다. ‘우리’라는 말의 허상을 절감하고 철저하게 개인으로서 절망해본 자가, 개인 대 개인으로 또 한명의 철저히 절망한 개인과 만날 수 있고 악수하거나 포옹할 수 있다는 것을 그녀는 그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시절의 그녀는 강단이 있어 보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남성들의 ‘거대한 이야기’에 맞서는, 정제를 거부하는 날것의 언어를 밀고 나갔다고 할 수 있다. 전통이나 역사, 자본주의의 비루한 욕망에 침윤된 시대를 향해 날 선 말을 퍼부었다. 우리 사회의 미시적인 폭력을 고발한 ‘학살의 일부’ 연작과 자본주의의 부패한 욕망을 반어적으로 노래한 ‘달디단 꿈’ 연작은 한 시대의 자화상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 보여주었다. 그녀가 오빠의 때 이른 죽음을 슬퍼하다 못해 분노할 때, “사랑이라든가 진실이라는 단어가 (…) 찬란한 헛것”(「연보」)이라는 환멸이 더 짙어지던 것이 떠오른다.
2023년 10월 20일 오후, 창비서교빌딩에서 오랜만에 시인을 만나 새 시집 『촉진하는 밤』과 여기에 이르기까지의 시적 여정을 청해 들었다.
이번 시집에서 특히 신경 쓴 것은 가까이에만 말고 제가 모르는 장소에, 모르는 사람에게까지 가닿는 ‘포물선’의 이미지였어요. 제가 수신자일 때도 있는데 어디에서 오는지 모르겠지만 자꾸 저한테 도착하는 게 있어요. 그게 저하고 무관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저를 이렇게 흔드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가령 우정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그건 가까이 있는 사람한테 자기의 마음을 행사하는 것이잖아요. ‘포물선’은 가로막는 것이 많아도 좀 느리지만 멀리 날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사후적으로 짚어보면 코로나19 팬데믹 시대에 쓴 시가 많아서인 것 같아요. 고립되어 있었고 사람이 그리워도 쉽게 만날 수 없는 시기라서 주변이랄 것도 없었고, 그래서 더 먼 곳을 생각하게 된 게 아닌지…… 세월호참사나 더 가까이로는 이태원참사, 이런 사회적 재난들도 저한테 수신되어오는데 그럴 때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오리무중에 던져진 느낌이 들었어요. 시민 한 사람으로서 무엇을 해야 하나, 또 한명의 시인으로서 가지는 애통함도, 내 몫의 개인적인 애통함이 아니지만 이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나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촉진하는 밤』1의 중심 이미지는 ‘포물선’이다. 공책을 펼치자 야구공이 빈 페이지를 가로질러 날아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야구공을 주우러 다니고/빨래를 개고 끝나지 않을 문장을 쓰고 끝없이/끝을 지나쳐 가느라/나는 바쁘다”(「더 잘 지운 날」). 사실 이 이미지는 한 아이가 멀리 찬 축구공을 또 누군가 힘껏 차고, “바로 거기에서부터 시작된 거대한 곡선 하나가 저 멀리 지붕들 위로 휘어져가는 것을 나는 고개를 돌려가며 영원히 지켜보고” 있다는 다른 시 「동그란 흙」(『i에게』, 아침달 2018)에서 뻗어온 것이다. ‘포물선’은 ‘나’에서 비롯해 ‘나’에서 끝나지 않고 누군가가 계속 이어가는 것이며, 또 ‘끝’을 지나치는 것이라는 의미망을 형성한다.
‘포물선’을 마음속으로 떠올려본다. 풀숲에 숨은 공을 떠올려본다. 끝을 지나친다는 것과 이어간다는 것을 생각해본다. 공이 휘어져 날아가는 것을 영원히 보고 있고 싶지만, ‘영원’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사라짐, 사랑으로 열려 있는 운동
김소연은 시에서 스스로를 ‘너’로 부르곤 한다. “네가 너를 괴롭혔을 때 너는 시를 잘 썼어”라고 말을 건다. “너는 네가 사라졌나 해서/고개를 숙여 발목을 내려다본다”라는 것을 보면, 이 대상화에는 ‘사라짐’이라는 의미 요소도 개입해 있음을 알 수 있다. ‘너’라는 호명에 의해 ‘내’가 사라지듯이 ‘너’ 역시 사라질 수 있는 존재이다. ‘나/너’는 스위치를 켰다 끄는 것처럼 교대하는데, 이는 시인이 시로 육화해 들어가면서 ‘나’와는 다른 존재가 됨을 암시한다. 대개 이 존재를 페르소나로서 ‘나’라고 하지만, 김소연은 ‘나’와는 엄연히 다른 존재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이 시의 제목 ‘영원’에는 시적 문맥과는 별개로 ‘나/너’의 교대가 현실의 시간성을 넘어선 것으로서 지극히 시적인 체험이고 또 무한히 반복할 수밖에 없는 체험임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느껴진다.
김소연의 시에서 가장 개성적인 부분은 ‘나’의 소거, 혹은 그 충동이다. 시인은 의식적으로 ‘나’를 소거하려고 하는데, 그 맹아는 두번째 시집에 실린 산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시 역시 그림자와 같지 않을까. 빛의 방향과 사물의 모서리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세계에 현현해 있는 모든 현란한 것들의 표정을 지우고, 그 자세만을 담으려 한다는 점에서. 시 쓰는 일은 그림자와 마주하는 일이다. 빛은 어깨 뒤에 있고 그림자는 내 앞에 있을 때에 시 쓰는 일이 가능해진다.(「그림자 論」,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민음사 2006, 111면)
여기서 그림자는 “현란한 것들의 표정”을 지우고 난 본질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시 쓰는 일이 그림자와 마주하는 일이라면, 이 ‘쓰는 일’이 ‘지우는 일’ 뒤에 오는 것이라는 역설 위에 시가 성립한다는 논리가 가능해진다.
저는 모든 게 다 ‘올가미’나 ‘올무’ 같아요. 어렸을 때, 특히 연애하고 결혼할 무렵에는 제가 여성이라는 것도, 청춘이라는 것도 올무처럼 느껴졌어요. 그래서 빨리 늙고 싶어했어요. 시인이라는 것도 저한테는 그래요. 그 덫에 걸린 것 같고…… 거기에 당했다거나 붙들려서 버둥대다가 죽겠다는 느낌은 아니고요. 그것을 상장이나 꽃다발처럼 정중하게 받거나 메달처럼 목에 걸 수도 있고 포승줄처럼 손목에 찰 수도 있지만, 이렇게도 저렇게도 하지 않는 게 저는 ‘삶’인 것 같아요.
『촉진하는 밤』에는 「올가미」라는 시가 있다. 시 속의 인물을 걱정하면서 기다리는 시적 화자 ‘나’가 나오고, 그것 자체가 다시 새로운 시의 도입부가 되어 ‘나’가 그 인물이 쓰다가 둔 시를 이어서 쓴다는 내용이다. 정작 그 인물이 찾아왔지만 ‘나’는 시를 쓰느라 그를 만나지 못한다. 시의 제목이 ‘올가미’인 것은 시적 화자가 시에 사로잡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 시는 고통스러운 쾌락으로, 향유의 대상으로 놓여 있어서 우리는 시와 쉽게 헤어질 수 없다.
그러나 어디 그뿐이랴. 징후적으로 읽었을 때, ‘올가미’는 역시 ‘죽음’의 물화(物化)이다. 「우리의 활동」이라는 시에도 “튼튼하고 둥근 올가미”가 등장한다. 이 시에서도 그것은 향유의 그것이다. 그것이 “적의”로 읽히지 않도록 시인은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인다. 이 시는 “나는 네 흉터를 오래 바라보았다”로 시작한다. ‘흉터’야말로 일종의 ‘그림자’라고 할 수 없을까. 그리고 그 그림자를 오래 본 사람은 반드시 ‘올가미’를 든 사람과 만나게 된다. ‘올가미’의 등장은 시가 고통스러우면서도 향유하는 것임을 말함과 동시에, 시는 상징적인 죽음으로 완성됨을 암시한다. ‘나’가 죽음으로써 시가 완성되면 올가미는 “크리스마스트리의 오너먼트”(「무한 학습」)로 변한다. ‘삶’의 희열로 말이다.
김소연 시에서 삶과 죽음은 ‘아침’과 ‘밤’이 그러한 것처럼 서로 이어져 있다. ‘아침’이란 “꿈에서 일어난 일들이 쏟아져 내렸다”(「그런 것」, 『수학자의 아침』, 문학과지성사 2013)로 표현되는 것으로, ‘아침’과 ‘밤’은 서로를 침범하며 섞인다. 삶과 죽음 역시 그러하다. 「수학자의 아침」(같은 책)에 나오는 “나 잠깐만 죽을게”라는 언표를 생각해보자. ‘잠시 죽음’은 그림자를 둘러보는 일이며, 기억을 상상하는 일이며, “언젠가 반드시 곡선으로 휘어질 직선의 길이를 상상”하는 일이다. ‘포물선’을 영원히 바라보는 일이다. 더 잘 살기 위한, 영원을 위한 양생(養生)의 비술이자 ‘호신술’이다.
시인은 ‘잠시 죽음’을 기다린다. 원한다. 그리고 부활하여 지나치기를 거듭한다. 끝을 지나간다. ‘잠시 죽음’은 ‘나’의 소거이다. 빛을 어깨 뒤에 진 채 백지 앞에서 고투하던 「그림자論」에서 더 나아가 『촉진하는 밤』에 이르면 미래의 작은 불씨마저 사라진 “완전한 암흑”에 다다른다. “오래 기다려온 장면”(「분멸」)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시인은 스스로를 “‘나’에 대한 관심도 별로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 말은 ‘틀림없는 나’라는 것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틀림없는 나’라는 것은 사실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질문을 던져주는 말인지 모른다. 오히려 ‘틀림없는 나’를 찾아 헤매는 과정에 ‘나’가 명멸하고 있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수학자의 아침』에는 “내가 누구인지 도무지 알 수 없을 때마다/나를 당신이라고 믿었던 적도 있었다”는 고백이 나온다(「누군가 곁에서 자꾸 질문을 던진다」). 그 고백은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로 끝난다. 「낯선 사람이 되는 시간」(같은 책)에서도 끝없이 경신(更新)하는 ‘나’가 그려진다. ‘나’는 이미 내가 아닌 그 누구이다. 그 누구의 말처럼 ‘타자’이다. 이 자기소거 충동은 타자에게 자기를 여는 것, 타자가 되는 것의 다른 이름이다.
저는 ‘나’라는 자아가 오롯하게 존재한다기보다 반투명 상태처럼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청자로서 많이 역할하면서 살다보니 자아라는 경계가 정확하지 않아요. 타자에게 침투당하고 타자와 서로 섞인다고 할까요. ‘나’라는 주체보다 타자를 시에 더 담고 싶어요. 저는 ‘나’에 대한 관심도 별로 없어요. ‘나’라는 개인에 대한 관심보다는 관계 속에 놓여 있는 ‘나’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요. ‘너’ 없이는 ‘나’가 작용하지 않는구나 싶은 거죠. 『눈물이라는 뼈』(문학과지성사 2009)를 낼 무렵부터 제 시의 테마에 내 이야기는 거의 없구나, 하게 되었고 저는 그게 무척 좋았어요.
「i에게」(『i에게』)의 ‘i’를 ‘또다른 나’로 보는 것은 비평가들의 해석일 뿐이라고 그녀는 일축하지만, 실제의 모델이 있더라도 ‘i’는 ‘나’가 소거된 자리에서 발생한 그림자, 캐릭터화한 그림자로 여겨진다. 혹은 ‘나’와 ‘너’가 교대하게 되는 스위치 같은 것이 있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누군가 곁에서 자꾸 질문을 던진다」의 저 고백이 유효하다면 ‘나’와 ‘나 아닌 것’의 구분은 쉽지 않다. 누구나 자기 경계선을 허물어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i’는 전작 『i에게』를 뛰어넘어 『촉진하는 밤』에도 출몰한다.
i를 위해 이불과 베개를 꺼냈다
자고 가라고 말했다
i는 우편함에서 자겠다고
그곳에서 같이 자자고 했다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이미 i는 잠들었고
나는 i 몰래 i 없는 시를 쓰러 갔다
—「머리말」 부분
이 시에서 ‘i’는 대상화한 ‘나’, 또다른 ‘나’처럼 보인다. 그러면서 동시에 시인은 ‘i’의 소거, ‘i 없는 시’를 도모한다. ‘i’가 당신들이 말하는 또다른 나라면 ‘i’마저 소거한 시를 쓰겠다는, “완전한 어둠”에 이르러야 한다는 다짐 같은 것이 ‘머리말’이라는 제목에 서려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자기소거 충동이 단순한 ‘부정(否定)’이 아닐까 의심해본 적이 있다. ‘자기부정’ 말이다.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에게 가장 거대한 흉터”라는 「편향나무」(『i에게』)의 언표에서 항상 ‘나’를 떠나려는, 사라지려는 충동의 이유를 찾은 것 같았다. 다시 말해 자기 존재 자체가 싫어서, 잘못 살아왔다는 생각 때문에,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도대체 그녀는 왜 자기의 그림자에, 자기의 흉터에 말을 거는 것일까. 나는 이 말 걸기가 그 어두운 것을 보듬으려는 시도라고 생각한다. 자기의 흉터를 보듬음으로써 더 많은 사람을 보듬을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시도 말이다. 이 자기부정은 ‘사랑’으로 열려 있는 운동이 아닐까.
동명사형의 ‘이해’, 사랑을 시작하는 얼굴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소재의 ‘불귀(不歸)’ 연작에 대해 묻자 그녀는 “돌아가지 못함과 돌아가지 않음 사이의 어떤 것”이라고 말했다. 말레이시아에서 살던 때의 ‘집’을 떠올린다.
비 온 뒤, 가시거리가 유난히 넓어진
길의 끝을 바라본다
연애편지를 봉하듯 야무지게 봉해진
그 끝에는 집이 있고
이 길은 집으로 가는 길이다
—「자유로」 부분
이 시는 끝을 지나치려는 『촉진하는 밤』의 자세와는 달리 끝을 염두에 두는 것이 아니냐고 묻자 그녀는 그 집이 실제로 길 끝에 있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명백한 사실이, ‘끝’이 ‘길=인생’의 궁극적인 목표, 도달점, 지향점이라는 의미와 불가분의 관계일 때 더 강력한 상징이 만들어진다고는 할 수 없을까. 집을 ‘사랑’이라고 해보자. ‘행복’이라고 해보자. 그것이 시원한 비 덕분에 더 잘 보이게 되었다고 해보자. 그러나 왜 더 잘 보일수록 불안해지는 것일까.
『눈물이라는 뼈』는 “자명한 실패”(「투명해지는 육체」)에서 솟아났다. 시집에 만연한 ‘눈물’ ‘통곡’ ‘오열’ ‘울음’의 계열체는 궁극적으로 시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중심 비유인 눈물=뼈는 새로운 돌부리=죽순=피리와 같이 변용하여 결국에는 ‘노래화’한다. 이때 저 뼈, 돌부리, 죽순, 피리의 계열은 모두 ‘수직적인 것’으로서 일종의 승화나 초월을 내포한다. 눈물은 하강했다가 바닥을 치고 다시 솟구친다. 어쩌면 이것은 일반적인 승화나 초월과는 좀 다른 것일지 모른다.
세상이 잠이 들자, 암늑대는 나무둥치를 갉았대. 발톱을 힘껏 세워 갉아댔대. 지빠귀는 더 이상 노래하지 않았대. 그 부리로 더 이상 먹지도 않았대. 앙상한 나뭇가지만을 쪼아대고 있었대. (…) 눈물이 사라진 어른들을 믿을 자신이 없어, 아이도 모로 누워 남몰래 운대. 밤새 흘러내린 눈물로 마당이 파이기 시작하면, 바람은 사라지고, 새로운 돌부리들이 죽순처럼 쑥쑥 마당을 뚫고 올라온대. 누군가는 그 돌을 주워 피리를 불고 누군가는 그 돌이 부르는 노래를 듣는대. 늑대가 섭생을 위해 밤새도록 무엇을 원했는지는, 그 노래에 귀를 기울이면, 다, 알 수가 있대.
—「눈물이라는 뼈」 부분
이 시에서 ‘암늑대’와 ‘지빠귀’는 ‘나무’를 사이에 두고 대치한다. 암늑대는 나무둥치를 갉고, 지빠귀는 식음도 잊고 나무를 쪼아댄다. 나무의 훼손은 관계의 실패를 의미한다. 나무를 사이에 둔 대치는 ‘거리(距離)’이면서, 그 무화(無化)를 향한 가능성이기도 하다. 나무는 일종의 다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눈물이라는 뼈』에서 ‘나무’는 “뿌리에서 뿌리로”(「위로」) 가닿고, “앙상한 포옹”(「너를 이루는 말들」)을 하는 촉각적인 연결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법하다.
암늑대와 지빠귀는 서로에게 더 다가가기를 원했는지 모른다. 서로에게 다가가려던 것이 서로에게 상처 주는 일이 되는 것은 얼마나 자주 있는 일인가. 이 시의 동화적인 아름다움은 내용 자체보다 노래가 된 이 우화를 듣기만 하면 누구나 “다 알 수가 있”다고 하는 데서 찾아진다. 다 알 수 있는 것을 암늑대와 지빠귀는 왜 모를까, 그렇게 단순히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건의 당사자들은 시행착오 속에서, 누구라도 알 수 있는 것을 자기만 몰랐다고 하는, 각자가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고 하는 회한 속에서 더 원숙한 아름다움에 이른다. 독자는 사건이 모두 종결된 다음이라는 유리한 위치에서 귀 기울여 사건의 이해에 매달린 끝에 그 아름다움을 관조하게 된다.
우리는 ‘사랑’을 말하기 전에 먼저 ‘이해’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수학자의 아침』에서 특히 중요한 어휘이며, 김소연의 시적 원숙함이 도드라져 보이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미 이해한 세계는 떠나야 한다 마치 고향처럼
이미 이해한 사람을 떠나듯이 마치 부모처럼
(…)
떠나도 떠나도 고향이 너무 많아서
당나귀처럼 귀가 땅에 닿는다
귀를 슬리퍼처럼 꺾어 신는다
—「식구들」 부분
여기에서 ‘이해’란 자기의 마음에 비추어 대상을 미루어 짐작한다는 정도의 의미라고 여겨진다. 우리는 자기 나름으로, 그렇게라도 세계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한다고 할 때 세계는 얼마간 세계 그 자체의 고유한 빛깔을 잃고 우리와 닮은 다른 어떤 것이 되고 만다. 이 이해에 안주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과 닮은 협소한 세계에 갇히게 된다. 가령 「식구들」이 앞서 읽은 「자유로」에서 얼마나 더 나아갔는가. 「식구들」은 자기의 정처(定處)를 인정하지 않고 운명론을 허용하지 않는다. 삶에는 완성이 있을 수 없다. 그럴 기미가 보이면 떠나야 한다. 길의 끝에 집이 있다기보다 다만 떠남이 있을 뿐이다. ‘이해’는 삶을 살아가는 과정 그 자체이며, ‘나’는 그 이해의 과정에 있을 뿐이다. 따라서 명사로서의 ‘이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동명사형으로서 ‘이해함’만 의미가 있다. 이해하므로 고향을 떠난다는 말의 진의는 고향과는 상관이 없는지 모른다. 우리가 떠나는 것은 고향이나 부모, 혹은 집이라기보다 오히려 이해 그 자체이다.
‘우리’라는 단어를 조심해서 쓰려고 노력해요. 어떤 준거 집단이 ‘우리’라고 말할 때, 제게는 연대나 유대보다 울타리 바깥을 철저히 배제하고 튕겨내는 벽의 느낌을 더 많이 주거든요. ‘우리’라는 말을 그렇게 사용하면 우리 바깥에도 우리가 있게 돼요. 난민을 어떻게 수용하느냐 같은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될 때 그렇잖아요. 그럴 때 ‘우리’는 그저 ‘나’를 말한다는 느낌이 들어요.
「백반」(『수학자의 아침』)이라는 시는 “풍경이 되어가는 폭력들 속에서” 살아남은 아이와 번번이 “질 나쁜 이방인이 되어 함께 밥을 먹”는 ‘나’의 이야기다. 『수학자의 아침』에는 ‘거리’에서의 기록을, ‘바깥’이나 ‘가장자리’에 선 사람들과의 만남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을 고유명사로, 어떤 사건이나 장소에 담긴 의미로 손쉽게 환원하는 것을 김소연은 경계한다. 오히려 그러한 명명이 그냥 흘려버린 것들, 개별적이거나 지엽적인 것들에 말을 건넨다.
그 애의 숟가락에 생선 살을 올려주며 말했다
우리,라는 말을 가장 나중에 쓰는
마지막 사람이 되렴
내가 조금씩 그 애를 이해할수록
그 애는 조금씩 망가진다고 했다
기도가 상해버린다고
—「백반」 부분
아이의 기도가 어떤 것인지는 드러나지 않았다. 아마도 세계에 대한 원한과 저주만이 그 내용인지 모른다. ‘나’는 ‘우리’라는 말의 가벼움을 말할 뿐이다. ‘우리’라는 말을 가장 나중에 씀으로써 울타리를 치더라도 무변(無邊)의 울타리를, 넓은 포용력을 가지라고 ‘나’는 ‘아이’에게 말한다. 그리고 아이의 숟가락에 가만히 생선살을 올려줄 뿐이다. ‘나’는 아이를 완전히는 이해할 수 없다. 다만 “조금씩” 이해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이 곡진함이 아이의 마음을 둘러싼 장벽을 조금 허문다. 원한과 저주의 기도를 상하게 한다. ‘내’가 아이를 완전히 이해했다고 한다면 아이는 마음의 벽을 더 높고 튼튼하게 쌓았을지 모른다. ‘이해’라는 최종적인 개념이 아니라 ‘이해함’의 과정에서 ‘나’와 ‘아이’는 서로 조금씩 섞이면서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가브리엘라 미스뜨랄(Gabriela Mistral)의 「느린 비」의 마지막 구절을 도입부로 삼아 그 시를 이어 쓰듯이 쓴 「이 느린 물」에는 사랑에 대한 시인의 생각이 부분적으로 드러난다.
그녀는 단 하루도
죽음을 떠올리지 않은 적 없었다
평생 동안 사랑해온 단 한 명을 대하듯 했다
그녀의 방에서만큼은
아무것도 아닌 그녀가 조용히 슬리퍼를 끌고
먹을 것을 챙겨 먹으며
다만 자기 자신을 위해 시를 썼다
약간의
약간의
아주 약간의 웃음 속에서
맹렬히
맹렬히
거의 모든 것과 맞서다가
그 방에서
더 깊은 안쪽으로 들어갔을 때
이대로 고요히 사라지고 싶다고 혼잣말을 했다
안쪽으로
안쪽으로
뱅글뱅글 파고들고 파고들고 파고들다가
그것이
사랑을 시작하는 얼굴이란 걸
알아챌 때도 있었다
—「이 느린 물」 부분
시적 화자 ‘그녀’는 죽음을 평생 사랑해왔다고 말한다. ‘죽음’은 다시 ‘사라짐’과 이어진다. ‘그녀’는 사라짐을 향해 내면으로 계속 침잠하는데, 때로는 그것이 “사랑을 시작하는 얼굴”임을 알아채기도 한다고 말한다. 사라지는 것이 사랑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사랑을 시작하려면 ‘나’를 고수해서는 안 된다. 사랑은 ‘내’가 없는 곳에만 있다. ‘그녀’가 “다만 자기 자신을 위해 시를 썼다”고 한 것은 염결성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사랑도 연대도 자기 스스로 이타성을 표나게 내세우지 않는다. ‘우리’라는 말을 강요함으로써 ‘나’를 지우는 것은 김소연이 생각하는 ‘나’의 소거가 아니다. ‘우리’라는 말 뒤에 ‘나’를 숨기는 것을 시인은 모욕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위한 시를 쓰기 위해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그 방에서 ‘그녀’는 무엇보다도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녀’는 ‘우리’가 되지 않은 채 다만 온몸으로 “거의 모든 것과 맞서다가” 더 깊이 천착해간다. “사랑을 시작하는 얼굴”은 “다만 자기 자신을 위해” 시를 쓰던 방이 아니라 그보다 더 안쪽으로 파고든 곳에서 그 윤곽을 드러내는 것인지 모른다. 자기가 사라진 곳에서 말이다.
사랑의 형식과 시간의 문제
기-승-전-결로 끝나는 고전주의적이고 깔끔한 형태의 시가 존재할 수도 있지만 그 깔끔함이 때로는 거짓말처럼, 가짜처럼 보여요. 저는 그렇게 깔끔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래서 저의 이런 상태 자체를 시가 수행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들고, 제가 그것을 지면 안에서 활자로, 행이나 연으로 구현한다면 어때야 할까 모색했던 것 같아요. ‘끝을 지나친다는 것’은 그 결과라고 할 수 있어요. 기-승-전-결의 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기-기-기의 시, 결-결-결-결의 시도 있을 수 있다고 보고, 그런 시가 현실에 더 가깝다고 생각해요. 무슨 형태를 발명하려고 해서 그런 게 아니라 제가 현실에서 체감하는 것은 이미 신체화하여 제 안에서 작동하고 있고, 그 온도, 방향이나 방법을 담을 수 있는 플롯을 찾다보니 그렇게 된 거죠.
『촉진하는 밤』의 새로움은 ‘사랑의 형식’을 그 나름대로 발명하고 있는 데서도 찾아진다. 이어 쓰기의 형식 말이다. 이 시집에서 그것은 몇가지 범주로 존재한다. 『촉진하는 밤』에는 특히 인유가 많이 쓰였는데, 앞에서 본 「이 느린 물」이나 프랑시스 잠(Francis Jammes)의 시구를 인유한 「며칠 후」의 이어 쓰기는 반복 가능성으로서 문학의 본질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원시의 문맥에서 따로 떼어온 시구가 새로이 반추되며 이러한 인용은 또다른 반복 가능성에 열려 있다. 이 범주의 시는 타자에게 언제나 열려 있다.
「더 잘 지운 날」 「식량을 거래하기에 앞서」 「올가미」 등의 시에는 ‘쓰기를 중단했다가 다시 이어 쓴다’는 설정이 있다. 이 범주의 시에서 중요한 것은 ‘끝’을 의식적으로 지나쳐버린다는 것이다. 이를 고전주의적 완결성에 대한 의식적인 위반으로 볼 수 있다. 이해에도 사랑에도 ‘끝’이 없듯이 시에도 ‘끝’이 없는 편이 사실에 가깝다고 시인은 생각하는지 모른다. 아름다움을 그만두는 것으로서의 또다른 아름다움이 이 범주에는 있다. 아름다움에 대한 고전주의적 관념의 바깥에 있는 또다른 아름다움 말이다. 이 다른 아름다움의 ‘새로운 원리’가 시인에게 가시적인 것으로 주어져 있다기보다 아름다움에 대한 기존의 틀에서 뛰쳐나가는 몸짓 그 자체에서 생성 중인 미정형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질문에 대해 답을 하지 않아도 돼/질문에 대해 답을 해보려 노력하다가 다른 진심을 전달해도 돼”(「2층 관객 라운지」)에서의 ‘다른 진심’의 세계를 이 범주가 개진한다.
‘사랑의 형식’은 「그렇습니다」와 같은 폐색(閉塞)의 원을 만들기도 한다. 이 시에서 “응, 듣고 있어”는 ‘그녀’가 ‘그 사람’에게 해준 마지막 말이었다가 나중에는 ‘그 사람’과 ‘내’가 ‘그녀’에게 들려준 마지막 말이 된다. 인유의 연쇄로서 반복 가능성과는 다른 의미에서의 반복, 닫힌 원의 세계가 또 하나의 범주로서 존재한다. 「접시에 누운 사람」이나 「동굴」은 수미상관을 만들지는 않지만 닫힌 원의 세계를 만든다. 두 시에는 모두 ‘너’와 ‘내’가 등장한다. ‘너’의 이야기가 먼저 나오고 ‘너’의 행위를 ‘내’가 반복하는 것으로서 이야기가 완성된다. ‘너’는 ‘내’가 쓴 시에 나오는 ‘나’의 또다른 자아이자 그림자이고, ‘나’는 그런 ‘너’를 지그시 바라보면서 늙어가거나 자기가 만든 세계(동굴)에 머물기를 선택한다. 이 닫힌 원의 세계에서 ‘그녀’는 ‘그 사람’이 되고 ‘나’는 ‘너’가 된다고 할 수는 없을까. 이 닫힌 원은 우리가 타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 덕에 완전히 닫히지는 않는다. 포물선의 일종이라 말해볼까.
이러한 형식들은 모두 ‘시간’의 문제를 내포한다. 「촉진하는 밤」은 이것을 ‘시간의 능멸’로 규정한다. “나는 가끔 시간을 추월한다/너무 느린 것은 빠른 것을 이따금 능멸하는 능력이 있다”라든지 “추억을 미래에서 미리 가져와/더 풀어놓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발상은 죽음을 앞둔 어머니를 돌보았던 체험에서 얻은 것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간병의 더딘 시간 속에서 간병자인 딸은 자기의 미래를 자기와 닮은 병상의 어머니에게서 미리 보아버리고, 그리하여 ‘미래’를 이미 탕진하고 세상에서 가장 불행해진다. 혹은 미구에 닥칠 ‘끝’을 상상한다. 그러나 ‘끝’이라니 정말 세계가 끝난다는 말인가.
어제와 오늘
사이에 유격이 클 때
꿈에 깃들지 못한 채로 내 주변을 맴돌던 그림자가
눈뜬 아침을 가엾게 내려다볼 때
시간으로부터 호위를 받을 수 있다
시간의 흐름만으로도 가능한 무엇이 있다는 것
참 좋구나
우리의
허약함을 아둔함을 지칠 줄 모름을
같은 오류를 반복하는 더딘 시간을
이 드넓은 햇빛이
말없이 한없이
북돋는다
—「촉진하는 밤」 부분
설사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고 해도 우리는 그 ‘끝’을 지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고 해도 사랑은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에 남아 있다. 그것은 ‘그림자’로 우리 주변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다. 우리는 그 사랑이 다시 시작되기를 기다린다. 누군가 접시에 물을 부어주기를 기다리기만 하다가 나이 들 수도 있고, 사랑을 노래하다가 자기를 만나러 온 사람을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다. “같은 오류를 반복하는 더딘 시간을”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어쩌면 작은 ‘끝’이 있기에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 ‘끝’에서 우리는 누군가 던진 ‘야구공’을 주워 다시 하늘을 향해 던져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작은 ‘끝’을 사랑해야지.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쁘게 지나쳐야지. 평범하기 그지없는 말이지만, 삶은 이어진다. 김소연은 그것을 필사적으로 확인하려는 것처럼 ‘끝’을 지나치려 하는 시인이 아닐까. ‘시간의 능멸’이란 다름 아닌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뒤섞는 시의 능력이다. 사랑과 연민의 시선을 기억해내는 능력이다. 시에는 시간의 호위, 시간의 가호(加護)를 이끌어내는 힘이 있는 것이 아닐까.
“드넓은 햇빛”에서 ‘무한’을 느낀다. 그 ‘무한’ 안에서 우리의 오류는 늘어만 가리라. 그러나 반복 속에서 차이가, 다른 일들이 생성되기도 하리라. 이 시간 시인은 어딘가에서 ‘올가미’를, ‘올무’를 들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크리스마스트리의 반짝이는 장식품으로 바꿀 수 있다.(2023.10.20. 창비서교빌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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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 별도로 출처가 표기되지 않은 시는 모두 『촉진하는 밤』 수록작.↩